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가상화폐 세탁에 악용된 소프트웨어에 대한 제재가 부당하다는 미국 연방 항소법원의 판결이 나왔습니다. 향후 북한 해커들이 이 소프트웨어를 다시 악용할 가능성이 있어 논란이 예상됩니다. 김영교 기자가 보도합니다.
미국 제5 연방 항소법원은 지난 26일, 미국 재무부가 가상화폐 믹서 소프트웨어 ‘토네이도 캐시’를 제재한 조치에 대해 권한 남용이라고 판단하고 제재 철회를 명령했습니다.
‘믹서’는 사용자가 보유한 암호화폐를 여러 사용자들의 암호화폐와 섞어 거래 경로를 복잡하게 만듦으로써 특정 암호화폐의 출처를 추적하기 어렵게 하는 기술입니다. 이는 거래의 익명성을 강화하기 위해 설계된 도구로, 합법적인 개인정보 보호 용도뿐 아니라 불법 자금 세탁에도 악용될 수 있습니다.
제5 연방 항소법원이 공개한 판결문에 따르면, ‘토네이도 캐시’ 소프트웨어는 탈중앙화된 방식으로 운영돼 특정 주체가 이를 소유하거나 통제할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법원은 이러한 특성이 기존 법률이 정의하는 ‘재산(property)’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판단했습니다.
법원은 또한, 미국 재무부가 특정 국가나 단체의 자산을 압류하거나 금융거래를 차단하는 등 상업 활동을 규제할 권한을 부여한 ‘국제긴급경제권한법(IEEPA)’의 적용 범위를 넘어서, 권한을 남용했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에 따라, 재무부가 ‘토네이도 캐시’를 제재 대상으로 지정한 것은 법적 근거가 부족하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미국 재무부 해외자산통제실(OFAC)은 2022년, 북한 정찰총국 산하 해킹 조직인 라자루스 그룹이 약 4억 5,500만 달러 상당의 가상화폐를 세탁하는 데 ‘토네이도 캐시’를 이용했다고 판단하며 이를 제재 대상에 추가했습니다.
이어 미국 법무부는 지난해 8월, 토네이도 캐시의 공동 창업자인 로만 스톰과 기타 개발자들을 자금세탁과 제재 위반 공모 혐의로 기소하며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토네이도 캐시는 2019년 설립 이후, 북한의 해킹 조직 라자루스 그룹이 탈취한 수억 달러 규모의 가상화폐를 세탁하는 데 활용된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미국 재무부는 토네이도 캐시가 북한 정권의 가상화폐 세탁 행위에 대한 명백한 증거를 무시하거나 적절히 대처하지 않았으며, 이후에도 해당 소프트웨어가 다른 악의적 행위자들에 의해 악용되는 위험을 방지하거나 완화하기 위한 실질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번 소송은 지난해 8월 텍사스 연방법원이 토네이도 캐시에 대한 제재가 정당하다는 판결을 내린 데 반발해, 토네이도 캐시 이용자 6명이 항소하면서 진행됐습니다.
토네이도 캐시의 공동 창업자인 로만 스톰 등은 소송 과정에서 자신들이 북한을 겨냥해 소프트웨어를 개발한 것이 아니며, 단지 북한이 토네이도 캐시를 악용했을 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들은 북한과의 범죄 공모 혐의를 강력히 부인하며, 자신들의 기술이 특정 사용자에 의해 부정적으로 사용된 것에 대한 책임은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번 판결과는 별도로 토네이도 캐시의 공동 창업자들과 개발 업체를 상대로 한 법적 소송은 계속 진행될 예정입니다.
이번 항소를 지원한 미국 최대 가상화폐 거래소 코인베이스의 최고법률책임자인 폴 그로왈은 사회연결망 서비스 X를 통해 이번 판결을 환영하며 “개인정보 보호의 승리”라고 평가했습니다.
또한 “아무도 범죄자들이 가상화폐 프로토콜을 악용하는 것을 원하지 않지만, 소수의 사용자가 악의적인 행위자라는 이유로 오픈 소스 기술 전체를 차단하는 것은 미국 의회가 의도한 바가 아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한편, 가상화폐 분석 기업인 ‘글로벌레저’는 보고서를 통해 이번 판결이 암호화폐 업계에서 금융 범죄를 방지하려는 국제적 노력에 심각한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위험한 선례”를 남길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글로벌레저는 이번 결정이 악의적인 행위자들에게 더 많은 암호화폐를 세탁할 기회를 제공할 가능성이 있다며, 암호화폐 생태계의 안전성과 투명성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VOA 뉴스 김영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