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보도] 탈북 고아들을 위한 전쟁 고아 한상만의 기적 이야기 (2)

한상만 씨의 어릴적(왼쪽)과 아버지 슈나이더 박사(오른쪽)

인생을 살다 보면 매우 중요한 만남들이 찾아오곤 하죠. 어떤 만남은 특히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기적을 낳기도 하는데요. 6.25 전쟁 고아 출신으로 골수암과 투병하면서도 탈북 고아들을 돕기 위해 마지막 생을 불태우고 있는 미국의 한인 한상만 씨는 12살 때 그런 만남을 체험했습니다. 그 만남을 통해 새로운 가정이 생겼고 꿈에 그리던 공부를 할 수 있었을 뿐아니라 미국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할 수 있었는데요. ‘미국의 소리’ 방송이 보내드리고 있는 한상만 한 슈나이더 국제어린이 재단 대표의 기적과 감동의 이야기. 오늘은 그 두 번째 순서로 ‘슈나이더 박사와의 운명적인 만남’ 편을 보내드립니다. 김영권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발 마사지를 받고 있는 한상만 씨. 골수암 환자들은 하체가 매우 약하기 때문에 항암 치료에 병행해 운동과 마사지도 꾸준히 해야 합니다.

“통증 보다도 사이드 어펙트(부작용)에요. 그러니까 발하고 발가락이 많이 마비 상태에요. 신경이 다 마비가 된 거죠. 그리고 굉장히 피곤하고. 하체 쪽이 굉장히 약해질 거라고 원래 그랬어요. 그래서 하체운동을 일주일에 적어도 세 번씩 하고 그래요.”

이런 꾸준한 노력 때문인지 한상만 씨를 처음 보는 사람들은 그가 9년째 골수암을 앓는 환자란 사실을 잘 알지 못합니다. 말끔한 옷차림에 신사모를 즐겨 쓰는 한상만 씨. 대화할 때 늘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상냥한 말씨를 쓰기 때문에 며칠 간 함께 동행한 기자 조차 그가 말기 암환자란 사실을 깜빡 잊곤 했습니다.

“사람들이 보면 내가 암환자 같지 않다고 하는데 사실 인터널리 굉장히 피곤하고 온 몸이 다 헐었어요. 엉덩이 쪽에 곰팡이가 나가지고 꽤 불편하죠.”

하지만 한 씨는 그런 아픔을 잘 드러내지 않은 채 만나는 사람마다 밝게 인사를 합니다.

집 청소를 하는 라티노 청소부의 가족들 안부를 챙기는가 하면 따뜻한 위로의 말도 늘 잊지 않습니다. 한 씨는 그런 배려의 마음과 습관이 모두 아버지 아더 슈나이더 박사에게서 왔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벽에 걸려있는 슈나이더 박사의 사진을 가리킵니다.

“그 분은요. 사람이라고 볼 수 없어요. (울먹이며) 리빙 세인트다 이거에요. 항상 상대방 위주에요. 자기 생각하는 게 아니라.”

아버지 얘기를 하자 갑자기 울먹거리는 한상만 씨. 슈나이더 박사를 빼면 그의 인생을 결코 얘기할 수 없다는 데. 아무런 인연이 없었던 이 두 사람의 인연은 1956년 기적처럼 이뤄졌습니다.

부모를 찾고 공부를 해 의사가 되고 싶었던 12살 소년 한상만. 그래서 6년 간 살던 충청도 소작농 집을 떠나 서울로 갔지만 앞 길은 망막했습니다.

“야 내가 어떻게 해야겠냐. 그래서 딱 생각했지요. 의사가 되려면 병원에 찾아 가야겠다. 병원에 가서 일도 하고 돈도 벌고 야간학교도 다니고. 의사가 되려면 거기 가면 알 거 아니냐.”

무작정 장안에서 제일 크다는 서울대학 의대 병원을 찾아간 고아 소년. 하지만 누구도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낙심이 되던지. 나는 거기 가기 전만해도 자신이 생겼는데, 병원 가면 꼭 될 거라고 믿고 왔거든요. 근데 정반대가 되니까 I became hopeless. so desperate. 정말 실망했어요.”

12살 고아에게 세상은 너무도 차가웠습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의 시민들은 모두 생존을 위해 몸부림쳤고, 이런 고아에게 온정은커녕 관심조차 가져줄 여유가 없었습니다. 희망을 잃은 소년 한상만은 자포자기 상태로 병원 창 밖을 하염없이 바라봤습니다.

바로 그 때, 몇 분 전부터 한 소년이 병원 측에 뭔가 간절히 호소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미국인 미첼 박사가 다가와 손을 건넸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상관이자 당시 서울대학교의 재건 지원 담당자로 와 있던 아더 슈나이더 미네소타대학 교수를 소개했습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고아 소년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슈나이더 박사는 몇 분 간의 침묵 후 소년의 모든 것을 도와주겠다고 제의합니다.

“5-6분 정도 생각하시고 나서 그럼 네가 정말 학교에 가길 원하면 내가 널 학교에 보내주고 너에 대한 재정 지원과 보호를 다 하겠다. 그러니까 전 믿어지지 않더라구요. 그래서 전 이 분이 지금 날 갖고 노시나. 그래서 통역하는 분에게 되물었어요. 얼마나 감격스럽던지요.”

전쟁 고아 소년에게 다시 기적이 찾아 왔습니다. 슈나이더 박사는 고아 소년이 의외로 예의를 갖추고 공부에 열정을 보이는 모습, 그리고 단정한 옷차림에 마음이 끌렸었다고 후에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그 닥터 미첼이 그 순간에 지나가지 않았으면 내가 어떻게 슈나이더 박사를 만나고 그 분이 제 아버지가 됐겠어요. 그러니까 그 타이밍 그 순간 그게 기적이죠. 어떻게 그 순간에 우리 아버님을 만났겠어요.”

제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로 매우 강직한 이미지의 56살 독신남이었던 슈나이더 박사. 서울대 행정대학원 설립에 중추적 역할을 했고 많은 한국의 인재들이 미국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돕던 슈나이더 박사는 절망에 빠져있던 이 12살 전쟁 고아에게 희망의 날개를 달아줬습니다. 그리고 아예 소년의 꿈을 실현시켜 주기 위해 입양을 결심합니다.

1961년 슈나이더 박사는 형의 대학 동기동창이자 미네소타 주 출신 연방상원 의원인 휴버트 험프리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한상만 씨를 입양해 미국으로 데려오는 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입양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미국 이민법은 독신자에게 외국인 입양을 허가하지 않았고, 한상만 씨 부모의 사망증명서 또는 입양에 동의한다는 부모의 합의서가 필요했습니다.

훗날 린든 존슨 행정부에서 부통령까지 지낸 험프리 의원은 한상만 씨 한 명의 입양을 위해 단독 특별법안 S. 1100을 의회에 제출하고 의원들을 설득한 끝에 1961년 8월 30일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한상만 씨는 마치 50년 전으로 되돌아간 듯 매우 흥분된 목소리로 당시 상황을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기적이 아니면 어떻게… 미국의 상원의원이 한 둘이에요. 100명인데. 야~ 아버지의 계약을 이를 위해 1년 연장시키고 정말 서로 필요할 때…저는요. 제 평생에 Full of miracles and series of miracles.. 그래서 제가 연설할 때 제 인생은 기적의 연속입니다.라고 얘기합니다.”

슈나이더 박사는 당시 백방으로 한상만 씨 부모의 행방을 수소문한 끝에 아버지가 숨지고 어머지는 재혼했다는 소식을 확인한 뒤 모자 간의 상봉을 주선했습니다. 또 아들을 6년 간이나 돌봐 준 소작농을 찾아가 토지를 사주는 등 감사를 표한 뒤 1961년 16살 아들 한상만을 데리고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한상만 씨는 중도에 의사의 꿈을 포기했지만 경영대학원을 졸업하고 세계적인 화학회사인 듀퐁 사에서 일하다 무역회사를 차려 사업가로 성공했습니다.

한국 여성과 결혼해 1남 2녀를 낳고 수 백만 달러의 자산가로 남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던 한상만 씨. 하지만 2002년 가을, 몸에 통증을 여러 번 느끼다가 갑자기 쓰러집니다.

“그 당시 지팡이 들고 몇 번 길가에 쓰러지고 그랬어요. 의사가 이건 고칠 수 없고 말기암이다. 이건 암 중에 최악으로 힘든 거라고 그러더라구요. 참 허무하더라구요. 그 얘기 듣고 일주일 잠을 못 잤습니다.”

매일 침상과 베개가 멈추지 않는 눈물과 콧물로 젖어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지인들의 소개로1995년 우연히 방문했던 북한의 보육원(고아원)이 떠올랐습니다.

“고아원 두 군데를 보여주더라구요. 보구 거기서 내가 이게 내가 마지막 생을 보낼 데구나. (어땠는데 그랬나?) 아주 뭐 형편 없었죠. 충격을 받아가지구. 그래서 내가 미국에 와서 야 내가 북한에 가서 얘네들 구제하고 구원시켜야겠다. 그렇게 맘을 먹고 2년이 지나니까 그러고 보면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해요. 내가 사는데 포커스가 되다 보니 서서히 잊혀지더라고요.”

뼈만 앙상하게 남은 아이들. 한창 뛰어 놀 나이에 영양실조로 방에 누워 신음하는 아이들의 얼굴이 눈 앞에 선명하게 나타났습니다.

“내가 천국에 가려면 편안히 들어가야지. 이렇게 약속을 하고 안 하면 안되겠구나. 그래서 아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때리고 고난을 주시는구나. 하면서 내 평생에 그렇게 인생을 회개한 게 처음이에요. 그래서 사형선고를 받고 내 나름대로 정리를 한 거예요.”

한상만 씨는 이후 재산을 정리해 북한의 고아들을 돕기 위한 재단 설립에 나섰습니다. 마침 부동산에 투자했던 수백만 달러를 모두 날린 뒤라 집을 팔아 남은 돈5만 달러를 갖고 2007년 아버지의 이름을 딴 한 슈나이더 국제어린이 재단을 설립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딸의 집에 기거하며 3층을 사무실 겸 방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로부터 1년 뒤인 2008년. 한상만 씨는 5만 달러 상당의 식량과 약품을 콘테이너 박스에 싣고 북한으로 향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