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과거 '비핵화 합의' 여러 차례 번복

지난 2012년 2월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이 베이징에서 글린 데이비스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와의 회담한 후 호텔에 복귀하며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당시 미국과 북한은 2.29 합의를 체결했지만, 북한의 장거리 로켓 실험으로 무산됐다.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한국 대북특별사절단과의 면담에서 ‘비핵화’ 의지를 분명히 한 것은 예상을 뛰어넘는 파격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과거에도 비핵화에 합의하고도 이를 번복한 전례가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이연철 기자가 보도합니다.

북한은 1993년 3월 12일 핵확산금지조약(NPT)를 탈퇴하면서 1차 북 핵 위기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녹취:조선중앙TV] “부득이 핵무기전파방지조약에서 탈퇴한다는 것을 선포한다.”

이어 1994년 6월 13일 국제원자력기구(IAEA) 탈퇴를 선언했고, 이에 미국은 영변 핵 시설 폭격까지 검토하는 등 위기가 최고조로 치달았습니다.

이 같은 위기는 미국과 북한이 1994년 10월 21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미-북 기본 핵 합의’, 이른바 제네바 합의를 체결하면서 일단락됐습니다.

핵심 내용은 미국이 북한에 경수로 2기와 중유를 제공하고 북한은 핵 시설 동결과 핵확산금지조약(NPT) 복귀, 그리고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특별사찰을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이 같은 합의를 어기고 계속 핵 개발을 추구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제네바 합의에 따르면 북한은 원자폭탄의 재료가 되는 모든 핵 물질, 즉 플루토늄과 우라늄 농축을 못 하게 돼 있었지만, 북한은 이를 어기고 파키스탄 등지에서 우라늄 농축용 원심분리기를 비롯한 각종 설비를 몰래 들여왔습니다.

2002년 10월 북한을 방문한 제임스 켈리 당시 미국 국무부 차관보가 북한이 고농축 우라늄 방식의 핵 개발을 시인했다고 전하면서 2차 북 핵 위기가 불거졌습니다.

북한은 같은 해 12월 핵 동결을 해제한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했고, 2003년 1월에는 NPT 탈퇴를 발표했습니다.

[녹취: 조선중앙TV] “핵무기방지조약으로부터의 탈퇴 효력이 자동적으로 즉시 발생한다는 것을 선포한다”

국제사회는 남북한과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가 참여하는 6자회담이라는 새 협상 틀을 만들었고, 2005년 9월에는 9.19 공동성명을 이끌어냈습니다.

미국 등 6자회담 5개 참가국이 북한에 에너지 등을 제공하는 대신 북한은 핵무기를 파기하고 NPT 체제에 복귀한다는 게 골자였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2006년 7월에 대포동 미사일을 발사하고, 10월에는 1차 핵실험을 강행했습니다.

[녹취: 조선중앙TV] “우리 과학연구 부문에서는 주체 95, 2006년 10월 9일 지하 핵시험을 안전하게 성공적으로 진행하였다.”

국제사회는 북한에 대한 제재와 압박과 별도로, 북한과의 협상도 계속해, 2007년 ‘2.13 합의’와 ‘10.3 합의’ 등 9·19 공동성명의 구체적인 이행계획서를 마련했습니다.

북한은 2008년, 북 핵 문제의 상징인 영변 원자로의 냉각탑을 폭파시키는 전시성 행사를 벌이기도 했지만, 2009년 4월 5일 장거리 미사일 시험발사에 이어 5월 25일 제2차 핵실험을 감행했습니다.

[녹취: 조선중앙TV] “공화국의 자위적 핵 억제력을 백방으로 강화하기 위한 조치의 일환으로 주체 98년 5월 25일 또 한 차례의 지하 핵시험을 성과적으로 진행하였다”

북한은 김정은 국무위원장 집권 직후인 2012년 2월 하순 베이징에서 열린 미국과의 회담에서 2.29 합의를 체결했습니다.

북한이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 영변 우라늄농축활동의 임시 중단하고 미국은 북한에 식량을 지원하는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합의 역시 두 달도 안 돼 북한의 장거리 로켓 실험으로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26일 백악관에서 주지사들을 만난 자리에서 북한의 이런 행태를 비판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이 합의가 체결된 다음 날 이를 어기고 핵 연구를 재개했다며 이는 끔찍한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VOA 뉴스 이연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