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법원, 재일 북송 피해자 소송 기각…원고 “크게 실망, 항소할 것”

재일 한인 북송 피해자인 가와사키 에이코 씨(가운데)가 지난해 10월 북한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의 첫 재판이 열린 도쿄지방재판소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북한의 ‘지상낙원’ 선전에 속아 북한에 갔다가 일본으로 돌아온 5명이 북한 정부를 상대로 일본 법원에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패소했습니다. 원고인 북송사업 피해자는 VOA에 크게 실망했지만 성과도 있었다며 항소 의지를 밝혔습니다. 김영권 기자가 보도합니다.

일본 도쿄지방재판소는 23일 재일 북송사업 피해자 5명이 북한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5억엔, 미화 90만 달러에 달하는 손해배상 청구소송에 대해 ‘권유행위’와 ‘유치행위’로 나눠 각각 기각하고 각하한다고 판결했습니다.

이날 판결은 북한 정권의 지상낙원 선전에 속아 북한으로 갔다가 탈출해 일본으로 돌아온 재일 한인 피해자와 가족 5명이 지난 2018년 북한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지 4년여 만에 이뤄졌습니다.

재판부는 먼저 판결문에서 북한의 북송 사업과 관련해 “피고(북한 정부)가 조총련(재일조선인총연합회)과 함께 또는 조총련을 통해 북한 상황에 대해 사실과 다른 선전에 의한 권유를 해 원고(북송 피해자들)가 북한 상황에 대해 오판해 북한에 가겠다는 결단을 한 객관적 사실관계가 인정된다”고 밝혔습니다.

이어 이런 권유행위가 일본에서 이뤄졌기 때문에 일본 법원이 관할권을 갖지만 북한의 재일 한인 국내 유치행위에 대해서는 시기와 장소, 형태, 목적을 달리할 수 있어 일련의 모든 행위를 불법행위로 볼 수 없다면서 일본 법원에 관할권이 있다고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이를 각하한다고 판시했습니다.

재일 한인들의 유치행위 장소가 일본이 아닌 북한이며, 이런 행위가 권유행위(북송사업)가 끝난 1984년 뒤에 지속돼 권유행위와 다르며, 북한 정권이 이들의 출국을 전면 금지했다는 원고 측 주장은 북한 정부가 자국민의 일반 출국도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어 다른 성질의 것으로 보기도 힘들다는 논리입니다.

원고인 재일 한인 북송 피해자들은 북송사업에 대한 권유와 유치, 북한에 억류돼 자유롭게 출국할 수 없어 소송을 제기할 수 없는 모든 과정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불법 행위라고 밝혔지만, 법원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둘로 나눠 유치행위는 각하한 것입니다.

아울러 일본법원이 관할권이 있다고 인정한 권유행위에 관해서도 북송피해자들이 일본으로 돌아온 후 생활 기반이 마련된 뒤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할 시간적 여유가 있었음에도 13~17년 동안 이를 제기하지 않았다며, 소송을 방해할 만한 특별한 사정이 있다고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법률상 권리 존속 기간인 20년의 제척기간(시효)이 지났기 때문에 청구권이 소멸됐다고 판시했습니다.

승소를 내심 기대했던 원고 측 북송 피해자들은 큰 실망감을 나타냈습니다.

이 소송을 주도한 재일 한인 가와사키 에이코 씨는 23일 VOA에 “대성통곡하고 싶은 마음”이라고 말했습니다.

[녹취: 가와사키 씨] “정말 대성통곡하고 싶은 마음뿐이고요. 황당했죠, 솔직히 말해서. 나는 정말 이 문제 성사 안 되면 나는 내 자식들과 손자들을 살아서 못 만난단 말이에요.”

17살이었던 1960년에 홀로 북송선에 올라 북한에서 43년을 산 뒤 탈출해 2003년 일본으로 돌아온 가와사키 씨는 변호인단과 피해자들이 앞서 재판부에 북송사업은 모두 하나로 연결된 범죄 행위임을 충분히 설명하고 입증했다며, 이번 판결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가와사키 씨] “조총련이 전개한 북한 ‘지상낙원’설이요. 여러 가지 감언이설을 재일 동포들에게 침투시켜서 재일 동포들이 가지 않을 수밖에 만든 거잖아요. 또 북한에 도착한 날부터 일본에서 간 사람들은 한 발짝도 국외로 내보내지 않는 상태가 오늘까지 지속되잖아요. 이 두 가지 범죄가 한 가지 범죄로 연결된다는 조건에서 이 재판이 성립되는 겁니다. 그렇게 속여서 데리고 갔기 때문에 이 사람들을 내보내지 않는 일이 벌어졌지 이게 따로따로 있는 사건이 아니잖아요.”

하지만 패소에도 불구하고 이번 재판의 의미가 적지 않다는 평가도 나옵니다.

이날 재판을 직접 참관한 일본의 민간단체 노펜스(No Fence)의 송윤복 부대표는 VOA에, 북한 정부를 일본 재판에 회부했다는 사실 자체에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송윤복 부대표] “오늘 판결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은 북한 정부가 일본이란 국가 내에서 저지른 불법 행위에 대해서 북한을 피고인으로 일본 법원에 세워서 재판을 할 수 있다! 먼저 이것을 인정한 겁니다. 이것은 처음입니다.”

재판부가 북한과 조총련의 북송사업을 불법행위로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다른 피해자들이 북한 정권을 상대로 일본에서 소송을 제기할 전례가 만들어졌다”는 겁니다.

1994년 '북조선 귀국자의 생명과 인권을 지키는 모임'을 창립해 북한 인권 개선과 재일 한인 북송 사업 피해자들을 지원하고 있는 오가와 하루히사 도쿄대 명예교수도 23일 VOA에, 북한 정권의 불법 행위와 인권 침해에 대해서 일본 법원이 관여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게 큰 성과라고 말했습니다.

[녹취: 오가와 명예교수] “일본어”

오가와 교수는 또 재판 과정에서 재일 한인과 그들의 일본인 부인들이 북한 정권의 거짓 선전에 속아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는 점도 사실상 인정된 것과 다름없다”며 다만 변호인단은 재판 후 자신에게 “북한 정권에 대해 배상 책임을 부과하지 못한 게 매우 아쉽다”고 토로했다고 전했습니다.

재일 한인 북송사업은 북한과 일본이 체결한 협정에 따라 1959년부터 1984년까지 진행됐습니다.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는 2014년 최종보고서에서 이 북송사업을 납치와 강제실종 범죄로 분류하면서 25년 동안 북한의 지상낙원 선전을 믿고 북한으로 이주한 재일 한인과 가족은 9만 3천 340명으로, 여기에는 1천 831명에 달하는 일본인 아내도 포함돼 있다고 밝혔습니다.

또 일본 적십자사의 지원 속에 이 사업이 이뤄졌으며 피해자들은 북한 정부의 지상낙원이란 선전에 속았다고 지적했습니다.

일본의 민간단체인 ‘북조선 귀국자의 생명과 인권을 지키는 모임’의 사에키 히로아키 대표는 앞서 VOA에, 일본 주류사회에서는 북송 피해자들이 자진해서 북한으로 갔고, 일본 내 친북 단체인 조총련 간부들이 일본 공산당과 연대해 사회주의 혁명 활동을 했다는 이유 등으로 귀국자들에게 동정심이 적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변호인단은 이날 이 사안에 관한 일본 정부의 관심과 해결 의지를 촉구했지만, 주로 일본인 납북자 사안에 전념해온 일본 정부는 아직(23일 자정 현재) 아무런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한편 원고인 북송 피해자들과 변호인단은 이번 판결을 인정할 수 없다며 항소 의지를 밝혔습니다.

원고 측 후쿠다 겐지 변호사는 이날 기자들에게 항소 계획을 밝히며 “재판소가 원고들이 제출한 대부분의 증거를 수용했으면서도 이를 정면으로 다루지 않았다”고 지적했습니다.

가와사키 씨는 북송 피해자들이 모두 고령으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항소 재판이 빠르게 진행됐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가와사키 씨] “모두가 다 고령이고 병이 있는 분들도 계시거든요. 그래서 (재판에) 두 분이 참가 못 했어요. (북한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오늘도 죽어 가고 있어요. 이제는 얼마 살아남지 않았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가 하루빨리 해결돼야만 북송 사업의 부당성이 다 밝혀지고 그 사람들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거기에 내 자식도 손자들도 포함되는 거고요. 그래서 (소송이) 고등법원에 간다면 단시간에 해결이 돼야 합니다. 그래야 목적을 달성할 수 있지요. 우리가 돈이나 보상을 받자고 하는 재판이 아니니까요.”

VOA 뉴스 김영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