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군 포로 가족, 워싱턴에서 국제사회 관심 호소

워싱턴의 민간단체 ‘북한인권위원회’가 한국군 포로 문제에 대한 대담회를 열었다. 사진 = 북민전TV / YouTube.

한국전쟁 중 북한에 포로로 끌려간 한국군의 가족이 미국 워싱턴을 방문해 한국군 포로 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을 호소했습니다. 또한 뉴욕에 있는 유엔 본부를 찾아 한국군 포로 문제를 알릴 예정입니다. 김영교 기자가 보도합니다.

6.25 전쟁의 한국군 포로 손동식 씨의 딸이자 `6.25 국군포로 가족회의’ 대표인 손명화 씨가 미국 워싱턴을 방문해 미국 정부를 포함한 국제사회가 북한 내 한국군 포로들의 상황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호소했습니다.

[녹취: 손명화 씨] “20대에 국가의 부름을 받고 총잡고 나라를 지키겠다고 나갔다고 평생 북한에서 탄광, 광산, 임목에서 노예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북한에서 태어난 손 씨는 4일 워싱턴의 민간단체 ‘북한인권위원회’에서 열린 대담회에서 이같이 밝히며, 한국군 포로들은 북한에서 평생 노예와 같은 삶을 살았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손명화 씨] “국군 포로들은 북한에서 그 노예 같은 삶을 침묵으로 지켜야 만이 살 수 있었습니다. 왜? 북한에서 말 한마디 잘못하면 눈을 감고 잠을 자고 나면 국군 포로들을 다 잡아서 정치범 수용소에 갔기 때문에, 남은 국군 포로들은 자기 생계를 위해서라도 자기 삶을 위해서 자기 자식들을 위해서 자기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말을 할 수 있어도 말을 할 수 없는 벙어리 같은 신세로 국군 포로들은 살았던 것입니다.”

이어 한국군 포로들이 북한에서 직면했던 처참한 상황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증언했습니다.

[녹취: 손명화 씨] “탄광 광산에서 어떤 사고가 나면 100% 국군 포로에 혐의를 씌워 국군 포로를 잡아 가두고 총살을 해 인간으로서 대접을 받을 수 없는 그런 취약한 환경 속에서 북한은 국군 포로들을 순 노예로 잡아 가둬서 일을 시켰던 것입니다.”

한국 전쟁이 끝나기 불과 석 달 전 육군 9사단 소속의 이등중사로서 북한군에 포로로 끌려간 손동식 씨는 51살이던 1984년 폐암으로 사망했습니다.

손명화 씨는 이 같은 고통이 한국군 포로 본인에게만 그치지 않았다며, 그 가족들도 연좌제를 통해 차별과 처벌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손명화 씨] “아버지가 국군포로이면 제가 국군포로이고, 제가 만약에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아도 제 자식도 국군포로가 됐습니다.”

한국군 포로의 가족들도 가장 낮은 ‘성분’으로 분류돼 자녀들은 고등교육 기회를 박탈당하고 아버지와 같이 최악의 조건의 일을 맡아서 해야했다고 손 씨는 말했습니다.

지난 2005년 탈북한 손명화 씨는 8년에 걸친 노력 끝에 북한 땅에 묻힌 아버지의 유골을 한국으로 가져오게 된 경위도 설명했습니다.

[녹취: 손명화 씨] “아버지가 눈을 감을 때 내 묘라도 파서 고향에 묻어달라는… 국군 포로들이 한결 같이 자기가 지켜낸 조국, 자기 조국을 위해서 총잡고 나갔던 그 고국이 그리워서 눈을 감을 때마다 자녀들에게 다 내 고향에다 꼭 묻어달라고 해서… 저는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고 아버지께서 저한테 내 묘라도 파서 고국에 묻어달라고 저한테 유언을 남겼기 때문에 2013년에 결과적으로 아버지 유해를 북한에서 묘를 파서 대한민국에 모셔 왔습니다.”

손동식 씨의 유해는 한국에 온 지 21개월 만인 지난 2015년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습니다.

손 씨는 하지만 한국에 아버지 유해가 왔다는 뉴스가 대대적으로 보도된 이후 북한에서 오빠와 여동생, 조카들이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손명화 씨] “아버지 유해하고 산 사람을 결과적으로 바꾼 것이나 같지요.”

현재까지 화장하거나 온전한 유골로 북한에서 한국에 돌아온 한국군 포로는 모두 7 명입니다.

지난 2014년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는 최종보고서에서 한국전쟁 정전 당시 8만 2천 명의 국군포로가 실종됐으며, 이 가운데 5만~7만 명 정도가 포로로 억류된 채 한국에 복귀하지 못한 것으로 추산했습니다.

보고서는 특히 북한 정권이 정전협정 체결 뒤 국군포로들로 구성된 비자발적 건설여단을 만들어 강제로 북한 최북단의 탄광과 공장, 농촌으로 보내 강제 노역을 시켰고, 이후 외진 광산으로 보내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살게 했다고 지적했습니다.

한국 국방부는 이 가운데 지난 1994년 조창호 중위를 시작으로 2010년까지 모두 80명의 국군포로가 자력으로 탈북해 한국에 귀환했다고 국방백서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시아버지가 한국군 포로인 마영애 씨는 남편 대신 증언에 나서 북한에 살아 남아있는 국군포로가 자력으로 탈북하기는 어려운 나이가 됐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마영애 씨] “저희 시아버지가 89세입니다. 대한민국으로 올 수도 없는 그런 연세입니다.”

미국 뉴욕에서 북한인권 운동가로 활동하고 있는 마영애 씨는 북한에 남아있는 한국군 포로들이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국제사회가 관심을 가져달라고 호소했습니다.

손명화 씨와 마영애 씨는 워싱턴 일정을 마치고 뉴욕에 있는 유엔 본부를 찾아 한국군 포로 문제를 알릴 예정입니다.

우선 한국전쟁에 참여한 16개 유엔 회원국 대표부를 찾아 한국군 포로의 상황에 대해 알릴 계획입니다.

특히 손명화 씨가 최근 출간한 ‘침묵의 43호’라는 책을 영어로 번역해 배포할 예정입니다.

43호는 정전협정 이후 북한 정권이 한국군 포로에게 신분증을 부여하기로 결정한 문서의 번호로, 그에 따라 국군 포로들은 ‘43호’라는 번호로 불리게 됐다고 손명화 씨는 설명했습니다.

손명화 씨와 마영애 씨는 또 유엔 내 북한대표부도 찾아 한국군 포로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북한 정권에도 항의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앞서 지난해 10월 손명화 씨를 비롯해 한국군 포로 가족들은 북한 내 한국군 포로의 생사 확인과 송환 등을 북한 정부에 요청하도록 촉구하는 진정서를 유엔에 제출한 바 있습니다.

이 단체에 따르면 진정서는 유엔 인권이사회 산하 노예문제 특별보고관과 고문문제 특별보고관, 강제실종실무그룹(WGEID) 등에 제출됐습니다.

한국군 포로 가족들은 진정서에서 북한이 포로와 전시 납북자의 생사 여부를 밝히고 한국의 가족들과 연락할 수 있도록 허용하며 한국에 무사히 돌려보내도록 촉구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VOA 뉴스 김영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