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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내 이산가족들 “70년의 기다림...미-북 상봉 이뤄져야”


미국 내 한인 이산가족들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이산가족’의 한 장면.
미국 내 한인 이산가족들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이산가족’의 한 장면.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0년이 지났지만 이산가족의 아픔은 아직도 아물지 않았습니다. 남북 이산가족과 달리 미-북 이산가족 상봉은 한 번도 이뤄지지 않은 가운데, 10만 명 정도이던 이산가족들은 이제 천 명대로 줄었습니다. 박형주 기자가 보도합니다.

1951년 ‘1.4 후퇴’ 피난민인 김순복 씨는 고향 집 주소를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녹취: 김순복 씨] “평안남도 강서군 보림면 간성리 495번지. 태성역전이라고 불렀는데 기차길 앞에 있었어요.”

7남매 중 맏딸인 김 씨는 전쟁이 나자 지금의 남편인 당시 정혼자와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얼마 뒤 아버지도 남쪽으로 내려왔지만, 할머니와 어머니, 너무 어렸던 동생들은 북에 남았습니다.

[녹취: 김순복 씨] “이렇게 여기까지 올지 몰랐지. 한 3개월만 피해있다가 돌아간다 해서 급히 나온 거에요. 할머니와 어머니, 동생은 너무 어려서 못 왔지.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지”

그러나 석 달은 결국 70년이 됐고, 20살 아가씨는 구순의 할머니가 됐습니다.

자동차 정비사였던 남편을 따라 1974년 미국에 온 김 씨는 현재 동부 버지니아주에서 살고 있습니다.

김 씨와 같은 미국 내 한국전쟁 이산가족은 현재 1~2천 명 안팎인 것으로 관련 단체는 추산하고 있습니다. 2000년 미 인구조사에선10만 명으로 집계됐지만, 대부분이 고령이었던 탓에 크게 줄었습니다.

이들이 그동안 북한에 있는 가족, 친지와 왕래할 길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북한 방문에 제약이 없었던 미국 시민인 경우 ‘브로커’나 미국 내 친북 성향 단체를 통해 일정 비용을 내고 북한 내 가족을 만나는 사례가 더러 있었습니다.

김순복 씨도 1988년 캐나다에서 활동하는 ‘브로커’의 도움을 받아 북한에 있는 어머니와 동생 4명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녹취 : 김순복 씨] “이북서 편지를 보냈더라고요. 동생이 ‘언니 어머니가 이렇게 이야기했어’라고 어렸을 때 놀던 이야기를 쭉 썼더라고요. 그래서 아~ 살아있구나 알았죠.”

미국사회에서 한인 이산가족 문제가 공론화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부터 입니다..

한인 1세대에게 북한에 있는 가족은 굳이 꺼내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습니다. 미 의회에 한인 이산가족 문제를 처음 알렸던 이차희 재미한인 이산가족상봉추진위원회 사무총장입니다.

[녹취: 이차희 사무총장] “이민 1세대들이 미국에 올 때 냉전적 생각이 그대로 있었어요. 새로운 땅에서 새 출발을 하는데 미국 정부나 주변에서 가족들이 북한에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또 영어 문제도 있었고, 문화적 차이도 컸습니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은 2000년 이후 20여 차례 있었지만, 미-북 간 상봉은 공식적으로 단 한 차례도 없었습니다.

기회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미-북 관계의 장벽을 넘어서지는 못했습니다.

2018년 6월 싱가포르 1차 미-북 정상회담으로 양측 간 유화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미 국무부는 북한과 협상을 위해 관련 민간단체와 화상 상봉 등의 방안을 협의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에 따라 재미한인 이산가족상봉추진위원회(DFUSA)는 당시 미국 내 한인 언론에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냈습니다.

이 공고를 보고 상봉 신청을 했던 김순복 씨는 금방이라도 북한에 있는 동생들을 만날 것 같은 기대에 부풀었습니다.

[녹취 : 김순복 씨] “그래서 난 금방 가는 줄 알았다니까요. 내가 1순위로 갈 줄 알았어요. 제일 나이도 많고 동생들이 살아 있으니까.”

재미 이산가족상봉추진위원회는 당시 105명의 한인 이산가족 명단을 취합해 국무부에 제출했습니다.

그러나 하노이 정상회담은 결렬로 끝났고 이후 미-북 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지면서 이산가족 상봉 가능성도 사그라졌습니다.

민간단체 대표 자격으로 국무부 등과 이 문제를 협의한 ‘이산가족USA’의 폴 리 대표는 24일 VOA에, 지난해 7월 18일 국무부와의 면담에서 당시 상황을 전해 들었다고 밝혔습니다.

[녹취 : 폴 리 대표] “The official said we raised that with North Korean side in Hanoi and in other negotiation, but North Korea official, North Korean government did not respond to the issue.”

미국 측은 하노이 회담 등 여러 협상에서 이산가족 상봉 문제를 북한 측에 제기했지만 북한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겁니다.

국무부는 VOA의 관련 문의에 답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가운데 미 하원에서는 지난 3월 국무부가 한국 정부와의 논의를 통해 이산가족 상봉 방안을 마련하도록 하는 내용 등을 담은 법안이 채택됐습니다.

2011년 당시 김계관 북한 외무성 제1부상과 이산가족 상봉 합의를 이끌었던 로버트 킹 전 국무부 북한인권특사는 24일 VOA에, 이산가족 문제 해결이 어려운 이유로 미-북 간 인식 차이를 지적했습니다.

[녹취 : 킹 전 특사] “I think the problem is the North Koreans don't see this as a humanitarian issue. They see political issue they see as an issue they can use to put pressure on the United States and get the United States to make concessions.”

북한은 미국과 달리 이산가족 문제를 인도주의 문제가 아닌 정치적 사안으로 인식하며, 미국을 압박하고 양보를 얻을 수 있는 지렛대로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는 겁니다.

올해 만 89세인 김순복 씨는 휠체어에 의지해 생활하고 있습니다.이제 체념했다면서도, 휠체어라도 타고 고향 땅을 밟고 싶은 마음을 숨기지 못했습니다.

김 씨는 ‘북한 주민도 이 방송을 들을 수 있다’는 말에 동생들에게 인사를 남겼습니다.

[녹취 : 김순복 씨] “아버지 이름은 김형초, 엄마 이름은 김정옥. 내가 살아 있으니까 너희들도 건강하게 잘 살아. 언제 만날지 모르겠지만 내 생각엔 못 만날 것 같아. 시집, 장가들 가서 할아버지 할머니 다 됐겠지만 한시도 너희를 잊어본 적이 없어. 아무쪼록 잘 살아~나 순복이 언니, 순복이 누나야.”

VOA 뉴스 박형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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