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과 미국 정부, 국제 인권단체들이 발표하는 북한 인권 관련 영문 보고서의 한국어 번역이 최근 몇 년 사이 부쩍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한국인들에게 북한 인권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북한 주민들의 의식을 깨우는 데 기여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김영권 기자가 보도합니다.
유엔이 최근 안토니우 구테흐스 사무총장이 76차 유엔총회에 제출한 북한 인권 보고서의 한국어 번역본을 공개했습니다.
북한의 악화된 인권 상황을 평가하고 북한 정부에 심각한 인권 침해 종식을 촉구하는 구테흐스 총장의 영문 보고서를 16쪽에 걸쳐 그대로 한국어로 옮긴 겁니다.
유엔은 지난해부터 사무총장의 보고서를 한국어로 번역해 발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유엔의 북한 인권 보고서와 관련 자료들이 한국어로 번역되는 사례가 최근 1~2년 사이 크게 늘었습니다.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 홈페이지의 북한 세션을 보면 왼편에 유엔 인권기구가 작성한 여러 북한 인권 관련 보고서의 영문과 한국어 번역본이 나란히 게재돼 있습니다.
특히 서울 유엔인권사무소는 홈페이지 언어를 아예 한국어와 영어로 함께 운용하고 있고, 한국어 페이지에는 유엔 북한인권 조사위원회(COI)의 최종보고서 등 유엔이 발표한 북한 인권 관련 각종 자료의 한국어 번역본이 14편 이상 올려져 있습니다.
여기에는 북한 주민들이 누려야 할 자유권과 노동권 등 기본 권리를 자세히 담은 ‘권리의 대가’ 등 각종 보고서와 유엔 인권기구 관계자들이 국제회의에서 발표한 북한 관련 토론서, 유엔 사무총장과 유엔 인권최고대표, 유엔 북한인권 특별보고관이 유엔 기구들에 제출한 다양한 보고서의 한국어 번역본이 있습니다.
또 이산가족과 납북자, 탈북민 문제를 다룬 다큐영상, 유엔이 개최한 북한 인권 관련 공청회 등 멀티미디어 자료, 법률전문가들의 인권 이해를 돕기 위해 유엔이 작성한 ‘인권편람’ 등도 모두 한국어로 번역돼 있습니다.
유엔에 따르면 이런 한국어 번역 자료들은 대부분 지난 2년 사이 만들어진 것으로, 한국 내 북한 인권단체들이 유엔 인권기구에 강력히 요청해 이뤄진 것으로 알렸습니다.
한국의 인권기록 조사단체인 ‘전환기정의워킹그룹’(TJWG)의 이영환 대표입니다.
[녹취: 이영환 대표] “유엔에서 보고서들이 나오면 신속하게 한국어로 번역해 빨리 배포해야지 그게 알려지고 북한 정권에 보내는 압력의 메시지든지 이런 것이 언론보도를 통해 많이 나와줘야 하기 때문에 계속 요청했습니다. 특히 한국에 유엔 북한인권사무소가 있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한국 정부도 번역하지 않는다! 그럼 누가 할 수 있나? 유엔 문서이니까 서울사무소에서 번역해서 내주는 게 권위나 정확성을 기할 수 있고 언론들이 신뢰하고 보도할 수 있기 때문에 해달라고 했고 들어줘서 너무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 대표는 3~4년 전까지만 해도 시민사회단체들이 유엔의 북한 인권 보고서를 요약 번역해 언론 등에 배포해야 했다며, 이제 그런 수고가 덜어져 다행이라고 말했습니다.
유엔뿐 아니라 민간 보고서와 미국 정부 보고서도 한국어로 번역되는 횟수가 늘고 있습니다.
과거 몇 년 주기로 북한 인권 관련 한국어 번역본을 발표하던 국제 인권단체 휴먼 라이츠 워치는 2018년부터 다수의 보고서나 영상, 짧은 성명을 영어와 한국어로 발표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단체가 별도로 만든 한국어판 북한 세션에는 북한의 성폭력 실상과 북한 구금시설 내 가혹행위를 다룬 보고서, 이 단체의 한국계인 윤리나 아시아 담당 선임연구원이 쓴 식량난, 탈북 난민 강제송환, 북한 청년들의 강제노역 등 한국어로 번역된 글이 지난 6월 이후 3건 게재돼 있습니다.
또 영국의 인권단체 ‘코리아 미래 이니셔티브’도 2017년 설립 이후 북한 종교 탄압 등 보고서와 영상을 영어와 한국어로 함께 발표하고 있습니다.
미국 국무부는 이미 오래 전부터 남북한 인권 상황 보고서, 국제 인민매매 보고서 등 다양한 인권 관련 보고서를 한국어로 번역해 주한 미국대사관 홈페이지에 게재하고 있고, 최근에는 ‘대북 제재 위반 제보’ 사이트에 한국어를 추가했습니다.
북한으로 외부 정보를 보내는 탈북민 등 민간단체들은 이런 움직임을 크게 반기고 있습니다.
북한에서 ‘메모리 막대기’로 불리는 USB에 유엔 북한 인권 보고서 등 다양한 자료와 영상을 담아 북한 주민에게 보내는 활동을 하는 정광일 `노체인' 대표입니다.
[녹취: 정광일 대표] “아주 긍정적으로 생각하죠. 예전 같이 영어로 그냥 나왔으면 번역을 하고 편집하고 어쨌든 많은 시간이 소모됐다면 지금은 소모가 안 되는 거죠. 빨리빨리 (북한에) 전달할 수 있고.”
호주 대법관 출신인 마이클 커비 전 유엔 북한인권 조사위원장은 조사위원회의 최종보고서와 세계인권선언 등의 번역본이 더 많이 북한으로 들어가 주민들이 자신의 권리를 알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커비 전 위원장은 28일 VOA에 보낸 이메일 입장문과 최근 호주에서 개최한 토론회에서 북한 정권의 반인도 범죄 등 인권 실상을 규명한 유엔 조사위원회 보고서를 북한에 계속 보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녹취: 커비 전 위원장] “We must continue bringing the message of the commission of inquiries report to North Korea…the young people of North Korea really want to have news and information about the world they live in. And we must do everything we can to bring that information…It is the duty of the international community.”
커비 전 위원장은 특히 북한의 청년들은 자신이 사는 이 세상의 소식과 정보를 갈구하고 있다며, 그런 정보를 보내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 하며 그것이 바로 국제사회의 의무라고 말했습니다.
이영환 대표는 한글 번역본이 단순한 정보 전달뿐 아니라 인권에 대한 북한 당국의 인식 전환과 남북 협상에도 기여할 수 있다며, 더 많은 번역 작업이 이뤄지길 기대한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이영환 대표] “유엔과 국제단체들이 한국어 번역본을 더 많이 만들어 주고 그게 북한으로 결국 흘러 들어가는 정보이기도 하고, 북한 정권이 외부 소식을 모을 때도 이를 보면서 굉장히 뼈아프게 느끼고 민감도도 높아지게 됩니다. 또 북한과 접촉하는 한국의 관료와 정치인들이 번역본을 통해 북한 인권 문제에 우려하는 유권자들의 요구와
비판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북한과 만나서 얘기할 때 인권 문제를 점점 더 다룰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가게 될 겁니다.”
커비 전 위원장과 이 대표는 자유민주주의 가치와 시장경제, 첨단기술을 보유한 한국 정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며, 정부 차원에서 이런 번역 작업을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VOA 뉴스 김영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