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한 재일 북송사업 피해자와 지원단체가 이 소송의 재판관할권이 일본에 있다는 도쿄고등재판소의 판결을 “역사적”이라며 크게 반겼습니다. 재판장은 북송된 재일 한인들이 ‘지상 낙원’ 선전에 속아 삶을 강탈당했다며 북한 정부의 불법적인 인권 침해가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김영권 기자가 보도합니다.
북한 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을 주도한 재일 한인 가와사키 에이코 씨는 떨리는 목소리로 감격을 전했습니다.
[녹취: 가와사키 씨] “재판장님이 판결문을 읽으셨을 때 나도 그렇지만 우리 후쿠다 변호사도 깜짝 놀랐거든요. 재판이 끝난 다음에 막 끌어안고 엉엉 울었어요. 이 무슨 기적이 일어났는가 하고요.”
17살이던 1960년 홀로 북송선에 올라 북한에서 43년을 산 뒤 탈출해 2003년 일본으로 돌아온 가와사키 씨는 31일 VOA에 “그동안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보상받은 느낌”이라며 “기대를 못했기 때문에 여전히 실감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가와사키 씨] “고저 우리가 제출한 재판 서류가 100% 인정된 거예요. 북송 사업이란 게 거짓 선전에 의해서 이뤄졌고 또 그렇게 해서 북한에 데려간 다음에 오늘 현재까지 나오지 못하게 하고 있다. 그것을 전면 인정한 거예요.”
앞서 일본 도쿄고등재판소(고등법원)는 10월 30일 에이코 씨 등 북송 사업 피해자 4명이 북한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4억엔 규모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 항소심에서 원심판결을 깨고 “북한의 불법 행위로 발생한 침해 전체의 관할권은 일본에 있다”고 판결했습니다.
북한 정부가 북한을 지상낙원이라고 선전해 재일 한인들에게 북송을 권유한 행위와 이들이 북한을 떠나지 못하도록 막은 것은 별개가 아닌 연장선상의 인권 침해로 전체 관할권이 일본 재판소에 있다고 판시한 것입니다.
하급 법원인 도쿄 지방재판소는 앞서 권유 행위는 일본에 관할권이 있지만 20년의 제척기간, 즉 공소시효가 지나 청구권이 소멸됐고 북한 정권이 이들의 출국을 전면 금지한 것은 일본에 관할권이 없다고 판결했었습니다.
하지만 다니구치 소노에 도쿄고등재판소 재판장은 이날 판결문에서 북한 정부가 선전과 달리 귀국자들에게 비참하고 가혹한 조건에서 살도록 강요해 거주지 선택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했다며 원고들은 사실상 “삶을 강탈당한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이날 재판을 직접 참관한 일본의 민간단체 노펜스(No Fence)의 송윤복 부대표는 VOA에 다니구치 재판장이 일본 법조계에서 정의구현에 관심이 많은 존경받는 여성 판사로 알려져 “실낱같은 희망을 걸었었다”며, “북한에서 오래전 숨진 친척들에게 늦게나마 큰 위로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녹취: 송윤복 부대표] “재판장도 그 요지(판결문)를 읽는 동안 좀 가슴이 벅 차는 듯이 잠시 말을 더듬고 그렇게 했어요. 그래서 제 느낌이 아, 도저히 같은 인간으로서 (울먹이며) 이 사람들이 겪었던 고통을 그냥…넘길 순 없다고 그렇게 마음먹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앞서 재일 한인 북송 피해자와 가족(일본인 부인) 5명은 지난 2018년 첫 소송을 제기했지만 고정미 씨가 올해 지병으로 숨지면서 4명이 항소했었고 이날 재판에는 원고 3명이 참석했습니다.
소송을 처음부터 적극 지원한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RW)의 도이 카나에 일본 지국장은 31일 VOA에 “(북송 사업) 피해자들에게 역사적인 판결”이라고 말했습니다.
[도이 지국장] “It is a historic ruling for the victims. The case now returns to the Tokyo district court, where it will primarily review the extent of damages the North Korean government must pay to the plaintiffs.
도이 지국장은 “이제 이 사건은 도쿄 지방재판소로 돌려보내져 북한 정부가 원고들에게 배상해야 할 손해배상 범위를 주로 검토할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그러면서 “도쿄 지방재판소가 원고들에게 손해배상을 지급하라고 판결하면 일본 사회에서 이 문제가 더욱 관심을 받을 것”이라며 일본 정부가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도이 지국장] “Japan’s Prime Minister Fumio Kishida, should demand that Kim Jong Un allow those remaining in North Korea to return to Japan. Hundreds of thousands of victims of the program and their family members languishing in North Korea await that opportunity. The international community, including Japan, should step up its efforts to hold North Korean leaders accountable for the crimes against humanity they committed in North Korea.”
도이 지국장은 특히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김정은에게 북한에 남아있는 북송자들의 일본 귀환을 허용하라고 요구해야 한다”며 “북한에 남아 있는 수십만 명의 북송사업 피해자와 가족들이 고통 속에 그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어 “일본을 포함한 국제사회는 북한 지도자들이 북한에서 저지른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한 노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북한 정권이 지난 1959년에서 1984년까지 벌인 재일 한인 북송사업은 유엔 북한인권 조사위원회(COI)가 2014년 최종보고서에서 납치와 강제실종 등 반인도적 범죄로 분류한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입니다.
COI는 보고서에서 25년 동안 북한의 지상낙원 선전에 속아 북한으로 이주한 재일 한인과 가족은 9만 3천 340명에 달하며 여기에는 1천831명의 일본인 아내도 포함돼 있다고 밝혔습니다.
서울 유엔인권사무소도 지난 3월 발표한 북한 정권에 의한 강제실종과 납치 범죄를 다룬 새 보고서 ‘아물지 않은 상처(These wounds do not heal)’를 발표하면서 재일 북송사업 문제가 강제실종 범죄의 일환이란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 유엔 인권기구가 보고서 발표와 함께 공개한 동영상에 출연한 이태경 북송재일교포협회 회장입니다.
[이태경 회장] “자유 민주주의 일본에서 살아봤기 때문에 북한이라는 독재국을 뚜렷이 볼 수 있었습니다. 희망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북한의 노예 같은 생활, 갈수록 심해지는 탄압과 숙청, 암흑과 같은 미래…북송 문제의 결론은 북한과 조총련은 공동 사기꾼, 북한은 북송 재일교포들을 속여서 받은 것, 일본은 이에 동조해 보낸 것, 한국은 그냥 바라본 것, 적십자 역시 동조한 것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북한 당국은 그러나 모든 혐의를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일본 정부나 적십자사는 한인들이 자진해서 북한으로 갔기 때문에 일본인 납북자와는 사안이 다르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송윤복 부대표는 일본 조총련계 가정 중 일부는 역설적으로 이번 판결을 반길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송윤복 부대표] “지금 일본에도 적지 않게 북한에 실질적인 인질로 자기 가족이나 친척이 잡혀 있으니까 숨을 죽이고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죠. 그래서 본의 아니게 북한이나 조총련이 시키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 사람들에게도 (이번 판결이) 한 가지 희망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한편 소송을 제기한 원고들과 변호인단은 향후 도쿄 지방재판소에서 최종 손해배상 승소 판결이 나오면 상징적 차원에서 일본 정부가 압류한 북한 자산을 회수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VOA 뉴스 김영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