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최근 당 세포비서 대회에서 ‘고난의 행군’을 결심했다고 한 데 대해 한국과 미국 등 해외에 사는 탈북민들이 강하게 반발하고 있습니다. 주민들의 귀한 생명을 권력 유지보다 더 가볍게 여긴다는 것인데, 장기적으로 이런 정책이 정권에 역효과만 초래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김영권 기자가 보도합니다.
탈북민 출신 지성호 한국 국회의원은 지난 9일 인터넷 사회 관계망 서비스에 “김정은이 간고한 ‘고난의 행군’을 결심했다는 말 한마디로 수 백만 북한 주민들이 엄청난 고통을 당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습니다.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기 북한에서 가장 밑바닥 인생인 꽃제비와 신체 장애로 어려움을 겪었던 지 의원은 “약 300만 명의 북한 주민들이 아사하는 참담한 결과를 낳았음에도 또다시 북한 정권은 주민들의 생명을 담보로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러면서 “독재자 말 한 마디에 인권이 말살되는 이 참담한 현실이 지금도 북한에서 계속되고 있다”며, 전 세계가 북한 인권에 관심을 가져야 할 때라고 호소했습니다.
한국 통일부 산하 국립통일교육원에 따르면 북한에서 ‘고난의 행군’은 김일성 주석의 옛 항일빨치산 투쟁에서 유래된 것으로 사상 의지를 강조하는 정치적 구호였지만, 주민들에게는 “절박한 생존의 시기” , “삶과 죽음의 경계를 대표하는 상징어"로 정의합니다.
이런 배경 때문에 김 위원장의 ‘고난의 행군’ 발언 이후 탈북민 사회에서는 인터넷 사회관계망 서비스와 유튜브 채널 등을 통해 거센 비판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종합격투기 선수로 활동하며 어머니와 유튜브 채널 ‘탈북파이터TV’를 운영하는 장정혁 씨 모자는 11일 영상에서 과거의 악몽이 되살아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장정혁 씨 모자] “진짜 거짓말 아니고 길에 널려 다니는 게 시체였어. 정말 생각하기도 끔찍하고 정말 싫은 기억인데, 고난의 행군 시작한다니까 그때 기억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치는 거야. 야 또 끔찍한 일이 벌어지겠구나.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냐…” “참 말로만 ‘고난의 행군’한다고 하지만, 상류층들은 정말 아무 상관 없거든요. 본인들은 잘 먹고 잘살지만 일반 사람들은 정말 지옥 자체예요.”
장 씨 모자는 “너무 속상해서 가슴이 탄다”며 그렇지 않아도 자유가 없고 코로나로 더 힘든 상황에서 고난의 행군을 한다면 “지옥에서 지옥으로 더 떨어지는 것”이라며 안타까워했습니다.
47만 명이 구독하는 유튜브 채널 ‘강명도TV’를 운영하는 강명도 경민대 교수는 10일 올린 영상에서 ‘고난의 행군’ 발언은 북한 지도부가 주민들의 생명을 대량살상무기 개발보다 더 우습게 여기는 것을 방증한다고 말했습니다.
[강명도 교수] “북한 주민들이 수 백만, 수 천만 다 죽어 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핵을 포기하지 않고 외세에 의존함이 없이 자기 스스로 이 모든 난관을 뚫고 나가겠다는 어리석은 생각에서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겁니다…그 수많은 돈을 군사비에 지출하지 말고 국민들에게 돌린다면 지금도 국민은 그렇게 굶주림에 허덕이지 않을 겁니다.”
지난 2019년 백악관에서 국제 종교박해 피해 관련 대표들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면담했던 주일룡 씨는 12일 VOA에, 고난의 행군은 자신 같은 장마당 세대에도 악몽이라고 말했습니다.
한창 자랄 나이에 영양 부족으로 키가 자라지 못해 스트레스를 받는 장마당 세대 등 북한 주민들에게 “고난의 행군 결정은 주민보다 권력이 우선이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선포한 것과 같다”는 겁니다.
[녹취: 주일룡 씨] “다른 선택지가 분명히 있잖아요. 정말 주민들을 생각한다면 개방을 하고 국제사회에 도움을 요청하고. 그런 선택지가 분명히 있음에도 또 한 번 본인의 권력을 위해서 주민들을 안고 죽음으로 몰아넣는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거죠. 왜냐하면 김정은과 탑 10% 엘리트들은 피해를 보나요? 애꿎은 주민들만 죽어갈 텐데…”
미국과 영국 등 한국 밖에 사는 탈북민들도 김 위원장의 ‘고난의 행군’ 발언을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북한 꽃제비 출신으로 지난 2018년 청와대에서 열린 트럼프 대통령 방문 국빈만찬 때 미국 측 초청을 받았던 이성주 씨는 북한 지도부가 과거처럼 경제난 등 자신들의 실책을 외세의 탓으로 돌리고 결속을 강조하기 위해 ‘고난의 행군’을 다시 꺼내 들었다고 지적했습니다.
미국의 대학에서 국제 갈등분석해결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이 씨는 ‘고난의 행군’은 세상에 눈을 뜬 신흥 경제세력과 장마당 세대들이 노동당에 입당하면서 세속적 영향이 커지는 현상에 맞서 사상 강화와 비사회주의 척결을 강화하려는 것이라며, 그러나 이런 구실로 많은 주민이 “합법적인 죽음”을 당할 수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녹취: 이성주 씨] “합법적으로 사람을 죽이겠다는 거예요. 과거의 트라우마를 다시 소환한 것은 주민들에게 엄청난 공포죠. 고난의 행군이기 때문에 (주민들이) 죽어도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이 씨는 북한 주민들의 의식이 과거와 달리 많이 깨어 있다며, 김 위원장의 무리수가 오히려 장기적으로는 정권에 역효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녹취: 이성주 씨] “개미의 허리처럼 얇아진 사람들에게 다시 허리띠를 졸라매라고 하는 것은 허리를 끊는다는 겁니다. 조여 맬 허리가 없어요. 지금 상황은. 그런데 또 고난의 행군을 한다고 해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는다면 결국 김정은 정권에 부메랑으로 돌아갈 겁니다.”
북한 꽃제비 출신으로 최근 영국 지방선거에 구의원 후보로 출마한 티머시 조 씨는 김 위원장의 ‘고난의 행군’ 발언 소식을 영국인 동료들과 나누며 온종일 우울했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티머시 조 씨] “그것을 나누는 데 하루 종일 우울해서 가만히 앉아있었던 것 같아요. 트라우마란 게 이겁니다. 배고픔을 못 이겨서 먹을 것을 찾아 헤매던 사람들 속에서 굶어서 눈이 퉁퉁 부은 사람들이 아른거리고. 길에서 먹지 못해 결국 쓰러진 사람들도 보이고. 이런 생각도 들었어요. 과연 어떻게 하면 저 정권이 마음을 바꿔 문을 열까? 김정은을 만나서 진짜 부둥켜안고 그 심장에 손을 넣고 기도해 주면서 마음을 돌려달라고 애원을 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조 씨는 그러나 이성주 씨 등 해외에서 전문직으로 활동하는 북한 장마당 세대 출신 청년들과 교제하며 “부모 세대가 끊지 못한 노예의 사슬을 우리가 끊어 버리자”고 다짐한다고 말했습니다.
“김정은의 시대착오적인 ‘고난의 행군’ 발언이 오히려 북한을 변화시키겠다는 탈북 청년들이 사명을 더 다지는 계기가 된다”는 설명입니다.
VOA 뉴스 김영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