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아메리카] 편견과 차별을 극복한 세계적 여성 저널리스트, 넬리 블라이

세계적 여성 저널리스트, 넬리 블라이의 21살 당시 모습.

다양한 분야에서 미국을 이끌어 가는 사람들을 만나보는 '인물 아메리카'. 오늘은 편견과 차별을 극복한 세계적 여성 저널리스트 넬리 브라이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여성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극복하고 세계적인 저널리스트가 된 넬리 블라이는 본명이 엘리자베스 코크란 시먼(Elizabeth Cochran Seaman)입니다. 1800년대, 미국에서는 여성이 신문 기자가 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습니다. 집안 살림하고, 아이들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해 주는 것만이 여성의 역할이라는 관념이 지배하던 때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넬리 블라이는 당시의 그런 관념을 극복하고 여성 최초의 탐사 기자, 또는 추적 기자로 ‘탐사 보도(investigate journalism)’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고, ‘72일간의 세계 일주’라는 연재 기사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넬리 블라이는 작가, 발명가, 기업가이기도 했습니다.

넬리 블라이는 1864년, 펜실베이니아주의 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가정 형편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넬리는 아직 10대인데도 엄마와 14명의 어린 동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도시에 가서 일해야 했습니다. 가난 때문에 교사가 되기 위한 직업 훈련을 받았지만 정규 교육은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 환경인데도 글솜씨는 뛰어났습니다.

1885년 어느 날 펜실베이니아의 대도시 피츠버그에서 발행되는 일간지 ‘피츠버그디스패치(Pittsburgh Dispatch)’가 “여성은 요리와 육아에만 소질이 있다”라는 내용의 사설을 실었습니다. 넬리는 사설을 읽고 반박하는 글을 신문사에 보냈습니다. 신문사 편집장은 넬리의 글을 읽고 재능이 있는 여성이라고 판단해 그녀를 기자로 채용했습니다.

엘리자베스 코크란 시먼이 ‘넬리 블라이’라는 필명을 쓴 건 이때부터였습니다. 기자가 된 후 넬리 블라이는 이혼법, 노동자들의 근무 환경 등 사회적 문제점들을 날카롭게 지적하는 글을 썼습니다.

사람들은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블라이의 기사를 좋아했고 그녀는 전국적으로 소문난 기자가 됐습니다. 어느 날 ‘뉴욕월드’ 신문의 조셉 퓰리처한테서 스카우트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나중에 권위 있는 언론상 퓰리처상을 제정한 퓰리처는 블라이에게 뉴욕시의 블랙웰스섬 정신병원을 잠입 취재해 보겠느냐고 제의했습니다. 당시 뉴욕에 있는 이 정신병원을 둘러싸고 여러 해째 흉흉한 소문이 나돌고 있었습니다. 대단히 위험한 모험이었지만 블라이는 정신이상자 행세를 한 끝에 그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병원 사정은 너무나 끔찍했습니다. 1천600명이 넘는 환자들이 입원해 있었는데, 그것은 수용 인원의 두 배가 넘는 인원이었습니다. 저녁 식사는 상한 빵과 귀리 죽, 썩은 과일 같은 것뿐이었습니다. 건물에는 쥐가 들끓었습니다. 병원 직원들은 환자를 묶고 때리고 발로 차며 학대했습니다. 머리카락을 잡아당겨 얼음물에 얼굴을 그대로 집어넣기도 했습니다. 의사들은 환자들이 불만을 말해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병원 직원들은 환자들이 고자질했다며 더욱 학대했습니다.

정신병원에서 열흘간 머무른 뒤 블라이는 퇴원했습니다. 그러나 환자라며 입원한 사람이 환자가 아니라니 병원 측이 믿지 않았습니다. 신문사가 변호사까지 동원해 블라이는 가까스로 퇴원할 수 있었습니다. 자칫하면 넬리는 평생 그곳에 갇혀 있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블라이는 병원에서 나온 뒤 1887년 뉴욕월드에 ‘정신병원에서의 10일(Ten Days in Mad-House)’이라는 특집 기사를 싣고 끔찍한 현실을 폭로했습니다. 이 기사는 독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당국은 정식으로 뉴욕시 정신 병동 조사에 착수했습니다. 관련 병원 직원들은 모두 죗값을 치르게 되었고 시에서는 할당 예산을 대폭 늘려 병원 환경을 개선하기 시작했습니다. 넬리 블라이는 세계 언론계의 주목을 받으며 최초의 ‘탐사 전문 기자(investigate reporter)’로 불리게 됐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넬리 블라이의 상징은 72일간의 세계 일주였습니다. 블라이는 당시 인기를 끈 쥘 베른의 소설 ‘80일간의 세계 일주’라는 소설을 읽고 주인공 필리어스 포그보다 빠른 시일 내에 세계 일주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런 계획을 제시하자 신문사는 여자 혼자서 하기에는 너무 어렵고 위험한 일이라며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블라이의 강력한 요구에 결국 퓰리처는 여행을 허락했습니다. 블라이는 1889년 11월 14일 증기선 ‘오거스타빅토리아’호를 타고 뉴욕을 떠났습니다. 짐은 달랑 가방 한 개뿐이었습니다.

비행기가 없던 시절이라 배와 기차를 타고 다녀야 했습니다.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이집트, 스리랑카,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홍콩, 중국, 일본 등 4만5천km를 돌아 미국 동부 뉴저지로 돌아오는 여정이었습니다. 블라이는 처음부터 지독한 배 멀미와 싸워야 했습니다. 배와 우편열차 시간을 맞추느라 쩔쩔매기도 수십 번이었습니다. 해적이 들끓는다는 바다를 지날 때는 긴장했고, 열대성 장맛비로 흠뻑 젖기도 했습니다. 아시아에서는 교통수단이 열악해 중간에 지연되는 일이 많았습니다.

블라이는 영국령이 된 중국의 모습도 들여다보았습니다. 광둥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낸 넬리는 일본에서 120시간 만에 아쉬운 작별을 고해야 했습니다. 홍콩을 여행하고 있을 때 블라이는 경쟁사인 ‘코스모폴리탄(Cosmopolitan)’지가 자사 여기자를 내세워 자신의 기록을 깨뜨리려 하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러나 블라이는 값싼 경쟁에 말려들지 않겠다며 일축했습니다.

당시에는 해저 케이블이 상당히 가설된 상태여서 짧은 긴급 소식은 전보로 보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긴 정규 기사는 우편을 통해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기사가 여러 주씩 늦게 도착하는 일이 잦았습니다.

1890년 1월 21일, 넬리 블라이는 태평양을 건너 미국 서부에 상륙했습니다. 그리고 대륙을 통과해 1890년 1월 25일, 오후 3시 51분, 뉴저지에 도착했습니다. 72일 만으로 여기자의 단독 세계 일주 신기록이었습니다. 경쟁사의 기자는 나흘이나 늦게 도착했습니다.

넬리 블라이의 책 ‘72일간의 세계 일주(Nellie Bly’s Book: Around the World in Seventy-two Days)’

뉴욕월드 사장 퓰리처는 기차를 전세까지 내 넬리 블라이를 마중 나갔습니다. 이어서 출판된 넬리 블라이의 책 ‘72일간의 세계 일주(Nellie Bly’s Book: Around the World in Seventy-two Days)’는 국제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고, 그녀의 대명사가 됐습니다.

넬리 블라이는 1차 세계 대전 중에는 동유럽 전선을 취재했습니다. 특히 세르비아와 오스트리아의 전쟁 지역에 들어가 취재를 한 최초의 여기자였습니다. 블라이는 취재 중 영국 간첩으로 오인돼 체포되기도 했습니다.

블라이는 발명가이기도 했습니다. 여러 발명품 중에서도 원유통, 우유통, 쓰레기통 등을 새로운 형태로 만들어 특허를 얻기도 했습니다. 넬리 블라이는 31세 때인 1985년 자신보다 42살이나 더 많은 로버트 시먼이라는 남성과 결혼했습니다. 73세의 로버트 시먼은 백만장자 사업가였습니다.

남편은 결혼 후 얼마 안 돼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자 블라이는 기자생활을 그만 두고 남편의 사업을 이어받았습니다. 그러나 블라이도 장수를 하지 못하고 1922년 57세로 뉴욕에서 타계했습니다.

넬리 블라이는 미국 여성 명예의 전당에 헌정됐습니다. 미 우정국은 여성 저널리스트 시리즈 우표에 그녀의 초상화를 올렸습니다. 워싱턴 D.C.에 있는 언론 박물관 뉴지엄(Newseum)에는 블라이의 정신병원 잠입 취재 내용이 자세히 전시되고 있습니다. 그녀의 이야기는 다큐멘터리와 브로드웨이 뮤지컬, 영화 등으로도 만들어졌습니다.

미국에는 공원, 박물관, 철도, 뮤지컬 등 넬리 블라이 이름을 딴 많은 시설과 행사들이 있어 차별과 편견을 타파하는데 몸소 뛰었던 그녀의 용기를 되새겨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