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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후계 구도 II] 김정일의 권력 투쟁


미국의 소리 방송 기자와 인터뷰 중인 김덕홍 씨(왼쪽)
미국의 소리 방송 기자와 인터뷰 중인 김덕홍 씨(왼쪽)

미국의 소리 방송 특별 기획 프로그램“김정일 이후 북한 권력, 어디로 가나”그 두번째 시간으로 ‘김정일의 권력투쟁편’입니다.

‘선군태양’ 조선중앙텔레비전 2009년 12월: “주체 53, 1964년 6월 19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에서 사업을 시작하신 첫 시기에 전당의 유일사상체계와 유일적 영도체계를 확립하는 사업을 현명하게 이끌어주신 (김정일) 장군님….”

해설 : 김정일의 기록영화 ‘선군태양’내용의 일부다. 1964년 당시 김일성 주석은 20대 초반의 큰 아들 김정일에게 노동당 중앙위원회 비서실 참사처에 처음으로 공식 직책을 부여한다. 이화여대 통일학 연구소 연구원 이승열 박사 얘기.

이승열 박사 (후계체제 전 과정을 보면, 64년부터 시작을 하면 대략 93년도까지니까 약 30년 가까이죠. 그런데, 실질적으로 김정일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73년 제 5기 7차 전원회의에서 김정일이 조직지도부와 선전선동부 부장 겸 비서의 직책을 맡게 됩니다. 북한 노동당에서 가장 중요한 직책을 맡는 거죠. 자신의 조직 공간을 확보하게 되고요, 1974년에 정치위원으로 되면서 후계자로서 공식 내정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1980년 제 6차 당 대회 때 정치국, 비서국, 중앙 군사위원 이 세 개의 직책을 다 가지면서 김일성 다음 가는 후계자로서 공인된다고 할까요? 그런 차원이 있고, 90년대에 넘어가면 군부 권력을 차지하면서 완성되죠)

해설 : 1966년 김정일이 24살 때 맡았던 “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책임지도원”은 직급은 낮지만 최고의 노른자위에 해당된다.만약 김일성의 아들이 아니었더라면 아무리 능력이 출중했다 하더라도 어린 나이에 그 직책을 맡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김덕홍 전 북한 로동당 중앙위원회 자료연구실 부실장의 얘기.

김덕홍 (66년에 노동당 중앙위원회 입문했을 때부터 김정일의 역사가 시작이 되는 거예요. 64년에 졸업을 하고 잠깐 (2차 구 처소에서) 일을 했는데, 우선 그 때를 회상해보면 김정일은 문화 예술 분야를 책임지고 그 때부터 일을 시작한 겁니다. 평판은 상당히 좋았습니다. 아버지, 강력한 독재자의 힘을 얻고 진행하기 때문에)

해설 : 실제 김정일은 1964년부터 66년까지 김일성의 현지 지도에 장기 출장 15번을 포함해 모두 31번이나 동행하며 정치 수업을 착실히 쌓았다. 그 시기, 김정일은 당 조직지도부장으로 권력의 핵심에 있었던

삼촌 김영주에게 정치학습을 받으면서 많이 의지했다. 다시 김덕홍의 얘기.

김덕홍 (이 만경대 가계에서 김정일이는 상당히 고립이 돼 있었습니다. 후계자는 김성애의 혈통인 김평일이가 돼야 된다.. 이렇게 하면서 상당히 고립이 되어서 움직였다 이거에요.. 그 때 김영주는 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장을 했지요.. 상당한 직위지요.. 그 때에 김영주네 집에 가서 밥도 먹고 거기서 자기도 하고 위로도 받고 그렇게 해 왔거든요.. 거기서 많이 배웠죠. 배웠지마는 김영주한테 가서 학습을 했다.. 하는 것은 오늘 김정일의 권위를 훼손시키는 거니까…) 46”

해설 : 그러던 중 1967년 북한 권력 내부에서는 갑산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 사업이 진행된다. 다시 김덕홍의 얘기.

김덕홍 (갑산파라는 것은 일제시기 국내 조직인데, 항일 빨치산 조직과 연결돼서 반일 투쟁한 갑산파란 말이에요. 그 뿌리를 갖고 그 조직에 망라된 사람들이 갑산파로 움직였단 말입니다. 김일성 모르게 박금철은 자기가 감옥생활 할 때 자기 부인이 혁명가의 아내라는 그런 형국을 만들어서 우상화 했어요. 그런 식으로 사상 교양사업에서 별도로 움직였단 말이에요. 4기 15차 전원회의, 그 때 와서 그 사람들 자기 정적을 숙청한 겁니다)

해설 : 그런데 이 사건이 김정일이 북한 정치의 전면에 등장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는데…..우드로 윌슨 센터 방문연구원으로 있는 북한대학원 대학교 류길재 교수.

류길재 교수 (이 회의는 사실 그 당시에는 1년에 두 번쯤 벌어지는 회의였기 때문에 그렇게 정치적으로 크게 주목을 받지 않을 수도 있는 회의였음에도 불구하고, 4기 15차 전원회의에서는 당시 60년대 전반기에 북한 정치의 가장 핵심에 있었던 이른바 갑산파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대거 숙청 당하는 중요한 정치적 사건으로 귀결이 됐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소위 북한 정치체제가 김일성의 유일지도체제의 핵심으로 떠오르는 유일사상체계라고 하는 것이 등장하게 되는 계기가 됐는데요, 다른 한 편에서 보면 김정일로의 후계구도를 등장시킨 계기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김일성의 권력과 권위를 굉장히 높임으로 해서 김일성의 혈육이고 김일성의 혁명 위업을 이어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적통이 바로 김정일이라고 하는, 그런 것들을 드러낼 수 있는 중요한 하나의 근거가 됐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해설 : 1967년에 있었던 제4기 15차 전원회의는 이렇게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에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회의였다. 힘을 얻은 김정일, 후계자의 자리를 놓고 삼촌 김영주와 권력 싸움을 벌이게 되는데…다시 김덕홍 전 북한 로동당 중앙위원회 자료연구실 부실장의 얘기.

김덕홍 (주체사상이 나오면서 김영주는 주체사상을 반대했단 말이에요. 그러나 김정일은 주체사상을 지지하고 주체사상으로 절대주의 국가를 세우려고 노력했어요. 김영주는 소련에 가서 공부해서 막스, 레닌 주의 영향을 많이 받고, 머리가 그런 유물변증법 그것을 그렇게..아니까 그것을 계속 반대하고, 이해를 잘 못하고 그러니까 김일성이 수령 절대주의 때문에 국가를 만들자고 고생을 했는데, 누구 말을 듣겠어요?)

해설 : 김영주를 몰아낸 김정일은 당 선전선동부 문화예술지도과장과 부부장으로 일하는 동안 자신의 전문 분야인 문화,예술을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을 위한 중요한 수단으로 이용하면서 김일성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한다.

피바다 혹은 다른 5대혁명가극 중 일부 (5대 혁명가극 중 꽃파는 처녀 중 일부)

해설 : 이화여대 통일학 연구소 연구원 이승열 박사.

이승열 박사 (김정일은 당 예술 분야 쪽으로 접근해서 피바다와 같은 수령을 절대화 하는 영화라던가, 음악이라던가, 이런 문학적인 (여건)을 통해서 김일성의 마음을 상당히 감동을 (시켰어요). 그래서, 결국은 김영주와 김정일의 싸움에서 누가 김일성의 마음을 얻느냐의 문제인데 김정일의 방법이 훨씬 더 효과가 있었던 것이죠)

해설 : 삼촌인 김영주와의 권력 투쟁에서는 유리한 고지를 차지했지만 김정일에게는 해결해야 할 숙제가 남아 있었다. 바로 계모 김성애와 그 아들 김평일등 이른바 곁가지를 정리하는 것이었다. 다시 이승열 박사

이승열 박사 (김평일과의 경쟁에서는, 사실 김정일과 김평일의 경쟁이라기 보다는 김정일과 김성애의 (경쟁) 이겠죠. 이 당시의 김정일의 입장에서는 계모지만 어머니였기 때문에 굉장히 조심스럽죠. 김정일 같은 경우에는 김성애를 권력으로부터 멀어지게 했던 가장 큰 요인이 무엇이냐면, 당 유일사상체계 확립이라는 큰 틀 안에서 김성애를 장악을 했는데, 당시 김성애가 여맹위원장이었는데, 김성애가 어떤 일을 했냐 하면, 김일성 사진과 자신의 사진을 동시에 걸어놓았다고요. 이 부분들이 물론 김성애의 동생 김성갑이라던가, 여러 가지 비리도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김정일에게 빌미를 제공해 준 것은 이것이 당 유일사상체계를 근본적으로 훼손한 것이거든요. 수령의 사상만이 유일하게 북한을 지배할 수 있는데, 김성애가 거기에 도전을 한 것이다, 분파행동을 했다라는 거죠. 이것은 북한 사회에서 절대적인 법이기 때문에 김성애 조차도 김일성으로부터 멀어지게 된 계기가 된 거죠)

해설 : 특히 김성애와 김평일의 곁가지들을 정리할 때 김정일은 오진우로부터 결정적인 도움을 받는다. 다시 노동당 중앙위원회 간부 출신 탈북자 김민규의 말.

해설 : 이렇게 김정일은 아버지 김일성의 신임을 얻고 곁가지를 정리하면서 한편으로는 혁명 가극을 통해 빨치산 원로들의 지지를 얻으면서 후계자로서의 입지를 굳혀간다. 김정일을 후계자로 낙점받게 한 일등 공신은 바로 김정일 자신과 모양새를 만들어준 김일성이라 할 수 있다.

김정일은 어떻게 자신의 체제를 만들어가는지, 3대 세습은 어떻게 시작되는지 다음 시간에 알아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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