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새 행정부가 대북 인도적 지원에 대한 지지 입장을 밝힌 것을 계기로, 워싱턴에서는 그동안 주로 수면 아래서 논의돼 왔던 인도적 지원의 투명성을 공개 검증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 선의로 추진되는 대북 지원 사업이 취약 계층에 혜택을 주는 대신 정권의 무기증강 예산에 여유를 주고 배급 체계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해 시장경제 태동을 방해한다는 비판이 구체화되고 있습니다. 백성원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미국 정부와 인권 운동가들에게 대북 인도적 지원은 이른바 ‘약한 고리’이자 ‘정치적 올바름’을 고려해야 하는 민감한 사안으로 인식돼 왔습니다.
대북 지원의 불투명성과 악용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돼 왔지만, 여기에 반대하는 조치나 발언은 생명줄을 제공하는 인도주의 활동을 정치적 이유로 제약한다는 논란과 비난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워싱턴의 인권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인도적 지원도 인권 원칙의 예외가 될 수 없으며, 취약 계층에 대한 지원과 인권 개선이 보장되지 않는 한, 지원을 계속하지 말아야 한다는 공감대가 진작부터 형성돼 왔습니다. 대북 인도적 지원 사업을 전담하는 국제기구들의 투명성 주장과 달리 식량 등 대북 지원품은 전달 즉시 북한 당국의 철저한 통제 아래 정권 유지의 수단으로 전용될 뿐이라는 우려가 깔렸습니다.
그레그 스칼라튜 미 북한인권위원회(HRNK) 사무총장은 VOA와의 전화 통화에서 “북한 정권이 인도주의 지원 분배를 총괄하는 데서 문제가 발생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녹취: 그레그 스칼라튜 HRNK 사무총장] “When it comes to humanitarian assistance, of course, one this assistance to reach the most vulnerable. The people who need it most. It becomes the problem when the regime is put in charge of distributing humanitarian assistance. Because basically we've been having serious issues with transparency, monitoring and evaluation of humanitarian programs, that's when it becomes a problem.”
“그동안 인도주의 프로그램의 투명성, 감시, 평가 모두 심각한 문제가 돼 왔던 건 이런 이유 때문”이라는 설명입니다.
베일에 가려졌던 대북 인도적 지원의 관리와 분배 실태를 더는 사각지대에 두지 말아야 한다는 인식은 특히 김정은 정권의 비자금과 군사·경제 예산의 흐름을 이해하는 전 북한 고위 관리들의 증언이 잇따르면서 더욱 확대됐습니다. 지원 물품의 처분은 무조건 당국의 우선순위에 따라 결정되며, 철저한 사전 각본에 따라 외부 감시망을 속이거나 따돌리는 관행에 수십 년째 변화가 없다는 게 증언의 핵심입니다.
인도적 지원의 허점과 개선 방안에 대한 제안은 북한을 탈출한 전 관리들과 워싱턴의 한반도 전문가들을 통해 백악관과 국무부에 공식, 비공식적으로 전달되고 있습니다.
전 노동당 39호실 간부를 지낸 리정호 씨는 VOA와의 전화 통화에서 “지방 출장을 다니면서 지원 물자가 전용되는 정황을 여러 차례 목격했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리정호 씨] “나는 북한에서 인도주의 지원으로 들어온 식량을 빼돌리는 현장을 여러 번 목격 했습니다. 북한 당국은 모니터링하는 국제감시단이 있으면 지원받은 식량을 주민들에게 공급하고 그 감시단이 떠나면 군대 차량을 동원해 다시 실어 가는 기가 막힌 행동을 합니다. 그때 주민들은 식량을 주었다가 빼앗아 간다고 뒤에서 욕하고 난리를 쳤습니다. 또 한번은 원산항에서 군대 차량 수십 대가 군용번호판을 지우고 일반 사회 차량인 것처럼 위장해 배에서 내리는 인도주의 지원 식량을 바로 군대로 실어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는 왜 군대 차들이 번호판을 지우는지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보니까 국제사회가 북한 군대에는 식량 지원을 못하게 돼 있는 것 같습니다.”
북한의 대표적 외화벌이 기관인 대흥총국의 선박무역회사 사장과 무역관리국 국장, 금강경제개발총회사 이사장 등을 거쳐 망명 직전엔 중국 다롄주재 대흥총회사 지사장을 지낸 리 씨는 “당보다는 군을 앞세우는 김정일 시대의 선군정치는 인도적 지원을 배분할 때도 군대를 노동계급보다 더 중시하는 형태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녹취: 리정호 씨] “북한 정권은 외부의 지원이 들어오면 우선 군대부터 분배하여 공급했습니다. 특히 쌀과 의약품은 군대로 대부분 가져감으로 일반 주민들은 구경도 못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 인도적 지원 협의 목적으로 북한을 방문하거나 현지에 상주하는 국제기구 요원들은 지원 물품 분배와 감시에 별 어려움이 없고 지방 주민들과도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었다고 말해왔습니다.
마크 로우코크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OCHA) 사무차장 겸 긴급구호조정관은 지난 2018년 7월 방북 당시 VOA와의 인터뷰에서 “분배 감시를 위한 현장 접근이 향상됐고 이전보다 관련 자료를 얻는 것도 훨씬 용이해졌다”며 “이로 인해 유엔기구의 지원이 어떻게 이용되고 있고, 어떤 지원이 더 필요한지 확인하는 것이 더 수월해졌다”고 밝혔습니다.
이에 앞서 토마스 피슬러 전 스위스 국제개발협력처 평양사무소장은 2017년 10월 VOA에 “지방을 방문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고, 필요하면 한 달에 몇 차례도 방문할 수 있었다”면서 “지방 주민들과도 제약 없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리정호 씨는 외부 지원 기구의 이런 설명은 매우 표면적이고 북한의 실상을 호도하는 것이라고 반박했습니다.
[녹취: 리정호 씨] “북한은 이동의 자유가 없고 안내원이나 운전사 모두 북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모니터링 요원들이 자유롭게 지원물자 분배 현장을 방문하고 감시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결국 모니터링 요원들은 북한 당국이 계획하는 대로 현장에 가게 되고 감시하게 됩니다. 그들이 방문하는 지역은 보여주기식으로 미리 사전에 준비해 놓은 장소들입니다. 또 웬만한 현지에는 숙박시설도 없기 때문에 모니터링하는 요원들이 며칠씩 머무르거나 24시간을 감시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감시 성원들이 한번 방문한 곳은 다시 방문하는 경우가 드뭅니다.”
리 씨는 “북한 안내원이 정전이나 열악한 도로 사정, 복잡한 승인 절차를 핑계로 현장 방문이 어렵다고 하면 그만”이라며 “그래서 대다수 북한인이 지원을 받아본 적이 없다는 반응을 보이는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실제로 존 에버라드 전 북한주재 영국대사는 2018년 12월 VOA에 “일부 지원은 확실히 전용된다면서 이 문제를 추적하는 단체들에 의해 잘 기록됐다”고 밝혔습니다.
특히, 국제기구 채널을 이용하는 대신 개별 국가 차원에서 국제 기준을 적용해 직접 분배 실태를 조사하려고 했던 시도는 대부분 실패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호주 외교부는 지난 2017년 12월 VOA에 보낸 이메일에서 대북 인도주의 지원을 중단했다면서, 유엔을 통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분배감시를 하려고 했으나 북한이 응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었습니다. “호주 정부가 지원하는 인도주의 사업에 대한 독립적인 분배감시와 평가 요청을 북한 당국이 반복적으로 거부해 세계식량계획, WFP의 2016년 대북 영양지원 사업에 대한 자금 지원을 끝으로 대북 인도주의 지원을 하지 않고 있다”는 설명이었습니다.
이와 관련해 당시 WFP 아시아 지역 사무소의 실케 버 대변인은 ‘VOA’에 공여국 각국 정부가 계획한 분배 감시 활동은 예정대로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인정했습니다. 다만, 이는 WFP의 분배감시 활동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같은 시기 스웨덴 외무부 산하 국제개발협력처의 수잔 미하일 지원 담당 국장은 보통 1년에 한두 번 현장 점검을 하고 있다면서도, 이 같은 분배 감시가 충분하지 않다고 밝혔습니다.
북한 주민의 먹을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취지로 추진되는 대북 인도적 지원에 오히려 북한의 열악한 식량 사정을 우려하는 인권 전문가들이 강력히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이런 한계 때문입니다. 취약 계층이 아닌 억압적 정권의 필요를 충족하는 현재의 방식은 북한의 인권 탄압을 묵인하거나 부추기는 만큼, 수십 년간의 악습을 바로잡는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따릅니다.
미국 비정부기구 북한인권위원회(HRNK)가 지난달 북한 인권 정책 제안을 담아 조 바이든 대통령 앞으로 보낸 서한에는 이런 부작용을 근절해 달라는 호소가 구체적으로 담겼습니다.
서한은 “여성, 어린이, 수감자 등 인도적 지원을 가장 필요로 하는 취약계층에 지원이 제공될 수 있도록 충분한 감시가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아울러 “인도적 지원은 반드시 북한 인권 증진과 결부돼야 한다”며, “북한 정부에 인도적 지원과 개발 지원을 할 때는 자의적 구금과 고문으로부터의 해방을 비롯해 표현, 종교, 이동, 집회, 양심의 자유를 포함한 주민 권리 보호를 위해 취해진 조치들에 근거를 둬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서한을 대표로 전달한 그레그 스칼라튜 북한인권위원회 사무총장은 VOA와의 전화 통화에서 “인권을 전면에 내세운 접근법을 인도적 지원의 기본 원칙으로 정해야 한다”며 “수요 평가와 현장 조사, 감시, 프로그램 평가 등을 통해 지원이 가장 절실한 이들에게 전달되도록 해야 한다”고 촉구했습니다.
[녹취: 그레그 스칼라튜 HRNK 사무총장] “So, the basic principle here should be a human rights up-front approach. Basically ensure that humanitarian assistance goes to those who need it most. How? Well, through running needs assessments, field assessments, monitoring, and evaluation of programs. This will be extraordinarily important.”
인권 전문가들은 특히 대북 정책 전반을 재검토 중인 바이든 행정부가 북한 인권 문제를 우선적으로 거론하며 인도적 지원 노력을 지지한다고 밝힌 데 대해, 싱가포르 정상회담 이후 묻혔던 북한 인권을 재조명하는 것은 환영하지만 대북 지원은 종전과 완전히 다른 방식이 돼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앞서 국무부 대변인실 관계자는 지난 4일 VOA에 “북한 같은 정권에는 반대하더라도, 북한인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노력은 지지한다”며 “우리는 북한인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방식으로 행동을 취하기 위해 노력 중이고, 북한이 기꺼이 수용한다면 중요한 인도적 지원 제공을 목적으로 한 국제적 노력을 계속 지지한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수잔 숄티 북한자유연합대표는 이와 관련해 “나는 대북 지원을 오랫동안 지지해왔지만, 오직 면밀한 감시가 이뤄질 때만 가능하다는 입장이며, 그렇지 않으면 지원은 오히려 북한인들을 겨냥하는 무기로 사용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수잔 숄티 북한자유연합 대표] “I have long advocated that we provide substantial assistance to North Korea but only if it is closely monitored otherwise it will be used as a weapon against the people of North Korea. Remember that there was enough humanitarian aid delivered to North Korea during the famine that no one needed to starve but people starved.”
그러면서 “고난의 행군 시기 충분한 인도적 지원이 제공됐지만 아사자가 속출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이같은 지적은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 이후까지 이어진 국제사회의 지원이 군부대로 우선 배분됐다는 탈북민들의 증언과도 맞물립니다.
리정호 씨의 아들 이현승 씨는 지난해 11월 VOA와의 인터뷰에서 2000년대 이전까지는 군부대가 식량난으로 하루 두 끼씩 먹었는데, 자신이 군 복무를 하던 2002년부터 2005년 사이에는 주로 한국에서 지원된 쌀을 주기적으로 공급 받았다고 밝혔습니다.
[녹취: 이현승 씨] “한국에 와서 보니까 그때 남북교류하고 식량 지원하고 했던 것이 다 북한 주민들에게 갔다고 이야기를 하시는데요. 북한 주민에게 그 식량이 간 것은 아니고요. 북한 군인들이 소비를 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부대에서 한국, 대한민국에서 지원한 쌀이라고 적힌 쌀 포대를 나르고 모든 군인들이 섭취를 했습니다...2000년대 초반에 남북 정상회담을 시작하면서부터 식량이 대대적으로 들어오게 되고, 대부분의 식량이 한국으로부터 지원된 쌀이었고, 북한의 거의 모든 군부대가 한국에서 지원된 쌀을 가지고 식량을 공급했습니다.”
2011년 이후 대북 지원을 중단한 미국 정부는 해당 국가가 얼마나 지원이 절실히 필요한지 살펴보고, 지원이 필요한 다른 나라들의 사정과 비교하며, 구호물자가 원래 의도대로 주민들에게 제대로 전달되는지 확인할 수 있는지 고려해야 한다는 지원 원칙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미 국무부 산하 국제개발처는 지난 2009년 북한 전역에서 시행하기로 합의했던 영양 실태 조사를 북한 당국이 허용하지 않은 것을 이유로 WFP를 통한 대북 지원을 중단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국제개발처 관계자는 북한 당국이 WFP가 배치하는 한국어 구사 요원을 당초 합의한 수만큼 허용하지 않은 것도 식량 지원을 중단한 이유라고 밝혔었습니다.
스칼라튜 사무총장은 “인권에 대한 전향적 접근법 아래 인권과 인도적 우려를 통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면서 “많은 북한인에게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알지만, 그들이 어디에 사는 누구이며 어떤 영양 결핍을 겪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알아야 하고, 이는 투명성과 수요 조사를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라고 거듭 강조했습니다.
[녹취: 그레그 스칼라튜 HRNK 사무총장] “It will be very important to find ways to merge human rights and humanitarian concerns under a human rights up-front approach. We know that there are a lot of people who need help in North Korea. But who are they? Where? What age group? What gender? What kind of nutritional deficiencies are we talking about? The only way to do this is through transparency and needs assessments.”
특히 전문가들은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은 1995년 고난의 행군 때부터 크게 늘어나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면서, 매년 국제사회가 상당한 규모의 지원을 하는데도 북한의 식량·보건 위기가 계속된다는 것은 정권의 잘못된 정책과 우선순위 때문이라고 비판합니다.
국무부도 북한인들이 처한 오랜 인도적 위기는 오로지 북한 정권이 자초한 것이라는 입장을 거듭 밝혀왔습니다. 북한 정권이 핵과 무기 프로그램에 들어가는 자금과 재원을 (주민용으로) 돌린다면 유엔의 대북 지원 비용을 완전히 충당할 수 있다고도 지적했습니다.
리정호 씨는 “대북 인도적 지원의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지원과 동시에 인민을 잘 돌보라는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고 촉구했습니다.
[녹취: 리정호 씨] “북한 지도자는 수십 년 동안 외부의 지원을 받고 있는 것을 창피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이제는 북한 주민들과 엘리트들도 누군가의 노예로 살지 말고 모두가 잘살 수 있는 시장 경제 체제를 받아들이도록 요구해야 합니다. 국제사회에서 북한에 인도주의 지원을 할 때는 반드시 북한 지도자가 핵 개발에 들어가는 막대한 비용을 인민들을 위해 쓰도록 촉구해야 하며, 인민들에게 자유를 주고 인권을 탄압하지 말라고 촉구해야 합니다. 그런 메시지가 없이 북한 당국이 달라는 대로 지원해 주고 심지어 북한 당국에서 외부지원이 필요 없다고 하는데도 받아달라고 사정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앞서 북한 정권은 지난해 한국 정부가 세계식량기구, WFP를 통해 지원하기로 한 쌀 5만t을 거부한 바 있습니다.
리 씨는 “무분별하게 이뤄지는 대북 인도적 지원은 김정은이 인민 경제에 써야 할 그만큼의 재원을 아껴 각종 무기 개발 등 국방력 강화에 전용하도록 도울 뿐 아니라, 중단된 식량 배급제를 되살리고 정권의 통제력을 강화함으로써 장마당 등 북한 내 시장경제의 태동을 억누르는 심각한 부작용을 가져온다”고 지적했습니다.
VOA 뉴스 백성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