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할리우드 영화 산업이 악당 기근 현상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적대국이나 독재자를 악당으로 묘사했던 과거와 달리 중국의 대규모 자본력, 북한과 러시아, 이란 등의 사이버 보복 공격을 우려해 할리우드 영화 제작사들이 자기검열을 하기 때문이라는 지적입니다. 김영권 기자가 보도합니다.
세계 영화의 거장인 찰리 채플린이 1940년에 제작한 ‘위대한 독재자’ (The Great Dictator)는 히틀러와 나치의 비인간성을 풍자해 돈과 예술성을 모두 챙기며 흥행에 크게 성공했습니다.
현대 영화의 거장으로 불리는 마틴 스콜세이지 감독은 지난 1997년, 중국의 압제를 받고 있는 티베트의 운명을 조명한 영화 ‘쿤둔’을 제작해 주목을 받았습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붉은 10월’ 같은 영화는 옛 냉전 시대를 생생하게 묘사한 대표적인 작품들입니다.
하지만 이런 독재자와 전체주의 국가 혹은 적대국을 소재로 하거나 악당으로 묘사하는 영화가 미 할리우드 영화산업에서 자취를 감추고 있습니다.
미 서부 캘리포니아 주립 로스엔젤레스 대학교(UCLA)의 칼 로스티알라 법대 교수는 최근 미 외교전문지 ‘포린어페어스’ 기고를 통해 “할리우드에 악당이 고갈되고 있다”며 그 이유를 자세히 분석했습니다.
우선 할리우드에 거대 자본을 투자한 중국 기업들의 압력과 미국에 버금가는 중국 영화시장(박스오피스)에 대한 수출 등을 고려해 할리우드 제작사들이 중국이 싫어하는 소재들을 아예 고려하지 않는 자기 검열(self-censorship)을 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실제로 미 AMC를 비롯해 세계 최대의 극장 체인을 중국의 완다그룹이 소유하고 있으며, 중국의 지난해 영화시장 수입은 93억 달러로 114억 달러인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입니다.
이 때문에 할리우드는 중국이 좋아하지 않는 주제를 없애거나 검열하고 있으며, 티베트와 타이완, 톈안먼 민주화 시위 같은 주제는 앞으로도 금기시될 것이란 겁니다.
지난 2012년 개봉한 영화 ‘레드 던’(Red Dawn)이 당초 중국이 미국을 침공하는 내용이었지만, 이후 중국을 의식해 침략자를 중국에서 북한으로 바꾼 사례가 이런 자기 검열의 대표적 사례란 지적입니다.
로스티알라 교수는 그러나 이런 현상이 중국에 국한되지 않는다며, “할리우드 영화사와 작가, 제작자들은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나 북한의 독재자 김정은 같은 외국의 독재자들을 부정적으로 그릴 경우 해킹당하거나 해를 당할 것을 점점 더 두려워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북한의 독재 체제를 풍자하고 김정은 국무위원장 암살을 그린 영화 ‘인터뷰’의 배급사인 소니픽쳐스가 북한 정권의 협박을 받고 2014년에 해킹 공격을 받았던 사례를 설명했습니다.
당시 소니픽쳐스는 해킹으로 업무가 거의 마비됐고 다양한 기밀 정보가 공개됐으며, 마이클 린튼 당시 회장은 “해커들이 단순히 물건을 훔쳐간 게 아니라 완전히 불태웠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로스티알라 교수는 채플린의 ‘위대한 독재자’ 이후 할리우드는 논란 많은 주제가 수익에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우려를 해왔지만, 소니픽처스에 대한 해킹은 “외국 지도자나 정권을 자극하는 이들에게 개인적 또는 직업적 해악이 닥칠 수 있다는 우려를 더 가중시켰다”고 지적했습니다.
소니 해킹 사건 이후에도 미국의 ‘HBO’, ‘넷플릭스’ 등의 대형업체들이 최근 몇 년 동안 해커들의 공격을 받았으며, 미 연방검찰은 ‘HBO’ 해킹 주범으로 이란군 전직 해커를 기소한 바 있습니다.
아울러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부정적으로 묘사한 소재들이 영화 각본 과정에서 삭제되는 등 제작사 자체 내 검열 과정이 더 강화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로스티알라 교수는 이런 여러 이유 때문에 할리우드의 자기 검열은 일시적인 유행 현상이 아니라며,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보복 공격의 망령은 사라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습니다.
실제로 할리우드는 지난 2002년 개봉한 ‘007 어나더데이’ 이후 ‘솔트’, ‘레드던’, ‘월드워Z’ 등 북한 정권을 악당으로 묘사한 영화들을 꾸준히 제작했지만, 소니 해킹 사건 이후에는 눈에 띄는 영화가 거의 없는 상황입니다.
VOA 뉴스 김영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