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엘리트 외교관 잇단 망명…전문가 “장기간 해외 체류 속 북한 현실 자각·체제 염증 때문”

16일 한국 서울역에서 시민들이 지난해 11월 한국에 망명한 것으로 확인된 리일규 쿠바 주재 북한 대사관 정치담당 참사 관련 보도를 시청하고 있다.

북한의 엘리트 계층인 외교관들의 한국 망명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장기간 외국생활 속에서 북한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알게 되면서 생긴 체제 염증과 미래에 대한 불안이 탈북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서울에서 김환용 기자가 보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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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엘리트 외교관 잇단 망명…전문가 “장기간 해외 체류 속 북한 현실 자각·체제 염증 때문”

쿠바 주재 북한대사관에서 근무하던 리일규 정무참사가 작년 11월 아내와 자녀를 데리고 한국으로 들어온 사실이 뒤늦게 공개됐습니다.

리 참사의 탈북은 지난 2016년 태영호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 2019년 조성길 이탈리아 주재 대사대리, 류현우 쿠웨이트 주재 대사대리 등에 이어 김정은 국무위원장 집권 이후 공식 확인된 4번째 탈북 외교관 사례입니다.

리 참사 망명 시점과 같은 시기인 작년 11월 프랑스 주재 북한 외교관 일가족도 한국공관에 망명 의사를 밝혔으나 현재 미국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공개되지 않은 탈북 사례까지 포함하면 북한 고위급 인사와 엘리트층 탈북이 최근 늘어나는 추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한국 통일부에 따르면 지난해 입국한 엘리트 탈북민의 수는 2017년 이후 가장 많은 10명 안팎으로 알려졌습니다.

또 올해는 이미 10명 안팎의 엘리트들이 한국에 입국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지난해 전체 탈북민 수는 2017년의 6분의 1 수준인 196명으로 줄었지만 엘리트층 이탈은 오히려 많아지고 있는 겁니다.

전문가들은 외교관들의 탈북이 이어지는 요인으로 장기간 외국생활을 하면서 인터넷 등을 통해 얻은 각종 정보로 생긴 북한 현실에 대한 자각을 꼽고 있습니다.

특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사태에 따른 국경 봉쇄가 풀리고 본국 소환이 재개되면서 이들의 동요가 커지고 있다는 관측입니다.

중국 단동에서 압록강 너머로 바라본 북한 신의주. (자료사진)

한국 정부 산하 국책연구기관인 통일연구원 조한범 박사는 신종 코로나 사태로 북한은 3년 반 동안 국경을 봉쇄했고 이후 지금까지 1년 간 해외 체류 자국 국민들에 대해 선별적으로 귀국을 허용하고 있다며, 장기간 외국생활을 통한 사상적 이완은 불가피한 현상이라고 말했습니다.

[녹취: 조한범 박사] “해외에 나와 있는 북한 국민들은 거의 5년 가까운 기간을 북한 당국의 직접적 통제를 받지 않은 상황이고 또 문제는 통제는 물론 지원도 못 받았거든요. 그러니까 생계형 활동으로 인해서 북한 당국이 정한 가이드라인을 넘는 경우가 많고요. 그리고 자녀들은 북한 당국의 사상통제로부터 장기간 괴리가 된 상황이거든요. 그러니까 탈북 요소가 많아졌죠.”

북한 외교관들은 또 국제사회 대북 제재와 신종 코로나에 따른 국경봉쇄로 수입이 크게 줄어든 북한 당국으로부터 더 많은 이익을 창출하라고 고강도 압박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탈리아 주재 북한 대사관 건물에 인공기가 걸려있다.

대북 제재 압박의 수위가 높아지면서 돈벌이 수단을 찾는데 어려움이 커진 게 외교관들의 탈북 동기로 작용하고 있다는 겁니다.

리일규 참사는 한국의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외교관 수입이 낮아 불법 장사가 불가피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북한 내 일부에서는 외무성 사람들을 ‘넥타이를 맨 꽃제비’라고 부른다”며 “무역일꾼이나 특수기관 일꾼들에 비해 주머니에 돈은 없는데 대외활동을 하려면 고급 옷에 넥타이는 필수로 챙겨야 하니 그런 말이 돈다”고 밝혔습니다.

고유환 동국대 명예교수는 외교관들이 탈북을 결심하는 데는 이런 북한 실상에 대한 자각과 함께 자녀의 미래가 큰 이유로 작용하고 있다고 진단했습니다.

[녹취: 고유환 명예교수] “외교관은 기본적으로 국제정세를 다루는 전문인력들이니까 북한 내부 실정과 국제사회 사이의 여러 모순적 현상들을 체험했던 사람들이니까 특히 자기는 그렇다고 해도 자식들까지 그런 걸 이어지게 할 순 없다, 대부분 그런 동기를 갖고 있어요.”

태영호 전 공사와 함께 자녀들을 데리고 한국에 망명한 부인 오혜선 씨는 자서전에서 “탈북 1년 전인 2015년 외교관의 대학생 자녀를 평양으로 들여보내라는 지시가 내려왔다”며 “영국에서 9년 가까이 생활해 온 아이들이 북한에서 정상적으로 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고 밝혔습니다.

탈북 고위 외교관 출신 국민의힘 태영호 전 의원의 아내 오혜선 씨가 자서전인 '런던에서 온 평양 여자'를 들고 있다.

고위층 탈북민 출신인 한국 국가안보전략연구원 김인태 박사는 북한 당국이 이런 고위층 탈북 소식을 주민들이 알지 못하도록 하는 데 주력하겠지만 휴대폰이 보급되고 중국 러시아 등 외국과의 인적 교류를 포기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정보 차단은 한계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김인태 한국 국가안보전략연구원 박사. (사진출처: 출처: 한국 통일연구원)

[녹취: 김인태 박사] “정책 일선에 있던 외교관을 포함해서 여기서 이탈이 지금 증가하는 것은 김정은에게 상당히 부담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외무성이나 노동당은 이런 부분을 북한 내부 권력층이나 주민들에게 알리지 않는 방편이 자구책이 될 텐데 이게 과거에 비해서 지금은 불가능하다는 거죠.”

조한범 박사는 북한 당국의 국경 단속 강화로 북한 주민들의 중국으로의 탈북은 어려운 상황이지만 해외 체류 중인 이들의 탈북은 이어질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서울에서 VOA 뉴스 김환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