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암살하는 내용을 다룬 영화의 배급사가 지난 2014년 해킹 공격을 당한 이후, 할리우드에서 북한을 악당으로 설정하는 영화가 사라졌습니다. 테러와 해킹 공격에 대한 할리우드 제작자들과 작가들의 두려움과 자기 검열 때문이란 지적입니다. 김영권 기자가 보도합니다.
지난 2014년 소니픽쳐스가 해킹 공격을 받기 전까지 북한은 미 할리우드 영화에서 떠오르는 단골 악당 중 하나였습니다.
특히 2013년에는 제작비만 7천만 달러~2억 달러 가까이 투입된 세 편의 대작 영화가 모두 북한을 악당으로 묘사해 주목을 받았습니다.
북한 요원이 주도하는 테러 집단이 백악관을 장악하는 ‘올림퍼스 해즈 폴른’(백악관 최후의 날),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조명하고 주인공들이 탈북자 구출을 위해 비무장지대로 향하는 모습을 담은 ‘지 아이 조2’.
제작비만 1억 9천만 달러를 투입한 ‘월드워Z’는 북한 당국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한 좀비 감염을 막기 위해 2천 300만 주민의 이빨을 모두 뽑아버린다는 설정을 담고 있습니다.
지난 2002년 007 영화 시리즈인 ‘다이 어나더데이’ 이후 북한 지도자와 정권을 악당으로 묘사한 할리우드 영화는 2014년까지 적어도 11편에 달합니다.
영화 전문가들은 냉전 해체로 할리우드의 단골 악당이던 옛 소련의 인기가 시들해졌고, 과격 이슬람 세력도 빈 라덴 등 주요 지도자들의 사망으로 관심이 적어지자, 미 정부로부터 악의 축으로 지목받으며 핵·미사일 개발로 국제사회를 위협하는 북한이 새로운 악당 후보로 떠올랐다고 분석했습니다.
게다가 미국을 향한 북한 당국자들의 거친 ‘말폭탄’과 미 여론조사에서 비호감 국가 1~2위를 다툴 정도로 높은 북한의 부정적 이미지도 북한이 영화의 단골 악당으로 떠오른 이유로 지적됐습니다.
하지만 이런 기류는 2014년 김정은 위원장 암살을 다룬 코미디 영화 ‘인터뷰’에 대한 북한 당국의 협박, 이후 배급사인 ‘소니픽쳐스’가 치명적인 해킹 공격을 받은 뒤 사실상 자취를 감췄습니다.
VOA가 영화와 TV 데이터베이스인 ‘IMDB”와 인터넷 백과사전인 ‘위키피디아’를 조회한 결과, 2014년 ‘인터뷰’ 이후 북한을 직접적인 악당으로 그린 할리우드 영화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소니픽쳐스 같은 보복 공격에 대한 할리우드 영화계의 두려움과 이에 따른 자기 검열 현상을 지적합니다.
미 서부 캘리포니아 주립 로스앤젤레스 대학교(UCLA)의 칼 로스티알라 법대 교수는 최근 미 외교전문지 ‘포린어페어스’ 기고에서 “할리우드 영화사와 작가, 제작자들은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나 북한의 독재자 김정은 같은 외국의 독재자들을 부정적으로 그릴 경우 해킹당하거나 해를 당할 것을 점점 더 두려워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특히 소니픽처스에 대한 해킹은 “외국 지도자나 정권을 자극하는 이들에게 개인적 또는 직업적 해악이 닥칠 수 있다는 우려를 (할리우드에) 더 가중시켰다”는 겁니다.
과거 ‘007 다이 어나더데이’에 대해 “더럽고 비열한 소극”이라며 강한 비난과 보복을 경고했던 북한 당국이 실제로 ‘소니픽쳐스’를 마비시키자 할리우드 영화업계가 바짝 움츠리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북한 외무성은 당시 ‘인터뷰’ 예고편이 공개되자 최고 수뇌부를 해치려는 “노골적인 테러 행위이며 전쟁 행위로 절대 용납할 수 없다”면서 “단호하고 무자비한 대응 조치가 취해지게 될 것”이라고 위협한 바 있습니다.
미 연방수사국(FBI) 등 정보 당국은 이후 대규모 해킹 사태가 발생하자 수사 뒤 배후로 북한 당국을 지목했고, 바락 오바마 대통령도 이를 거듭 확인하며 북한 정권에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습니다.
[녹취:오바마 대통령] “They caused a lot of damage and we will respond”
하지만 소니 해킹 이후에도 ‘HBO’ 등 여러 대형 업체들에 대한 외부의 해킹이 잇따랐고, 세계 상업영화의 심장부로 수입을 중시하는 할리우드로서는 이를 우려할 수밖에 없다는 분석입니다.
할리우드는 이런 이유 때문에 북한 말고도 미국과 지정학적으로 대척점에 있는 국가들을 악당으로 묘사하는 것을 상당히 자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로스티알라 교수는 이런 할리우드의 자기 검열은 일시적인 유행 현상이 아니라며,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보복 공격의 망령은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VOA 뉴스 김영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