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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의 예수' 카폰 신부, 영광의 귀환…값진 유산 이어질 것"


미군 군종 신부로 참전한 에밀 카폰 신부의 조카 레이먼드 카폰 씨가 지난 2013년 4월 바락 오바마 당시 대통령이 카폰 신부에게 추서한 ‘명예훈장(Medal of Honor)’을 들고 있다.
미군 군종 신부로 참전한 에밀 카폰 신부의 조카 레이먼드 카폰 씨가 지난 2013년 4월 바락 오바마 당시 대통령이 카폰 신부에게 추서한 ‘명예훈장(Medal of Honor)’을 들고 있다.

‘한국전의 예수’로 불리는 에밀 카폰 신부의 신원이 70년 만에 확인된 이후 카폰 신부의 희생과 사랑에 다시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카폰 신부의 조카는 삼촌이 ‘영광의 귀환’을 한다며, 앞으로 삼촌의 값진 유산이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조은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 군종 신부로 참전했다 전사한 에밀 카폰 신부의 조카인 레이먼드 카폰 씨는 70년 만에 삼촌의 신원이 확인됐다는 연락을 받은 지난 3월 이후 넉 달의 시간이 “경이로웠다”고 표현했습니다.

[녹취:카폰 씨] “It's been an amazing, an amazing four months since March. Every time the phone rings I keep wondering. Gosh. What's the surprise going to be just, just, it's been incredible.”

카폰 씨는 5일 국방부 산하 전쟁포로.실종자확인국(DPAA)이 주최한 연례 설명회에서 이같이 말하면서 “이제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또 어떤 뜻밖의 소식이 있을지 계속 궁금해진다”며 “그저 믿을 수 없는” 시간들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삼촌의 신원이 확인됐다는 소식을 접한 그 순간의 놀라움은 카폰 씨의 기억 속에 여전히 생생합니다.

[녹취:카폰 씨] “I really would have been less surprised if the Pope would have called me and said he's been declared a saint than me getting a call from the army saying he's been identified. It was just something that we never believed would ever happen.”

카폰 씨는 “삼촌의 신원이 확인됐다는 연락을 처음 받았을 때의 놀라움은 교황이 전화를 걸어와 삼촌이 성인으로 시성됐다고 한다고 해도 그만큼은 아닐 것”이라며“그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믿지 않았었다”고 말했습니다.

카폰 신부의 유해는 1953년 한국전쟁 정전협정의 일한으로 미국에 돌아온 1천868구의 유해에 포함됐지만 신원 미상으로 남아있다가 약 70년 만인 지난 3월 5일 신원이 확인됐습니다.

카폰 씨는 삼촌의 신원이 확인된 이후 카폰 신부의 업적이 점점 더 널리 알려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녹취:카폰 씨] “His legacy has grown substantially. I mean his story used to be just a local story. He grew up in Pilsen Kansas, in the middle of nowhere, basically. And then it spread across Kansas and then as an Medal of Honor happened, his story became a national story. And now that his remains have been identified, his story has become a global story.”

거의 아무 것도 없는 캔자스 주 필슨에서 자란 동네 소년의 이야기가 캔자스 주 전역에 퍼졌고, 미군 최고의 무공훈장인 명예훈장을 받은 이후에는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졌다는 겁니다.

특히 이번에 신원이 확인된 이후 카폰 신부의 업적이 국제적으로 알려지고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한국전쟁에 미 육군 군종 신부로 참전한 에밀 카폰 대위가 1950년 7월 지프 군용차에 제대를 만들고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카폰 대위는 11월 중공군의 포로가 된 뒤 1951년 5월 수용소에서 숨졌다.
한국전쟁에 미 육군 군종 신부로 참전한 에밀 카폰 대위가 1950년 7월 지프 군용차에 제대를 만들고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카폰 대위는 11월 중공군의 포로가 된 뒤 1951년 5월 수용소에서 숨졌다.

1950년 7월 미 육군의 군종 사제로 한국에 파견된 카폰 신부가 속한 부대는 인천상륙작전 이후 평안북도 운산까지 진격했지만, 그해 11월 중공군에 포위됐습니다.

당시 카폰 신부는 중공군의 포위망에서 탈출할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이를 마다하고 현장에 남아 부상병을 돌보다가 붙잡혀 압록강 남단에 있는 중공군의 포로수용소 ‘캠프 5’에 수감됐습니다.

포로수용소에서도 카폰 신부는 부상자들을 돌보고 동료 포로들에게 믿음을 심어주며 정신적 지도자로서 봉사했습니다.

결국 카폰 신부는 장기간 영양실조로 1951년 5월 23일 포로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지난 2013년 4월 11일 바락 오바마 당시 대통령은 카폰 신부에게 ‘명예훈장(Medal of Honor)’을 추서했습니다.

앞서 로마 가톨릭 교회는 1993년 카폰 신부에게 ‘하느님의 종’이란 칭호를 수여했고, 카본 신부를 성인으로 추대하기 위한 조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카폰 신부의 희생과 사랑은 포로수용소에 함께 수용됐다가 풀려난 미군들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카폰 씨는 포로수용소에서 카폰 신부를 알게된 많은 미군 용사들이 이제는 고령에 접어들어 아쉽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이들 중 카폰 신부의 신원 확인 소식을 접한 뒤 얼마 전 생을 마감한 한 고인이 카폰 씨에게 한 마지막 한마디를 떨리는 목소리로 전하며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녹취:카폰 씨] “The last things he told me, the last things he said before he hung up was, I'm so glad I got to live long enough, that I can know that Father's coming home. I'm so glad I lived long enough to know that he's gonna be back together with us again.

And I'm so glad I lived long enough that I can finally say, mission accomplished.”

“카폰 신부가 집으로 돌아오고 있고 다시 우리와 함께 할 것임을 알만큼 충분히 오래 살았다는 것이 정말 기쁘다” “그리고 마침내 임수를 완수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오래 살아 기쁘다”는 게 고인의 마지막 말이라고, 카폰 씨는 전했습니다.

카폰 씨는 오는 9월 카폰 신부의 유해가 하와이에서 고향 캔자스 주로 돌아올 것이라며 “영광스러운 귀환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카폰 신부의 ‘귀환’이 끝이 아니라며, 오히려 카폰 신부의 이름이 더욱 널리 알려지고 값진 유산이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녹취:카폰 씨] “I truly don't look at this as closure. I look at this as Father Emil was named becoming larger, his legacy continuing on.”

카폰 씨는 카폰 신부가 세상에 ‘아주 큰 신발’을 남겼다며, 카폰 신부와 닮은 삶을 살도록 노력하는 것이 남겨진 이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말했습니다.

VOA 뉴스 이조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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