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봄 가뭄에 밀·보리 고사 위기...춘궁기 주민 식량난 가중

북한 황해북도 사리원 미곡협동농장 관계자들이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자료사진)

북한의 주요 곡창지대를 중심으로 봄 가뭄이 이어지면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사태의 장기화로 악화된 춘궁기 주민 식량 사정을 더욱 압박하는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특히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지시로 재배 면적이 늘어난 밀과 보리가 고사 위기에 처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서울에서 김환용 기자가 보도합니다.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과 대외 관영 ‘조선중앙통신’ 등 북한 매체들은 지난 4일 “성과 중앙기관 일군들이 가뭄 피해를 막기 위한 사업에 일제히 진입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성과 중앙기관 일군은 내각 성 소속 관료들부터 '노동신문'과 '민주조선,' '조선중앙통신' 등 언론사를 포함한 각 중앙기관의 사무직 종사자들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으로, 사실상 평양 내 ‘화이트칼라’들이 농촌지역에 총동원된 것으로 보입니다.

각종 공장과 기업소, 사업장의 종업원들과 전업주부, 학생들도 농촌지역에 일제히 투입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북한 당국의 이 같은 조치는 북한 전역에서 발생한 심상치 않은 봄 가뭄으로 식량 생산 목표에 경고등이 들어온 데 따라 취해진 겁니다.

탈북민 출신 북한 농업 전문가인 조충희 굿파머스 연구소장은 지난 겨울 50년 내 최악의 겨울 가뭄에 이어 봄 가뭄까지 닥치면서 보통 모내기철이 시작되는 5월 10일께 내려지는 농촌 지원 노력동원이 올해는 일찍 시작됐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조충희 소장] “50년 내 처음 온 겨울 가뭄 그리고 이번 봄 가뭄으로 지금 거의 많은 지역에서 밀 보리가 다 타들어 가고 그래서 정상적인 수확을 기대할 수 없는 그런 상황에 있어 가지고 북한 현지 농촌들에 노동자, 사무원, 학생들이 다 양동이 들고 물주기 나가고 있다고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북한의 기상청인 기상수문국은 지난달 전국 기온이 평년보다 섭씨 2.3도 높았으며 강수량은 평년의 44%에 그쳤다고 보도했습니다.

특히 북한의 대표적인 곡창지대인 황해북도, 황해남도, 함경남도 일부 지역의 강수량이 매우 적었던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한국의 북한농업 전문가인 권태진 GS&J 인스티튜트 북한.동북아연구원장은 주요 곡창지역들의 지난달 강수량이 지난 30년간 같은 기간 평균치의 20~30%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이번 가뭄으로 큰 피해를 입고 있는 작물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해 재배 확대를 지시했던 밀과 보리입니다.

김 위원장은 지난해 9월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농작물 배치를 대담하게 바꿔 벼농사와 밀, 보리 농사에로 방향 전환을 할 데 대한 구상”을 밝힌 바 있습니다.

김 위원장은 “전국적으로 논벼와 밭벼 재배 면적을 늘리며 밀, 보리 파종 면적을 2배 이상으로 보장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조충희 소장은 북한 당국이 옥수수 재배 면적을 줄이고 대신 밀과 보리 파종 면적을 대폭 늘렸다며, 북한 전체 경지 면적의 30%까지 밀과 보리 재배지로 전환하라는 지시가 내려진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조 소장은 북한에서 밀과 보리를 봄과 가을에 파종하는데 가을에 파종할 경우 이듬해 6월에 수확하고 봄에 파종한 것은 같은해 7월에 수확한다며, 지금이 알곡이 여무는, 수확량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시기라고 설명했습니다.

비가 오지 않아 가뭄이 해갈되지 않을 경우 수확량에 큰 타격이 불가피하다는 관측입니다.

봄 가뭄으로 이들 작물의 작황이 나빠질 경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사태 이후 최악의 춘궁기를 보내고 있는 북한 주민들의 시름도 한층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의 북한전문 매체인 ‘데일리NK’에 따르면 북한이 신종 코로나 사태로 국경을 봉쇄한 2020년 1월 이후 3년간 매년 봄철 즉 3월~5월초 북한 식량 가격을 비교한 결과 올해 곡물 가격이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지난 4월 초 북한 시장에서 쌀 가격이 5천원을 넘어선 이후 한 달 동안 5천원대 고공행진이 이어지고 있는데 이는 신종 코로나 사태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라는 겁니다.

옥수수의 경우에도 평양을 기준으로 2020년 봄철 평균 가격이 1kg에 1천413원, 2021년 2천280원이었는데 올해는 2천700원을 넘어섰습니다.

조충희 소장은 신종 코로나 사태로 북-중 무역이 봉쇄되면서 식량과 비료, 농자재 등 수입 차질이 누적돼 나타난 현상이라고 분석하고 봄 가뭄으로 밀과 보리 작황에 문제가 생기게 되면 주민들은 춘궁기가 지나도 막막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녹취: 조충희 소장] “지난해 나온 방침에 의해서 북한 전체 경지 면적의 30%가 밀 보리로 경작하게 돼 있는 상황에서 겨울 가뭄과 봄 가뭄으로 해서 실제 30% 해당하는 면적에서 제대로 된 수확량이 나오지 않으면 6월에 밀 보리 감자 등으로 해서 보릿고개 식량 해결하는데 엄청난 타격으로 다가올 수 있는 거죠.”

전문가들은 북한 당국의 밀과 보리로의 급격한 농업정책 전환에도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권태진 원장은 북한이 옥수수를 대신해 쌀과 함께 밀가루를 주식으로 전환하려는 움직임이 뚜렷하다며 이 같은 추세는 김정은 집권 초반 장마당 활성화 등을 통해 주민 소득이 일시적으로 늘어난 영향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녹취: 권태진 원장] “김정은 시대 첫 5년, 6년 정도는 소득이 좀 더 올라갔고 가공식품을 먹는 수요가 많이 늘었어요. 그리고 유엔 안보리 제재 국면에서도 다른 산업들은 원료가 조달이 안됐지만 식품가공산업은 그런대로 돌아가고 있거든요, 지금도”

한국 정부 산하 국책연구기관인 통일연구원 조한범 박사는 밀과 보리가 옥수수에 비해 재배 과정에서 필요한 비료의 양이나 노동력 면에서 경제적이고 영양 측면에서도 좋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북한 농민들 사이에서 밀과 보리 재배에 필요한 수리시설과 종자 등 인프라 부족에 따른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북한 당국이 정책 전환의 합리적인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의욕이 앞서 너무 서둘렀다는 게 조 박사의 지적입니다.

[녹취: 조한범 박사] “옥수수 재배하던 지역을 그것으로 대체하는 거니까 문제가 있는 거에요. 그러니까 지금은 양이 필요하지 질이 필요한 상황이 아니거든요. 양이 넘쳐나야지 질로 전환이 되는데 양이 부족한 상황에서 질을 먼저 추구하니까, 그랬는데 이제 봄 가뭄이 심해지면서 산출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 됐고요.”

전문가들은 이와 함께 봄 가뭄이 길어질 경우 다음주면 모내기가 시작되는 벼와 이미 지난 3월 말과 4월 초에 직파방식으로 파종을 마친 옥수수의 생육에도 타격을 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서울에서 VOA 뉴스 김환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