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 지원을 거부하겠다던 북한이 인도의 민간단체에 식량 지원을 요청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식량 사정의 심각성이 반영된 행보라는 분석이 나옵니다. 한국 정부는 정치적 상황과 무관하게 인도적 차원에서 북한에 식량을 지원할 의사를 거듭 밝혔습니다. 서울에서 김환용 기자가 보도합니다.
북한이 인도의 민간 경제단체인 국제사업회의소에 식량 지원을 요청한 사실이 공개되면서 한국 내 북한 전문가들 사이에선 북한 내 식량 사정이 상당히 심각한 수준임을 보여주는 현상이라는 분석이 나옵니다.
한국 정부 산하 국책연구기관인 통일연구원 조한범 선임연구위원은 북한 대사관 측에서 홍수 피해를 이유로 해당 단체에 쌀 기부 가능성을 타진한 것으로 미뤄 최근 집중호우로 인한 농작물 피해가 생각보다 큰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같이 보기: 인도 경제단체 '북한 식량지원 요청' 확인..."북한 관리 면담"조 선임연구위원은 북한이 ‘고난의 행군’ 이후 대사관 차원에서 주재국 민간단체에 식량 지원을 요청한 사실이 공개된 건 매우 이례적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녹취: 조한범 선임연구위원] “당국 대 당국도 아니고 그것도 맹방이라고 할 수 있는 중국이나 러시아도 아니고 인도에게 북한 외교관이, 당국자가 민간단체에게 직접 지원을 타진했다는 얘기는 그만큼 북한의 식량난이 긴급하다는 걸 의미하고요.”
이에 앞서 지난 6월엔 캐나다의 대북지원단체 퍼스트 스텝스가 북한이 밀과 콩을 지원할 의사가 있는지 문의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퍼스트 스텝스는 당시 홈페이지를 통해 “북한 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 소식이 전세계에 알려지기 전 북한 협력기관들이 밀과 콩 운송을 고려할 것인지 물었다”고 전했습니다.
북한은 지난 5월 12일 처음으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발생 사실을 인정한 만큼 그 이전에 대화가 이뤄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북한의 이런 행보는 전세계에서 신종 코로나 사태가 발발한 이후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고수했던 ‘외부 지원 수용 거부 방침’과는 사뭇 다른 태도입니다.
김 위원장은 2020년 8월 노동당 정치국 회의에서 수해 복구 방안을 논의하면서 “세계적인 악성 바이러스 전파 상황이 악화하고 있는 현실은 큰물 피해와 관련한 그 어떤 외부적 지원도 허용하지 말며 국경을 더욱 철통같이 닫아 매고 방역사업을 엄격히 진행할 것을 요구한다”고 지시했습니다.
이번 태도 변화는 신종 코로나로 인한 국경 봉쇄와 잇단 자연재해 등으로 식량난이 버티기 어려울 만큼 심각한 수준에 이른 때문이 아니냐는 관측이 나옵니다.
북한은 작황이 좋았던 2019년 이후 3년 연속 최악의 물난리와 가뭄 등 자연재해에 시달렸습니다.
신종 코로나 봉쇄로 곡물 수입이 크게 줄고 장마당 기능이 마비되면서 주민들의 생활고가 ‘고난의 행군’ 수준으로까지 악화됐다는 내부 전언들이 들리기도 했습니다.
탈북민 출신의 조충희 굿파머스 연구소장은 북한에서 춘궁기가 지났는데도 주곡인 쌀과 옥수수의 시장가격이 평년 보다 50% 이상 비싼 고공행진을 지속하고 있다며 굶주리는 북한 주민들의 실태를 전했습니다.
[녹취: 조충희 소장] “현재 지금 어떻게 사냐 이렇게 물어보니까 햇강냉이 나오는 거, 그거 가져다가 죽탕처럼 해서 채소하고 섞어서 죽처럼 하루 한끼, 두끼 먹으면서 사는 집들이 꽤 많다고 이야기 하고 있거든요.”
일본의 북한 전문매체 ‘아시아 프레스’에 따르면 지난 27일 현재 북한 내 쌀의 시장가격은 kg당 6천400원, 옥수수는 3천100원을 기록 중입니다.
예년 같으면 쌀은 4천원선, 옥수수는 2천원을 밑도는 수준이어야 합니다.
북한이 우방이자 최대 교역국인 중국이 올해 혹심한 가뭄으로 농작물 피해가 크게 발생한 때문에 대북 지원 여력이 위축될 것이라는 점을 감안해 관계가 나쁘지 않은 다른 나라들의 민간단체를 상대로 지원 요청에 나선 게 아니냐는 관측도 나옵니다.
반면 북한은 스스로 ‘주적’으로 규정한 한국이나 미국 등 적대관계에 있는 국가에는 손을 내밀지 않고 있습니다.
한국 정부 당국자는 ‘VOA’와의 전화통화에서 북한으로부터 당국 대 당국 차원의 지원 요청은 물론 민간단체 차원에서 대북 지원 승인을 요청 받은 것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 당국자는 북한은 매년 80만t 정도 식량이 모자란 만성적인 식량 부족 상태라며 한국 정부는 인도적 차원에서 정치 군사적 상황과는 무관하게, 최근 윤석열 대통령이 제안한 ‘담대한 구상’과도 상관 없이 북한에 식량을 지원하겠다는 입장이라고 밝혔습니다.
한국 통일부는 최근 편성한 내년도 남북협력기금 예산안에 대북 식량과 비료 지원 등을 위한 예산을 포함시켰습니다.
이 당국자는 “쌀은 10만t, 비료는 14만t 정도를 지원할 수 있는 규모의 예산을 편성했다”고 설명했습니다.
통일연구원 홍민 북한연구실장은 북한이 정세를 주도하면서 핵과 미사일 같은 전략무기 고도화를 완성하겠다는 목표 아래 미국이나 한국으로부터의 지원을 받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녹취: 홍민 실장] “한국에 손을 벌리거나 미국과 협력하는 것 보다는 다른 루트나 다른 방법을 통해서 풍족한 상태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식량 부족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는 일정한 루트를, 다른 쪽을 활용하는 것을 북한이 선호하는 것으로 보여지고요.”
홍실장은 특히 북한이 ‘담대한 구상’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표출한 데서 보듯 남북교류에 대해 분명한 선을 긋고 있는 양상이라고 말했습니다.
서울에서 VOA 뉴스 김환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