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부가 집중호우로 심각한 피해를 입은 북한에 인도적 지원을 전격 제안했습니다. 북한이 한국을 교전 중인 적대국으로 규정하는 등 남북관계가 최악인 가운데 한국 측 제안을 받아들일지 주목됩니다. 서울의 김환용 기자와 자세한 내용을 알아보겠습니다.
진행자) 한국 정부가 북한의 수해 상황이 심각하다고 보고 구호물자 지원을 전격적으로 제안했군요.
기자) 네 그렇습니다. 박종술 대한적십자사 사무총장은 어제(1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언론브리핑에서 폭우로 큰 피해를 본 북한 주민들에게 깊은 위로를 전하면서 한적의 대북 수해 지원 입장을 발표했습니다.
[녹취: 박종술 사무총장] “우리 측은 북한 주민들이 처한 인도적 어려움에 대해 인도주의와 동포애의 견지에서 북한의 이재민들에게 긴급히 필요한 물자들을 신속히 지원할 용의가 있음을 밝힙니다.”
박 사무총장은 이어 “지원 품목과 규모, 지원 방식 등에 대해서 북한 적십자회 중앙위원회와 협의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습니다.
남북관계에서 한적과 북한 적십자회는 남북 간 긴급 수해 지원이나 이산가족 상봉 등 인도주의 교류협력 교섭창구 역할을 하는 기관입니다.
북한이 작년 4월 7일부터 남북 연락채널을 일방적으로 차단한 때문에 한국 정부는 한적의 언론브리핑 방식으로 지원 의사를 공개했습니다.
한국이 북한에 인도주의 지원을 제의한 것은 윤석열 정부 들어선 지난 2022년 5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방역 협력과 관련한 실무접촉을 제의한 이후 처음입니다.
진행자) 한국 정부가 북한에 지원 제의를 한 배경은 무엇인가요?
기자) 네, 한국 정부는1일 오전까지만해도 대북 인도 지원 여부와 관련해 “피해 상황을 주시하고 있으며 현재로선 드릴 말씀이 없다”는 입장이었습니다.그런데 오후에 이처럼 전격적으로 지원 제안을 한 것은 북한의 수해가 심각하다고 판단한 때문으로 보입니다.
윤석열 정부는 북한의 핵 무력 고도화와 불법 도발 행위에 대해선 단호하게 대응하면서도 인도적 위기 상황에 대해선 언제든 지원에 열려 있다는 의사를 표명해 왔습니다.김형석 전 한국 통일부 차관입니다.
[녹취: 김형석 전 차관] “윤석열 정부가 했던 기조가 인도적인 것은 하겠다는 거니까 이번에 북한에서 사진 같은 것 보면 엄청난 피해가 있잖아요. 그리고 국제기구 지원 움직임도 있는 것이고 그래서 기본적으로 군사안보적인 문제는 그거고, 이번에 피해를 입은 동포들에 대한 지원 그것은 아무 조건 없이 하겠다는 거였으니까 그 입장에서 한 게 아닌가 싶은데요.”
북한 수해는 지난달 말 평안북도 신의주와 의주 등에서 집중호우로 발생했습니다.
북한 관영매체들은 신의주와 의주에서 주택 4천100여세대, 농경지 3천 정보를 비롯해 수많은 공공건물과 시설물, 도로, 철길이 침수됐다고 보도했습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지난달 29일 소집한 정치국 비상확대회의에서 “용납할 수 없는 인명 피해까지 발생”했다고 언급했으나, 구체적인 피해 규모는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북한은 평안북도, 자강도, 양강도 압록강 인근 지역을 ‘특급재해비상지역’으로 선포했습니다.
진행자) 한국 측 제의에 북한은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나요?
기자) 한국 정부는 북한에 수해 구호물자 지원을 제의한 이후 남북 연락채널 통화를 시도하고 있지만 북한은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김인애 통일부 부대변인은 2일 정례브리핑에서 “상황을 예단하지 않겠으며 우리 측의 제의에 조속히 호응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습니다.
진행자) 현재 남북한 관계가 상당히 좋지 않은 상황인데요, 북한이 한국 정부 제의를 받아들일까요?
기자) 한국 측의 대북 수해 지원은 지난 1995년을 시작으로 그리고 2010년을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모두 5차례 이뤄졌습니다.
북한이 이번에 지원 제의를 수락하면 한국 정부는 북한 측과 협의를 거쳐 식량과 의약품 등을 남북협력기금을 활용해 지원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통일부는 북한과 협의 방식에 대해 “대면 협의, 서면 협의, 제3국 협의 등 모든 방식에 열려 있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김정은 위원장이 올 초 한국을 교전 중인 적대국으로 규정하며 대남 적대 노선을 분명히 한 만큼 북한이 한국 측 제의에 호응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관측이 많습니다.
북한이 한국의 이번 제안을 수용할 경우 최고지도자의 대남정책 전환을 스스로 부인하는 꼴이 되고 그렇게 되면 김 위원장 위상에 적지 않은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고 있을 거라는 겁니다.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임을출 교수는 북한이 대북 제재와 압박을 강화하고 있는 윤석열 정부의 인도적 지원 제의를 정권과 주민 사이를 이간시키려는 불순한 의도가 깔린 행동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임을출 교수] “북한 정권에 대해선 기존의 제재 압박 기조를 이어가면서도 지금 홍수 피해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북한 주민들에겐 별개로 인도적 지원을 하겠다 이런 메시지로 해석하면서 오히려 더 윤석열 정부에 대한 적대감을 가질 수도 있겠다 이런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타이밍 또한 매우 좋지 않습니다.
한국 내 탈북민 단체의 대북 전단지 살포와 북한의 대남 오물 풍선 살포가 이어지고 있고, 9·19 군사합의의 사실상 파기 이후 비무장지대의 긴장감도 높아진 상태입니다.
또 오는 19일부터는 북한이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하는 미한 연합군사훈련 ‘을지 프리덤실드’(UFS)가 실시됩니다.
진행자) 한국 내 일각에선 국제기구를 통한 우회 지원 방안도 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다고요?
기자) 네 그렇습니다. 이 같은 제안은 한국 정부의 구호물자 지원 제의를 수용 또는 거부하는 주체는 결국 북한 당국인데 북한 당국이 이미 적대국으로 선을 그은 한국 정부 제의를 받아들이겠느냐는 문제 의식에서 나오는 얘깁니다.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장용석 박사는 북한 주민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게 지원 성사 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정부의 직접 지원 대신 국제기구를 통한 우회 지원을 검토할 필요성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장용석 박사] “수해 피해가 굉장히 크긴 큰 것 같은데 실질적인 지원 효과를 좀 더 주목한다면 국제기구를 통한 방식으로라도, 차선책으로라도 지원하는 방안도 배제하지 말고 검토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진행자) 한편 북한 매체들은 김정은 위원장이 연일 수해 현장을 직접 진두지휘하는 모습을 보도했는데요, 이에 대해 한국에선 어떤 평가가 나오나요?
기자) 네, 북한 매체들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지난달 28일 압록강이 범람한 신의주시와 의주군을 돌아봤습니다. 이어 29일부터 이틀간 신의주시에서 진행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8기 제22차 정치국 비상확대회의에서 이번 홍수에 대비하지 못해 큰 피해가 발생한 책임을 물어 리태섭 사회안전상과 자강도당위원회 책임비서 등을 전격 교체했습니다.
북한 매체들은 김 위원장이 구명보트를 타고 신의주 침수 피해 현장을 살펴보는 모습과, 김 위원장이 이재민 구출에 나선 헬기를 배경으로 지휘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 등을 보도했습니다.
한국 정부 산하 국책연구기관인 통일연구원 조한범 박사는 김 위원장이 자연재해를 자신의 애민지도자상을 부각시키는 계기로 활용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조한범 박사] “소위 재난 리더십, 애민을 보여주고 천재인데 인재로 몰아서 사회안전상을 해임하고 그러니까 책임을 전가하고 본인이 진두지휘하는, 아니 최고지도자가 헬기장에서 비를 왜 맞습니까. 그건 보여주는 거죠, 왜냐 그 정도로 지금 민심이 사납다고 그래요 내부에서.”
조 박사는 김 위원장이 공연 관람 등 이른바 ‘전승절’ 기념 행사들을 즐기던 지난달 27일에 신의주와 의주에선 이미 침수 피해가 발생하고 있었다며, 이 때문에 민심이 나빠진 점을 의식해 김 위원장의 행보를 돋보이게 하려는 이미지 정치가 한층 강화하고 있다고 진단했습니다.
서울에서 VOA 뉴스 김환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