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회고록' 한국서 잇단 판매 중단…"국가보안법 무력화 우려"

민족사랑방 김일성 항일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표지.

한국에서 최근 출간된 북한 김일성 주석의 회고록이 국가보안법 위반 논란을 촉발하면서 주요 서점들이 잇따라 판매를 중단했습니다. 사법당국이 출간 경위 조사에 나서는 한편 법원에도 해당 서적에 대한 판매금지 가처분 신청이 제출됐습니다. 서울에서 김환용 기자가 보도합니다.

최근 한국에서 출간된 북한 김일성 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의 판매금지 가처분 신청에 따른 한국 법원의 첫 심문 기일이 27일 진행됐습니다.

도서출판 ‘민족사랑방’이 지난 1일 출간한 ‘세기와 더불어’는 김일성 주석의 항일투쟁사를 내용으로 1992~1998년 북한의 조선노동당출판사가 펴낸 원전을 그대로 옮긴 책입니다.

이 때문에 사실 왜곡과 한국 내 실정법 위반 등 논란을 촉발시켰습니다.

판매금지 가처분 신청을 낸 시민단체 법치와자유민주주의연대, NPK의 소송대리인인 도태우 변호사는 28일 ‘VOA’와의 전화통화에서 “해당 회고록은 북한 전체주의 체제의 바이블에 해당한다”며 “회고록 출판이 허용되면 다른 북한 관련 출판물들이 제한 없이 배포되는 데 마중물 역할을 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도 변호사는 이렇게 되면 국가보안법의 핵심 조항인 찬양고무죄가 완전히 무력화되고 결국 법 자체가 사문화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녹취: 도태우 변호사] “이 책의 일반 유통이 슬그머니 허용돼 버리면 다른 북한체제 선전물들을 막을 근거가 사실상 없어져 버립니다. 더 심한 것도 허용됐는데 왜 우리를 막느냐, 이렇게 되는 거죠. 그리고 책을 설명회를 연다, 그 책에 대해서 강연회를 연다, 그 책을 내용으로 공연을 한다, 다 막을 근거가 없어지는 거죠.”

반면 피신청인인 민족사랑방 측은 27일 재판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이 출판사 김승균 대표는 항일운동이 남북한이 공유하는 역사란 걸 알리고 싶었고 이 책의 출판을 계기로 남한이 북한과의 화해를 적극 추진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려는 의도였다는 입장으로 전해졌습니다.

‘세기와 더불어’는 한국 법원이 과거 이적표현물로 판단했던 서적입니다.

2011년 대법원은 평소 북한체제를 추종하다 정부 허가 없이 방북한 혐의 등으로 기소된 정모 씨에 대한 상고심에서 “정씨가 소지한 ‘세기와 더불어’ 등은 이적표현물에 해당한다”고 판단, 징역 1년과 자격정지 1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한 바 있습니다.

한국 경찰도 지난 22일 책 출간과 관련한 고발을 접수하고, 출판 경위와 과정 등 기초 사실을 조사 중입니다. 출판업계 관계자들을 비공식 면담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한국 통일부는 “해당 출판사에 대해 출간을 목적으로 한 반입 승인을 한 사실은 없다”고 거듭 확인하고 출판 경위를 자체 파악하는 한편 사법당국 조사와 법원 판단 등을 지켜보면서 정부 차원에서 취할 조치들을 살펴보겠다고 밝혔습니다.

책을 유통시켰던 주요 서점들도 잇따라 판매를 중단했습니다.

이 책은 당초 출판사와 서점 간 직거래 방식이 아니라 800여 개 한국 내 출판사들이 조합원으로 가입한 출판인단체 한국출판협동조합을 통해서만 온·오프라인 서점에서 유통됐습니다.

10여 부를 이미 판매한 교보문고는 논란이 일면서 지난 23일부터 온·오프라인 신규 판매를 중단했고 예스24, 알라딘, 인터파크 등 다른 온라인 서점들도 총판을 통한 판매를 중단한 상태입니다.

한국 내 일각에선 체제 경쟁에서 승리한 한국사회가 이제는 북한 출판물의 유통에 보다 관대할 만큼 성숙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습니다. 대북 강경 성향의 보수야당에서도 이런 목소리가 들립니다.

국민의힘 하태경 의원은 ‘VOA’와의 전화통화에서 한국 내 보수 주도층이 과거처럼 북한을 두려워하기 보다는 낮춰 보는 세대로 바뀌고 있다며 높은 국민의식을 믿고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자고 말했습니다.

[녹취: 하태경 의원] “우리가 북한과 똑같은 체제가 될 순 없다, 북한이 한류를 막는다고 해서 우리가 국민들에게 영향력이 거의 없는 그런 책을 막을 필요가 뭐가 있냐, 그냥 풀어 놓고 조롱해주면 된다, 이런 세대로 보수가 지금 교체되고 있는 것 같아요.”

국민의힘은 앞서 지난 22일 논평에서 “김일성이 주인공인 허황된 소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며 “일부 사람들이 이를 이용해 선전선동에 이용할 수 있다는 우려는 되지만, ‘중국 만주벌판과 백두산 밀영을 드나들며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던 생생한 기록’이라는 허구에 속아 넘어갈 국민 수준이 아니”라고 밝혔습니다.

민간 연구기관인 한국국가전략연구원 신범철 외교안보센터장은 한국사회가 북한 서적 출판에 보다 유연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했지만 현행 법과 절차는 중시돼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녹취: 신범철 센터장] “관련 서적의 내용과는 별개로 기존 통일부 승인 절차가 있다면 관련 절차를 밟고 발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고요, 이제 북한 서적과 관련해서 한국사회에서도 어느 정도 수용할 수 있는 그런 폭넓은 이념의 장이 펼쳐졌다, 그렇게 판단하고 있습니다.”

한편 이 책의 판매금지 가처분신청에 대한 법원의 판단은 앞으로 2~3주 내로 나올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서울에서 VOA뉴스 김환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