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미국인입니다] 목사가 된 난민, 쏜 모지스 촐

미국 버지니아주 알렉산드리아의 세인트폴 교회에서 남수단인들의 예배를 인도하는 쏜 모지스 촐 목사.

고난과 역경을 뒤로하고 이제는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며 살아가는 난민들의 이야기, ‘나는 미국인입니다’. 오늘은 아프리카 수단 내전으로 고아가 된 로스트보이 출신, 쏜 모지스 촐 씨의 네 번째 이야기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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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국인입니다 오디오] 목사가 된 난민, 쏜 모지스 촐

아프리카 남수단 출신 쏜 모지스 촐 씨는 지난 2000년 미국에 정착한 난민입니다. 내전으로 부모를 잃고, 유일하게 남은 두 남동생과 함께 낯선 미국 생활을 개척해야 했지만, 지역 사회의 도움으로 촐 씨는 대학과 대학원까지 졸업하고 워싱턴 DC에 진출하게 됐습니다.

[녹취: 쏜 모지스 촐] “저는 현재 DC 정부에서 사회복지사이자 청소년 상담 지원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청소년들의 직업교육을 담당하고 있고요. 또 청소년들이 좋은 직장을 갖도록 상담과 연구 등을 진행하는데요. 한마디로 아이들의 성공적인 미래를 위해 도와주는 겁니다.”

워싱턴 DC 정부에서 일하며, 각종 난민단체나 청소년단체가 주최하는 행사에 강연자로 초대받기도 하는 촐 씨는 이제 유명인사가 됐는데요. 촐 씨의 진짜 꿈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현장음: 남수단 교회 예배]

워싱턴 DC에서 멀지 않은 버지니아 알렉산드리아시의 ‘성 바울 성공회 교회’. 매주 일요일 오전, 미국인들의 예배가 끝나고 나면 오후 2시부터는 남수단인들의 예배가 열립니다. 미국 교회에서 울려퍼지는 아프리카풍의 찬송가가 마치 아프리카 대륙에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데요. 남수단인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가 바로 쏜 모지스 촐 씨입니다.

[녹취: 고어 키르] “저는 케냐 카쿠마 난민촌에서 촐 목사를 만났습니다. 저는 당시 가톨릭 교회를 다녔고 촐 목사는 성공회 교회를 다녔기 때문에 그렇게 자주 보지는 못했지만, 서로 얼굴을 알고 지냈고 또 미국에 비슷한 시기에 오게 됐어요. 하지만 촐 목사는 미시간주에 정착했고 저는 워싱턴 DC 쪽으로 와서 이 교회에 오래 출석하고 있었는데요. 몇 년 전 우리 교회 목사님이 다른 지역으로 가게 되면서 촐 목사를 우리 교회 목회자로 초청했습니다.”

남수단인 교회에 오래 몸담은 고어 키르 씨는 어릴 때부터 신앙심이 깊었던 촐 목사를 눈여겨 봤고, 결국 교회의 목회자로 초청하기까지 이르렀다는 건데요. 촐 씨의 원래 꿈이 바로 목사였다고 합니다.

[녹취: 쏜 모지스 촐] “우리 부모님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남수단에서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녔고요. 난민촌에 있을 때도 교회에 갔습니다. 미국에 오게 된 것도 루터교 교회를 통해서였죠. 대학을 졸업한 후엔 신학대학원에 갈 생각을 할 정도로 평생을 기독교인으로서 살았고 목사는 평생의 꿈이었습니다.”

미국 버지니아주 알렉산드리아의 세인트폴 교회에서 쏜 모지스 촐 목사(왼쪽)가 남수단인들의 예배를 인도하고 있다.

현재 목회학 박사 학위를 공부 중인 촐 씨는 최근 ‘성 바울 교회’에서 정식으로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녹취: 쏜 모지스 촐] “어릴 때 힘들었던 시간을 신앙의 힘으로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기독교 단체의 후원과 도움도 많이 받았고요. 무엇보다 기독교 신앙을 통해 저는 희망을 잃지 않았어요.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제겐 희망이 있었죠. 내가 믿는 하나님이 도와주실 거라는 희망이요. ”

[현장음: 남수단 교회 예배]

신앙이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도 없었을 거라는 촐 씨. 예배를 인도하는 얼굴에선 평안함이 느껴지는데요. 촐 씨의 오랜 친구로 함께 교회에서 봉사하는 키르 씨는 촐 씨를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녹취: 고어 키르] “촐 목사는 정말 좋은 사람입니다. 성격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한 번도 촐 목사의 화가 나거나 슬픈 표정을 본 적이 없습니다. 난민촌에 있을 때부터 그랬어요. 당시 우리는 미국에 대해서도 전혀 몰랐고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될지 상상조차 못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믿었고 우리를 이끌어 주실 줄로 믿었죠. 그런데 정말 이렇게 워싱턴 DC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게 된 겁니다.”

촐 씨의 교회에는 수단내전으로 고아가 된 로스트보이 출신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촐 씨와 어릴 때부터 단짝이었던 친구 대니얼 뎅 씨도 만날 수 있었죠.

[녹취: 대니얼 아탬 뎅] “촐 목사와 저는 에티오피아에서 만났습니다. 같은 그룹에 속해있었고 함께 케냐로 갔어요. 카쿠마 난민촌에서도 같이 살았고 미국 미시간주에도 함께 오게 됐습니다. 아프리카에 있을 때 촐 목사는 저보다 어렸기 때문에 제가 장난삼아 때리기도 했고요. 물을 떠 오라고 심부름도 많이 시켰어요. 그런데 미국에 와서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뎅 씨 역시 워싱턴 DC로 오게 되면서 기나긴 우정을 이어갈 수 있게 됐다고 했습니다.

[녹취: 대니얼 아탬 뎅] “촐 목사가 저보다 먼저 워싱턴 DC에 왔고요. 2년 뒤에 제가 워싱턴에 있는 주미 남수단공화국 대사관에서 일하게 되면서 다시 만나게 됐죠. 그러니까 우린 1997년부터 20년이 넘는 세월을 함께 한 친구인 겁니다.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촐 목사가 화를 내거나 성질을 부리는 걸 본 적이 없습니다. 평화주의자라고 할까요? 어떠한 상황에서든 해결책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주위의 사람을 늘 품고 가죠. 로스트보이로 아프리카를 떠돌 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은 모습입니다.”

촐 씨의 삶은 비단 오랜 친구들에게만 감동을 주는 게 아니었습니다.

[녹취: 데이빗 뎅]

촐 목사를 좋아한다는 9살 소년 뎅 군. 무엇보다 설교를 정말 잘하고 또 설교를 듣고 나면 항상 배우는 게 있다는 뎅 군은 촐 씨를 통해 꿈을 갖게 됐다고 했는데요.

[녹취: 데이빗 뎅]

난민이 미국에 와서 목사가 되는 게 무척 어려운 일인데 그걸 해냈으니 정말 대단하다며 촐 목사를 보면서 자기도 커서 목사가 되겠다는 꿈이 생겼다는 겁니다.

촐 씨는 이렇게 미국에 있는 남수단 이민자들에게 희망을 주는 인물이자, 이들의 자랑이 되고 있는데요. 고향 남수단을 위해서도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고 또 교회를 통해 여러 지원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녹취: 쏜 모지스 촐] “저는 워싱턴에서 제 삶을 무척 만족합니다. 하지만 언젠가 제 고향 남수단을 위해 일하고 싶습니다. 교회 쪽이 될지, 정치 쪽이 될지 모르겠지만요. 일단 목회학 박사를 마치면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저의 경험이 고향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리라고 믿고요. 또 미국이 저를 위해 투자해준 만큼, 제가 고향에 돌아가 그 받은 사랑을 베푸는 것이 저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후엔 유엔(UN)에서도 일하고 싶습니다. 유엔의 도움을 많이 받았거든요. 유엔을 통해 남수단을 비롯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되어 주고 싶습니다.”

자신의 꿈을 하나, 둘 성취해 가며 더 큰 꿈을 향해 도전하는 촐 씨는 자신의 이야기가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많은 사람에게 희망이 되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녹취: 쏜 모지스 촐] “전 미국에 빈손으로 왔습니다. 공항에 도착했을 때 입고 있던 옷 외에 가진 거라곤 비닐봉지에 담긴 책 한 권이 전부였습니다. 가진 것만 없었나요? 부모도 없었고, 영어도 못 했습니다. 그런데요. 아메리칸 드림은 정말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도 시작되더라고요. 손에 비닐봉지 하나 달랑 들고 온 난민 소년이 이렇게 성공할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요? 굳은 의지와 희망을 잃지 않는다면 아메리칸 드림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네, 미국에 정착한 난민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나는 미국인입니다', 오늘은 아프리카 수단 내전으로 고아가 된 로스트보이 출신, 쏜 모지스 촐 씨의 네 번째 이야기와 함께했습니다. 다음 주에는 또 다른 난민의 이야기 들어보려고 하는데요. 기대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김현숙이었습니다. 함께 해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