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핵화에만 얽매이지 말고 다양한 의제를 동시에 협상하는 대북 전략이 필요하다고 필립 젤리코 전 국무부 자문관이 제안했습니다. 젤리코 전 자문관의 이런 견해는 최근 문정인 한국 대통령 통일외교안보 특보가 공개적으로 지지 의사를 밝혀 관심을 끌었습니다. 젤리코 전 자문관은 과거 백악관에서 독일 통일에 관여 했었고 조지 W 부시 행정부에서는 콘돌리자 라이스 전 국무장관 곁에서 차관급인 자문관을 지내며 한국전쟁 종전선언 등 평화 프로세스를 제안해 주목 받기도 했습니다. 버지니아대학 석좌교수로 있는 젤리코 전 자문관을 김영권 기자가 전화로 인터뷰했습니다.
기자) 최근 미국과 한국이 종전선언과 남북경제협력 등 여러 북한 문제를 놓고 이견이 커지고 있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현 상황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젤리코 교수) 문재인 한국 대통령의 광복절 연설과 미국 정부가 말하는 것을 들으면 마치 우리가 두 개의 다른 행성에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좋은 모습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비핵화 하나에만 몰두하지 말아야 한다고 얘기하는 겁니다. 우리가 싱가포르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것만 북한과 대화하려고 하고 남북 합의를 무시한다면 북한을 화나게 하고 한국과는 관계가 멀어질 수 있습니다. 그럼 사지선다형의 질문을 해봅시다. 우리가 A, 비핵화만 논의할까요? B, 평화 프로세스만? C, 경제 협력? 정답은 D 입니다. 이 모든 것을 동시다발적으로 다 논의해야 합니다.
기자) 트럼프 행정부가 그런 접근을 수용할 준비가 돼 있을까요?
젤리코 교수) 미국인은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는 데 너무 익숙해 있지 않습니다. 갈등을 해결하는 능동적인 외교적 어젠다를 배우는 데 익숙해있지 않죠. 그러다 보니 비핵화 협상이 막히면 대안은 없어지고 위기가 고조되는 겁니다. 학교에 비유해 봅니다. 만약 학교가 학생들에게 여러 과목을 가르치지 않고 너무 많으니까 한 학기에 한 과목만 배우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외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자)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런 포괄적인 대화를 진행할 수 있을까요?
젤리코 교수) 비핵화가 빨리 진전되지 않는 게 저의 가장 큰 걱정은 아닙니다. 북한이 핵·미사일 시험을 재개해 다시 군사적 충돌 위기로 돌아가지 않도록 한반도를 더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게 저의 관심사입니다. 남북관계 상황과 미래를 명확히 하기 위한 협상, 북한의 경제 개혁과 남북 경협을 유엔안보리의 대북 제재와 연계해 진전에 따라 특정 제재를 완화할 수 있는 방안, 장거리 미사일 등 핵 안보 사안을 미국과 남북한이 함께 다루는 것, 재래식 무기, 생화학 무기, 인도주의 인권 문제를 여러 트랙으로 나눠 동시에 논의하자는 겁니다. 그러면서 서로 동력을 제공하며 진전을 견인하자는 겁니다.
기자) 북한이 주장하고 한국이 지지하는 한국전쟁 종전선언이 중요 이슈로 떠올랐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젤리코 교수) “평화 선언에 관한 모든 아이디어는 어려움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저는 솔직히 평화선언이란 표현에 좀 비판적입니다. 분명하지가 않습니다. 정치적 성명 차원에서 남북이 전쟁상태가 아니라고 선언한다면 정전협정은 어떻게 됩니까? 국제법적으로 보면 남북한은 서로의 존재를 외교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양측은 국제법에 근거한 경계선(국경)에 합의하지 않았습니다. 남북한 사이에는 정전협정에 따라 휴전선이 그어졌을 뿐입니다. 전쟁 상황이 아니라면 정전협정과 휴전선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무엇으로 대체할 건가요? 따라서 평화 선언은 우리가 더 이상 전쟁상태에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멋진 정치적 성명은 될 수 있겠지만, 다음 절차가 불투명합니다.
기자) 그럼 어떤 해법이 있을까요?
젤리코 교수) 저는 평화 프로세스를 2+2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말해 왔습니다. 남북한이 먼저 주도적으로 종전이 되면 서로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할지에 관해 대화를 해야 합니다. 이런 대화를 통해 정리된 것을 미국과 중국이 뒤에서 합의로 보장하는 겁니다. 현재의 상황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면서 이런 평화 프로세스를 올해와 내년에 걸쳐 진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자) 하지만 북한 정권이 그 동안 너무 많은 합의를 위반했기 때문에 적어도 핵 신고와 사찰 수용 등 실질적인 진정성을 보여야 그런 포괄적이고 동시다발적인 협상이 가능하다는 게 여전히 워싱턴의 지배적인 분위기입니다.
젤리코 교수) 저는 미국에서 보수주의자로 간주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과거 소련과 대화할 때도 그들은 장기간에 걸쳐 많은 거짓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소련을 신뢰했기 때문에 협상을 계속한 게 아닙니다. 이런 다양한 수위와 단계에 걸친 대화를 통해 상황을 안정적으로 관리하고 개선하는 게 바로 외교입니다. 저는 지난 25년간 불규칙적이긴 했지만, 대북협상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었습니다. 따라서 저는 북한에 환상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경험 때문에 실용적인 외교 노력을 막아서도 안 된다고 봅니다.
기자) 안보와 경제, 인권을 한 바구니에 담아 협상해 동유럽 공산 국가들을 개방으로 유도했던 헬싱키 프로세스가 생각납니다. 하지만 북한은 과거 여러 차례 이 헬싱키 프로세스에 거부감을 밝혔었습니다. 인권은 특히 아주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데 가능할까요?
젤리코 교수) 북한 정부는 조건 없는 열린 협상을 거부하기 힘들 겁니다. 오히려 지금은 우리가 북한 정부의 대응을 쉽게 만들고 있는 거죠. 왜냐하면 우리는 비핵화 한 가지만 얘기하고 다른 것은 얘기할 단계가 아니라고 하니까요. 하지만 서로가 우려하는 모든 사안을 마주 앉아 얘기한다면 탈북민 등 인도주의 문제도 제기될 수 있을 겁니다. 헬싱키 프로세스는 단지 냉전 시절에 진행했던 다양한 트랙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우리는 당시에 핵과 재래식, 화학 무기 등 모든 사안을 같은 시기에 나눠서 협상했습니다.
기자) 광범위한 평화 프로세스가 평범한 사람들을 연결하고 서로 이해할 수 있는 사안들도 다룰 것이라고 언론 기고에서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런 과정에서 북한 주민들은 늘 소외되고 사각지대에 놓인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북한 주민도 그 대상에 포함되는 건가요?
젤리코 교수) “그렇습니다. 우리가 평화 프로세스를 아주 크고 떠들썩하게 진행하고 적용한다면 북한 관영 매체들도 이를 보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북한에도 아주 큰 뉴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북한 주민들도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정치와 에너지 등 일상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의제가 협상 테이블에 있다는 소식은 남북한 국민 모두의 관심을 끌 겁니다. 저는 이런 과정이 긍정적인 발전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기자) 조지 HW 부시 행정부 시절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에 계시면서 독일 통일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신 것으로 압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다음 달 세 번째 정상회담을 평양에서 열 계획인데 어떤 조언을 하고 싶으신가요?
젤리코 교수) 아주 간단합니다. 어떤 외교가 성과를 냈는지를 저는 과거 경험을 통해 많이 배웠습니다. 물론 당시 유럽과 지금의 한반도 등 주변 아시아의 상황은 많이 다릅니다. 하지만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은 많은 수위와 트랙에서 외교적 노력이 동시에 필요하다는 겁니다. 독일의 통일은 그런 상황에서 이뤄진 겁니다. 한 번에 하나씩만 해서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누구나 자신들의 우려하는 것에 대해 테이블에서 얘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지난달에 서울에 가서 한국 정부 관리들과 아주 유익한 대화를 했습니다. 평양에 가서도 저의 생각들을 북한 관리들과 직접 나눈다면 기쁠 것 같습니다.
비핵화에만 몰두하지 말고 다양한 의제들을 동시에 협상하는 전략이 필요하다는 필립 젤리코 전 국무부 자문관의 견해를 들어봤습니다. 인터뷰에 김영권 기자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