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월드컵 TV 중계 미한일 경기 배제…전문가들 “적대관계 의식, 주민 사상통제 차원”

지난 2018년 북한에서 발행된 러시아 월드컵 기념 우표.

북한은 월드컵 축구경기를 TV로 방송하면서 미국과 한국, 일본이 출전한 경기들을 제외하고, 방송 중 노출되는 경기장 내 한국 기업 광고판을 흐릿하게 처리하고 있습니다. 고조된 미한일과의 적대관계를 의식해 사상 단속 차원에서 취한 조치라는 분석입니다. 서울에서 김환용 기자가 보도합니다.

북한 관영 ‘조선중앙TV’는 현재 진행 중인 ‘2022 카타르 월드컵’ 경기를 연일 주민들에게 방송하고 있습니다.

실시간 중계가 아니고 경기가 끝난 뒤 녹화본을 편집해 하루 3경기씩 방영하고 있습니다

개막 이튿날인 22일부터 25일까지 매일 오전 11시경과 오후 4시경, 9시경에 약 1시간 분량으로 편집된 경기를 한 경기씩 내보내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북한 핵 무력 증강과 연이은 미사일 도발로 미국과 한국 일본 등 적대관계가 심화하고 있는 나라들이 출전한 경기들은 방송에서 제외시켰습니다.

일본은 앞서 21일 독일과, 미국은 22일 웨일스와, 그리고 한국은 24일 우루과이와 경기를 가졌습니다.

한국 내 북한 전문가들은 북한 당국의 선전선동 수단인 관영매체들이 이른바 ‘대적원칙’에 입각해 이 같은 조치를 취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사태와 경제난 등 내부적인 요인도 작용하고 있다는 관측입니다.

탈북민 출신의 조충희 굿파머스 연구소장은 미국과 한국, 일본 경기를 방송에서 배제한 것은 나라 안팎의 요인들로 주민들의 사상 결속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북한 최고 지도부의 불안한 속내가 투영된 것으로 설명했습니다.

[녹취: 조충희 소장] “북한 TV나 방송 이런 것들은 다 노동당 선전선동부 관할에 있으니까 최고지도자의 불안한 심리가 선전선동부의 그런 행동으로 반영되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북한은 특히 월드컵 경기 중계방송 중 경기장 광고판에 나타난 ‘현대자동차’의 영문 광고가 화면에 잡힐 때는 이를 흐릿하게 처리해 시청자들이 볼 수 없도록 했습니다.

또 관중석에 걸린 한국 국기 ‘태극기’도 모자이크 처리한 듯 흐리게 가렸습니다.

이와 함께 ‘조선중앙TV’는 월드컵 개막식을 녹화중계하면서 한국의 세계적인 남성 아이돌 그룹인 방탄소년단, BTS 멤버 정국이 개막식 무대에 올라 공연한 장면도 보도하지 않았습니다.

북한은 앞서 잉글랜드 프로축구 프리미어리그(EPL) 축구 경기를 녹화중계 할 때도 손흥민과 같은 한국 선수들의 활약상은 의도적으로 노출하지 않았습니다.

이 같은 조치는 한국 기업, 한국 선수들의 위상이 세계적 수준이라는 사실을 주민들에게 숨기려는 의도라는 분석입니다.

북한은 2020년 12월 반동사상문화 배격법을 만들어 주민들에 대한 사상통제를 강화했습니다.

전영선 건국대 통일인문학연구단 교수는 한 때 여자축구가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면서 북한 내 축구 인기가 절정에 달했다가 지금은 좀 수그러들었지만 북한 주민들 사이에 축구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크다며, 축구 경기 중계에 북한 당국이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배경을 설명했습니다.

[녹취: 전영선 교수] “북한이 아마 7부리그까지 운용을 할 거에요. 그래서 승강제로 운용하고 있고 그 다음에 상금을 운용해서 우승팀에게 상금을 주고 그 상금으로 선수를 스카우트하는 등 세미프로 형태로 운용하고 있기 때문에 지역 말단 단위까지 축구를 강조하고 그러면 전 사회가 참여를 하는 거죠.”

한국 국가정보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 김인태 책임연구위원은 북한 매체들이 한국과 관련한 소식들을 전하는 태도는 남북관계에 따라 다른 양상을 보여왔다고 말했습니다.

김 책임연구위원은 지난 2019년 하노이 미북 정상회담 결렬 이후 북한 매체들이 한국과 관련한 긍정적인 소식들을 일절 다루지 않고 있다며 주민들을 상대로 한 선전선동의 대표적인 수단인 `노동신문'에서 조국통일부를 폐지한 것도 그런 방침의 일환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녹취: 김인태 책임연구위원] “예전에는 노동신문사에 대남 분야를 전문으로 보는 조국통일부라는 부서가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것을 2020년 5월에 다 폐기해버립니다. 그 소린 무슨 소리냐 하면 일체의 남한과 관련된 부분은 모든 언론매체, 선전수단에서 다 제외해 버리게끔 하는 그런 조치와 같거든요.”

실제로 북한은 과거 월드컵 때는 한국이 참가한 경기를 내보냈습니다.

특히 한국이 월드컵 4강 신화를 썼던 ‘2002 한일 월드컵’ 때는 한국팀의 16강전과 준결승전 그리고 3·4위전을 방송에 내보냈습니다.

2006년 6월에도 독일 월드컵의 한국 경기를 녹화중계했습니다.

천안함 폭침 사건 직후에 열린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때도 한국은 물론 미국과 일본 경기를 TV로 중계했습니다.

하지만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집권한 이후인 2014년 브라질 월드컵과 2018년 러시아 월드컵 땐 미한일 세 나라의 경기를 한 번도 중계하지 않았습니다.

한국 정부 산하 국책연구기관인 통일연구원 홍민 북한연구실장은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이후 2007년까지 남북한 사이에 활발한 교류협력이 이뤄진 시기였지만 김정은 시대 들어선 김 위원장 스스로 선대 지도자들의 잘못된 판단으로 남북관계가 이뤄졌다고 할 만큼 한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뿌리깊게 자리잡은 시기였다고 평가했습니다.

[녹취: 홍민 실장] “2018년 잠시 한국을 활용했던 것을 벗어난다면 이후부터는 사실상 대남 전략은 극도의 불신,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교류협력 자체는 필요 없다, 과거 경제적 이익 때문에 했던 그런 것은 잘못된 판단이었다, 이렇게 정리를 한 거거든요.”

한편 북한이 국제축구연맹, 피파(FIFA)의 ‘2022 카타르 월드컵’을 TV로 중계할 수 있는 것은 한국의 도움 덕분입니다.

엄청난 중계권료를 물고 한반도 중계권을 확보한 한국 내 지상파 방송 3사로부터 피파가 중계권을 양도받아 북한에 지원하는 방식으로 이뤄진 겁니다.

서울에서 VOA뉴스 김환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