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8월12일, 한국군 1사단 12 연대장 김점곤 중령은 최악의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8월15일까지 부산을 함락시키라는 명령을 받은 북한군 3개 사단이 대구에서 북쪽으로 22킬로미터 떨어진 다부동을 방어하던 한국군 1사단을 공격해온 것이었습니다. 김점곤 씨의 말입니다.
“8월15일까지 전쟁을 끝내라는 것이지요. 거기까지 점령하면 전쟁이 끝나지 않겠느냐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기동력을 발휘해서 점령하면 미국이 개입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소련제 T-34탱크를 앞세운 인민군은 3사단, 13사단, 15사단 등 2만 명의 병력과 6백70문의 야포로 다부동을 거세게 밀어 부쳤습니다.
당시 1사단은 학도병 5백 여명을 포함해 7천6백 명의 병력이 전부였습니다. 야포도 북한군의 3분의1에 불과한 1백70문으로 병력과 화력, 보급 등 모든 것이 열세였습니다.
김점곤 씨는 8월15일이 다부동 전투의 절정이었다고 말합니다. 국군과 인민군이 너무 가까이 접근한 탓에 서로 총을 쏘지 못하고 여기저기 뒤엉켜 수류탄을 주고받는 혈투가 전개된 것입니다.
“백병전 했죠. 소총을 유효하게 잘 못썼어요. 그래서 중대장이, 농촌에서 온 병정들이 수류탄을 못 던지니까, 중대장이 하루 종일 수류탄을 던져서 어깨가 부어서 던지지 못한 경우도 있었으니까.”
1사단은 죽을 힘을 다해 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일 다부동을 잃게 되면 대구가 떨어지고, 그러면 낙동강 방어선이 무너져 부산 함락이 시간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습니다. 결국 1사단은 사력을 다해 북한군 3개 사단을 물리치고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는데 성공합니다.
한국전쟁 전문가인 한국 연세대학교의 박명림 교수는 만일 1사단이 다부동 전투에서 졌다면, 오늘의 한국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부동 전투를 포함한 낙동강 전투의 고수와 역전은 세계 자유진영이 공산진영의 공격을 방어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뿐만 아니라 더 크게는 이 방어를 딛고 역전을 시켜서 자유진영이 승리하는 역사적인 교두보 역할을 했다고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두 달 전까지만 해도 임진강 근처 문산을 지키던 1사단이 낙동강까지 밀린 것은 북한의 기습 남침 때문이었습니다. 소련제 T-34 탱크를 앞세워 38선을 넘어 온 인민군에 맞서 사력을 다해 싸웠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결국 무기와 장비를 버리고 도망치듯 한강 이남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국전쟁에 대한 여러 저술을 펴낸 연세대학교의 박명림 교수는 전쟁 초기의 이 같은 양상이야말로 6.25가 북한의 남침이었다는 확실한 근거라고 말했습니다.
“전쟁은 개전과 동시에 인민군이 파죽지세로 남진을 해서 3일만에 서울을 점령했습니다. 만일 남한군이 먼저 선제공격을 한 전쟁이라면 3일만에 자기 수도를 점령 당할 수는 없었죠.”
한국전쟁의 또 다른 분수령은 인천상륙작전이었습니다. 한국군이 낙동강 전선에서 혈투를 벌이는 동안 유엔군 총사령관인 더글라스 맥아더 원수는 인천상륙작전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인민군은 서울은 물론 대전, 광주, 청주, 전주, 목포 등 남한의 90%를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인민군의 허리를 끊고 전세를 역전시키자는 것이 맥아더 원수의 전략이었습니다. 주한 미국대사를 지낸 도널드 그레그 씨는 맥아더 원수의 인천 상륙작전이 ‘전략적 도박’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은 모든 사람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맥아더 원수가 조수 간만의 차가 큰 인천에서 상륙작전을 감행한 것은 연합군이 수세에 있던 전쟁을 공세로 전환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습니다. ”
1950년 9월15일 새벽 6시, 맥아더 원수는 전함 3백 척과 한-미 해병을 동원해 인천 상륙에 성공했습니다. 작전 개시 하루 만에 인천을 점령한 유엔군은 경인 국도를 따라 서울로 진격해 9월28일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했습니다.
한-미 유엔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낙동강 전선의 인민군은 일대 혼란에 빠집니다. 인민군 전선 사령관인 김책은 조치원을 통해 38선 이북으로 탈출했습니다. 나머지 병력도 총을 버리고 민간인 옷으로 갈아입은 채 피난민 틈에 끼어 북쪽으로 달아났습니다.
김점곤 중령이 소속된 1사단은 10월11일 38선을 돌파해 북진에 나섭니다. 미군과 함께 파죽지세로 북진한 한국군 1사단이 10월 19일 마침내 평양에 입성했을 때, 인민군 총사령관 김일성은 이미 사흘 전에 평양을 버리고 북쪽으로 도망친 상태였습니다.
통일의 꿈을 안고 압록강을 향해 진격하던 1사단은 10월 25일 평안북도 운산에서 정체불명의 대군과 조우합니다. 중공군 이었습니다. 중국 측 기록에 따르면 중공군은 10월13일 이미 압록강을 넘어 수십만이 산중에 포진해 있었습니다.
1사단은 전투 과정에서 중공군 포로를 잡아 이 사실을 도쿄의 유엔군사령부에 보고했습니다. 그러나 도쿄의 맥아더 원수는 이 정보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다시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국대사의 말입니다.
“맥아더 원수의 고집은 당시 대단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마도 그 해 연말까지 한국전쟁을 끝내겠다는 목표에 집착한 나머지 일선에서 올라온 정보보고를 무시한 것 같습니다.”
중공군의 참전은 한국전쟁의 흐름을 180도 바꿨습니다. 압록강 수풍댐을 향해 북진하던 한국군 1사단과 미군은 11월 28일 청천강을 건너, 평양을 버리고 다시 남쪽으로 후퇴합니다. 이 과정에서 북한 주민 수십만 명이 고향을 떠나 남한으로 내려 왔습니다. 또 동부전선에서는 북한 주민 수만 명이 흥남 부두를 통해 철수하는 미군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옵니다. 미 해군전쟁대학의 도널드 치섬 교수입니다.
“1950년12월, 북한 피난민 9만 명이 장진호 전투에서 패배해 철수하는 미 해병과 함께 흥남을 빠져 나와 남한으로 향했습니다. 흥남 뿐 아니라 원산과 서부의 진남포에서도 주민 철수 작전이 있었습니다.”
미군과 중공군은 그 후 38선을 사이에 두고 일진일퇴를 반복하며 공방을 벌입니다. 양측은 한 차례씩 서울을 뺏고 빼앗기며 한 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려고 사투를 벌였지만 전선은 대체로 38선상에 머물고 맙니다.
1951년 6월 소련의 말리크 유엔대표는 휴전회담을 제의합니다. 그러자 미국은 이를 받아들여 7월10일 개성에서 첫 휴전회담이 열립니다. 그 후 미국과 한국, 그리고 북한과 중국 대표는 2년 간 밀고 당기는 협상을 벌인 결과 1953년 7월27일 오전 10시 마침내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체결됩니다. 1천1백27일에 걸친 한국전쟁이 마침내 막을 내린 것입니다.
3년1개월 간 전쟁을 치렀던 김점곤 씨는 막상 휴전이 이뤄지자 허탈했다고 말했습니다.
“전쟁을 한 사람은 전쟁이 끝나면 허탈하죠. 뭐라고 간단히 감상을 얘기하기가 곤란합니다.”
한국전쟁은 당시 정부를 수립한 지 2년 밖에 안된 남북한을 철저히 파괴했습니다. 산업시설의 80% 이상이 파괴됐고, 전체 인구의 10%에 해당되는 2백만 여명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다시 연세대학교 박명림 교수입니다.
“한국군과 미군을 포함한 유엔군은 70만6천3백60명의 인명 피해를 기록했습니다. 이에 맞선 공산군은 인민군과 중공군을 합쳐 2백만3천5백 명의 인명 피해를 기록했습니다. 양쪽 모두를 합쳐 무려 2백80만 명이 인명 피해를 봤습니다.”
그 밖에도 한국전쟁은 수백만 명의 민간인 희생자와 실종자, 그리고 수만 명의 전쟁 미망인과 전쟁 고아를 남겼습니다.
무엇보다 한국전쟁의 가장 큰 비극은 남북한의 분단을 고착화 시킨 것이었습니다. 김일성은 남반부를 해방시킨다는 명분 하에 전쟁을 일으켰지만 수많은 인명을 살상했을 뿐, 남북 분단은 반세기를 넘어 60년 간 계속되고 있습니다.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올해로 60주년을 맞았습니다. 한반도가 일제의 식민 지배에서 해방된 지 5년 만에 발생한 한국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양분 된 공산 진영과 자유 진영 간 대리전의 성격을 띈 분쟁으로, 이후 미국과 소련을 중심 축으로 하는 동서 간 냉전이 본격화 됐습니다. 미국은 북한 공산군의 불법 남침으로 시작해 3년 간 계속된 한국전쟁에 대규모 병력을 파견했고, 미국 외에도 전세계 15개국이 유엔의 깃발 아래 남한을 지원했습니다. 저희 미국의 소리 방송은 9회에 걸쳐 한국전쟁을 되돌아 보는 특집방송을 준비했습니다. 오늘은 그 두 번째로 최원기 기자가 3년 간의 한국전쟁이 남북한에 미친 영향을 알아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