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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보도] 탈북 고아들을 위한 전쟁 고아 한상만의 기적 이야기 (1)


북한 어린이들을 돌보는 한상만 씨
북한 어린이들을 돌보는 한상만 씨

북한에 사는 분들이라면 장마당 주변이나 길거리에서 구걸을 하는 아이들, 이른바 `꽃제비’를 심심찮게 보셨을 겁니다. 그런 북한 고아들을 위해 마지막 삶을 불태우는 한인이 있습니다.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에 있는 구호단체인 `한 슈나이더 국제어린이재단’의 대표인 한국계 미국인 한상만 씨가 그 주인공인데요. 6.25 전쟁 고아 출신인 한 씨는 현재 북한의 고아들을 도우며 탈북 고아들의 미국 입양을 위해 헌신하고 있습니다. 한 대표는 특히 골수암으로 9년째 투병 중이면서도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데요. 저희 ‘미국의 소리’ 방송은 오늘부터 세 차례에 걸쳐 한상만 씨의 기적 같은 사랑 이야기를 특집으로 보내드립니다. 한상만 씨의 휴먼 다큐 첫 순서 김영권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세상 많은 사람들이 기적을 꿈꿉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기적을 체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 전쟁의 좌절과 낙망 속에서 기적을 체험했던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지금도 기적을 써 나가고 있습니다.

지난 7월 27일 워싱턴의 내셔널 프레스 클럽. 북한의 자유를 위한 미주한인교회연합이 주최한 횃불집회 기자회견장에 한 중년의 신사가 나와 울먹이며 연설을 합니다.

“북한의 많은 꽃제비들이 길가에서 자며 구걸하고 있습니다. 그 어린이들을 미국 가정에 입양해 사랑과 희망의 기회를 줍시다.”

볼을 따라 눈물이 턱 밑으로 뚝뚝 떨어지고 있지만 이 신사는 주위의 시선 따윈 의식하지 않은 채 북한의 고아들을 살리자고 호소합니다.

이 중년 신사의 이름은 올해 67살의 한상만 씨. 미국인들은 그를 샘 이라고 부릅니다. 연설이 끝나자 수백 명의 청중이 기립박수를 보냅니다.

청중들의 박수엔 한상만 씨를 존경하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한상만 씨 자신이 기적을 체험했고 지금도 그 기적을 사랑으로 써 나가는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팜 트리는요. 절대 넘어지는 수가 없어요. 뒤로도. 뿌리가 다른 나무들은 이렇게 뻗치잖아요. 이건 스트레이트로. 왔다 갔다 해도 절대 꺾이지가 않아요…”

미국의 한인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서부 로스앤젤레스시 인근의 한 주택가. 뿌리가 직선으로 깊이 들어가 거센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는다는 키 높은 야자수들 앞으로 3층짜리 깨끗한 주택이 서 있습니다.

한상만: “내가 먹는 약들이에요.”
기자: “약들이 요일 별로 돼 있네요?”
한상만: “그렇죠. 이게 항암약이에요. 두 개 이걸 아침저녁으로 하나씩 먹고. 여기 하얀 게 있죠. 이게 폐렴약이구요. 그리고 이 걸 또 먹고…”

하루 적어도 6종류 7알, 일주일에 한번씩 먹어야 하는 약들까지 합하면 주 당 60여 개 이상. 그 때문에 사무실 겸 방으로 사용하는 3층은 마치 약국을 방불케 할 정도로 약들이 수북이 쌓여있습니다. 한 씨는 지난 2002년 골수암 말기 선고를 받은 후 암과 싸우고 있습니다.

한상만: “여기는 이게 있잖아요. 일주일에 한번씩 먹는 스테로이드 5알씩.”
기자:“그런데 이거 드시면 좀…”
한상만: “네 완전히 업사이드 다운 하이퍼. 사람을 막 엎어놔요. 오늘 밤에는 거의 막 밤을 샌다구.”
기자: “그런데 그 약들이 다 몸 안에서…”
한상만: “독약이에요. 완전히 독약이죠. 내 몸이 다 독약이라구. 이게 하루 이틀이 아니구. 이런 약을 지금 매일 먹어야 하니…”

골수암은 백혈병 중 골수에 암세포가 확산되는 병으로 빈혈과 깊은 고통을 수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2002년 의사는 한상만 씨에게 골수암 말기 진단을 내렸습니다. 그러면서 길어야 3년을 넘기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한 씨는 9년째 투병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지난 2007년에는 한 슈나이더 국제어린이 재단을 설립해 북한의 평성과 사리원 보육원에 식량과 의료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또 국내에서는 미국 가정들의 탈북 고아 입양을 가능하도록 하는 법안 청원운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습니다. 건장한 청년도 감당하기 힘든 일들을 해나가고 있는 겁니다.

“어떤 친구들은 농담 비슷하게 진담인지 네가 어떻게 암환자냐구. 그리고 네가 죽을 병 들었는데 무슨 얘들은 얘들을 생각해 너 살 생각을 해야지. 그래서 내가 야 이게 최고의 약이야. 이게 없었으면 난 벌써 죽었어. 매일 내 기도는 내 암 고쳐달라고 절대 기도 안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를 쓰시고 그 불쌍한 어린 영혼들을 살리려면 자동적으로 나를 연장시켜 줘야지. 그거 자동 아니냐. 한 영혼이라도 내가 구제시키고 구원하는 게 내 소망이니까 그게 내 기도예요. 매일.”

한상만 씨가 고아들을 위해 헌신하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그 자신이 6.25 전쟁 때 부모를 잃은 고아였기 때문입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 인민군이 남침하자 당시 서울에 살던 6살 소년 상만 군은 부모를 따라 남쪽으로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피난길은 대혼란의 연속이었습니다.

“이북 비행기가 막 비 오듯이 폭탄을 떨어트리더라고. 그래 가지구 엄청난 사람들이 길가에. 그러니까 다친 것은 아무 것도 아니야. 죽은 사람들이 이리 구르고 저리 굴리고. 많은 피난민들이 가다 보니까 발길에 체이고. 그래서 도망가다 보니까 우리 가족이 없는 거예요.”

당황한 어린 소년은 엄마 아빠를 간절히 찾았습니다. 하지만 뿌연 연기와 발에 걸리는 주검들, 그리고 남쪽으로 향하는 낯선 피난 행렬의 꼬리만이 길게 보일 뿐이었습니다. 6살 소년 한상만은 고아가 되고 맙니다.

“뭐 배고프니까 쓰레기통도 뒤지고 강냉이를 먹다가 한 두 개 붙어 있는 것도 뜯어 먹은 기억이 나고. 완전히 거지 꼴이죠. 그러니까 지금 이북의 꽃제비 같은 꼴이죠. 요즘 북한 애들..”

6살 소년에게 전쟁은 참혹했습니다. 홀로 자신을 지탱하기엔 너무도 어린 나이. 하지만 절망과 눈물, 두려움으로 떨고 있는 그에게 인생의 첫 번째 기적이 찾아옵니다.

“저녁에 동네에서 동냥하면서 다니는데 조그마한 충청도의 동네에요. 청양군 사양면 싸리골. 하여간 그 분을 만나서 그렇게 된 게 첫 번째 미라클이에요.”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한 소작농과의 만남. 그 만남은 이 어린 소년을 두려움의 집에서 사랑의 집으로 인도하는 통로가 됐습니다. 딱한 사정을 들은 소작농이 부모를 찾을 때까지 자기 집에서 함께 살자고 제의했기 때문입니다.

“그래가지고 그 집을 데리고 가더라구요 이 분이. 가보니까 집이 막 넘어질까 말까 하는 집이에요. 근데 방이 두 개가 있어. 조그마한 게. 나 보다 나이 많은 아들이 둘이 있고. 자는 데 이렇게 하면 이게 좁아서 안돼. 그래서 항상 옆으로 끼어 자야 됐지요. 지금 생각하면 참 기가 막힌 분이었어요. 어떤 때는 자기네도 먹을 게 없으니까 동냥하다가 우리 메기구. 정말 기가 막힌 분들이셨어요.”

정말 고마운 분들이었습니다. 소년 한상만은 그 집에서 6년을 지내며 초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홀로 서울로 향했습니다.

중학교를 들어가고 싶었지만 도저히 형편이 여의치 않았고 소작농 가족에게도 더 이상 부담이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찾겠다는 의지로 만 12살에 다시 돌아온 서울은 망망대해처럼 낯설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교회에서 만난 찬양대 지휘자의 소개로 빵집에 취직했지만 한 달을 버티지 못했습니다.

“잠자는 게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하다 보면 3-4시간 정도. 그래서 지치더라고요. 어린데 너무 힘들더라구. 어떤 때는 유일하게 쉴 수 있는 데가 화장실이에요. 거기 들어가면 누가 안 보잖아요. 그럼 거기서 잠깐 눈을 붙이는거에요. 그런데 아시잖아요. 그 시절 한국 화장실이 그 구더기. 구더기에다 냄새가 오죽해요. 잠깐 눈을 붙이지만 잘못하다 빠지면…내 목적은 학교 가는 건데. 그래서 언젠가 의사가 되는 게 꿈인데. 아니 새벽 1시에 문을 닫고 어떻게 야간학교에 다녀요?”

부모를 찾겠다는 꿈, 피난시절 폭격에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며 막연히 의사가 되겠다고 결심했던 꿈, 그래서 야학에 가고 싶었던 모든 꿈들이 물거품처럼 사라져갔습니다. 대신 6년 전 이 어린 소년을 절망 속으로 몰아넣었던 두려움과 낙망이 밀물처럼 밀려왔습니다.

종로 파고다 공원을 하염없이 걸으며 근심이 잠겨 있던 그날. 한상만 씨 인생의 최대 전환점이었던 또 한 번의 기적이 서울대학부속병원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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