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적표현물 '김일성 회고록' 한국서 출간…통일부 "경위 파악 뒤 조치 검토"

민족사랑방 김일성 항일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표지.

한국 국내법상 이적표현물로 간주되고 있는 북한 김일성 주석의 회고록이 한국에서 출간돼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한국 통일부는 사전 협의 없이 출판이 이뤄졌다며 경위를 파악한 뒤 조치 여부를 검토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서울에서 김환용 기자가 보도합니다.

북한 김일성 주석의 항일무장투쟁사가 담긴 것으로 알려진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가 최근 8권짜리 한 세트로 한국에서 처음 출간됐습니다.

‘세기와 더불어’는 김일성 주석의 출생부터 해방 전 항일무장투쟁, 즉 1912년 4월부터 1945년 8월까지를 시간적 배경으로 해 김 주석 생전에 5권, 사후에 3권으로 북한의 조선노동당출판사에 의해 출간됐던 책입니다. 이번에 한국에서 나온 책은 원전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겁니다.

현재 800여 개 한국 내 출판사들이 가입한 한국출판협동조합을 통해 온라인과 오프라인 서점에서 판매 중인 이 책은 사단법인 남북민간교류협의회 이사장을 지낸 김승균(83)씨가 지난해 11월 출판사로 등록한 ‘민족사랑방’에서 펴냈습니다.

하지만 ‘세기와 더불어’는 한국 법원이 이적표현물로 판단했던 서적입니다.

2011년 대법원은 평소 북한체제를 추종하다 정부 허가 없이 방북한 혐의 등으로 기소된 정모 씨에 대한 상고심에서 “정씨가 소지한 ‘세기와 더불어’ 등은 이적표현물에 해당한다”고 판단, 징역 1년과 자격정지 1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한 바 있습니다.

김일성 사망 직후인 1994년 8월에는 한 출판사가 ‘세기와 더불어’를 펴내려다가 출판사 대표가 구속됐습니다.

한국 정부 산하 국책연구기관인 통일연구원 조한범 박사입니다.

[녹취: 조한범 박사] “북한이라는 주체는 보안법상 반국가단체에 해당이 되고요. 또 다른 여러 실정법에서 북한이라는 실체는 인정이 안됩니다. 그러니까 결국 고무찬양이나 아니면 이적 표현이라는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요.”

한국 통일부는 이 때문에 이 책이 국내 출간된 경위를 파악하고 정부 차원의 조치를 할지 여부를 검토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통일부 관계자는 22일 ‘VOA’와의 전화통화에서 “지난 2012년 주식회사 남북교역이라는 법인이 합법적으로 북한 도서를 다룰 수 있는 특수자료 취급 인가 기관들을 대상으로 이 책을 판매하겠다며 통일부로부터 반입 승인을 받은 바가 있다”며 “하지만 민족사랑방이 국내 출간과 관련해 통일부와 사전에 협의하거나 출간을 목적으로 하는 반입 승인 등을 신청한 사실이 없다"고 설명했습니다.

주식회사 남북교역은 북한과의 무역을 하는 중소업체로, 민족사랑방 대표인 김승균 씨가 대표로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 때문에 이 사안이 ‘반입 목적 외 활용’에 해당될 경우 남북교류협력법을 적용하기 애매할 수 있다는 게 통일부 측 설명입니다.

통일부 관계자는 국가보안법 위반 여부에 대해선 경찰이나 국가정보원 등 조사기관에서 할 일이라며 일단 경위 조사가 먼저라고 말했습니다.

출판사 측은 “이 책의 내용이 일제로부터 해방될 때까지 중국 만주벌판과 백두산 밀영을 드나들며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던 생생한 기록”이라며 “일제 치하에선 김일성 장군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지만 이제 본인의 회고록으로 의문의 여지가 풀렸다”고 소개했습니다.

하지만 학계에선 김일성 주석의 항일빨치산 활동을 지나치게 미화한, 일방적 진술을 토대로 만들어진 책이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입니다.

지난해 출간된 조선족 작가 유순호 씨가 쓴 ‘김일성 1912∼1945’에서는 ‘세기와 더불어’에 대해 왜곡, 과장, 오류가 100곳이 넘는다고 지적했습니다.

고려대 북한학과 임재천 교수입니다.

[녹취: 임재천 교수] “수령의 우상화 차원에서 나온 거잖아요. 역사적으로 검증된 게 아니라 김일성의 일방적인 자기의 생각이 들어가 있는 것이고 검증될 수 있는 부분도 아니고 해서 회고록이 일반적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만드는 게 지금 시점에서 남남갈등을 더 부추길 수 있는 이슈가 될 것 같아서 우려가 되네요.”

통일연구원 홍민 박사는 한국 국민들의 높은 의식 수준으로 볼 때 오히려 이 책의 과장된 내용이 북한 정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자극할 소지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서울에서 VOA뉴스 김환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