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북한에 가족을 둔 한국계 미국인들을 설레게 하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미국에 사는 동생이 북한 당국의 허가를 받아 현지에 묻힌 누나의 유골을 미국으로 옮겨왔기 때문입니다. 이산가족들은 북한의 이번 조치가 일회성으로 끝나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 뿐입니다. 백성원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이산가족들은 또 한 번 울었습니다.
[녹취: 왕규현 씨, 79세 이산가족] “부모님 묘도 가서 뵙고, 절도 하고 그러면 얼마나…(흐느낌)…더 좋죠, 물론.”
미국 미네소타 주에 거주하는 심장내과 전문의 왕규현 씨는 마을 어귀까지 따라 나온 어머니 얼굴이 생생합니다.
6.25 전쟁이 터지자 아들을 고향 개성에서 인천으로 홀로 내려 보내면서 3개월 뒤에 만나자고 했습니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막내 아들은 이제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습니다.
같은 이산가족인 한국계 미국인 의사 박문재 씨가 지난 10일 평양에서 누나의 유골 일부를 수습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북한에 묻힌 부모님 생각이 더욱 간절합니다.
[녹취: 왕규현 씨, 79세 이산가족] “동포의 원을 풀어줬다는 건 남북이 좀 더 화해할 수 있는 에비던스(evidence) 가 아니냐, 그런 증거가 아니냐, 만일 그렇다면 참 좋은 일이죠.”
북한은 최근 이례적으로 미국 내 한인 이산가족의 유골 반출을 허용했습니다.
미국 시카고의 어머니 곁에 누나를 함께 묻고 싶다는 박 씨의 요청을 받아들인 겁니다.
미 서부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는 86살 방흥규 씨는 누나의 유골함을 들고 귀국한 박 씨의 사연이 남의 일 같지 않습니다. 자신에게도 북한에 묻힌 누나가 있기 때문입니다.
[녹취: 방흥규 씨, 86세 이산가족] “제가 죽기 전에 한 번 갈 수 있으면, 절반이라도, 조금이라도 (유골을) 가져올 수 있으면, 화장이라도 가져올 수 있으면 여기다 모실 수 있고, 그런 생각이 있네요.”
68년 전, 곱게 차려 입고 시집가는 누나를 장난스럽게 올려다 본 게 마지막이었습니다.
살아있다면 아흔 살이 넘었을 누나의 흔적을 이제라도 곁에 두고 싶습니다.
하지만 고령의 이산가족들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습니다.
미 중서부 일리노이 주에 사는 86살 이원희 씨는 그래서 유골 수습까지는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녹취: 이원희 씨, 86세 이산가족] “이제는 눈물도 말랐고, 다 말랐습니다. 나도 이제 몸도 늙었고.”
그저 해방되던 해에 헤어진 아버지 묘소 앞에 술 한잔 따라 올릴 수 있는 기회만이라도 주어지길 바랄 뿐입니다.
[녹취: 이원희 씨, 86세 이산가족] “살아 생전에 소원은 묘지라도 한 번 찾아 봤으면 하는 그런 소원이 있지요. 기회가 되면 내가 살아있을 동안에 거기 성묘라도 한 번 해 봤으면.”
이산가족의 유골 반출을 허용한 북한의 결정이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았으면 하는 건 그 때문입니다.
‘재미 이산가족 상봉추진위원회’ 이차희 사무총장입니다.
[녹취: 이차희 사무총장] “이번 일은 전례에 없었던 일이고 그리고 현재의 정치적인 상황에 비춰서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라고 봅니다.”
그런 만큼 이번 조치가 개인 차원이 아니라 친지가 사망한 이산가족에게 적용되는 선례가 되기를 조심스럽게 기대했습니다.
[녹취: 이차희 사무총장] “부모님들의 유해를 이북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 땅으로 옮겨와서 함께 묻히는 것을 소망하고 있습니다. 아주 절박한 희망입니다.”
절박한 희망은 한인 이산가족들만 갖고 있는 게 아닙니다.
6.25 전쟁 참전 미군 유해 송환에 앞장 서 왔던 미국 내 단체들도 북한의 이번 행보에 주목했습니다.
‘전미 전쟁포로.실종자 가족연합’의 린 오시아 조사국장은 박문재 씨가 누나 유골을 미국에 묻을 수 있도록 배려한 북한의 인도주의 조처를 환영한다고 밝혔습니다.
[녹취: 린 오시아 조사국장] “We certainly welcome the humanitarian gesture of the North Korean government by allowing this gentleman to bring his sister’s remains to rest in the United States.”
오시아 국장은 북한이 현지에서 실종된 6.25 참전용사들의 유골 발굴에까지 그런 조치를 확대해 전몰자 유족도 같은 안식을 얻게 해 줄 것을 촉구했습니다.
하지만 북한 전문가들은 북한의 이번 결정에 대한 확대해석을 경계합니다. 유골 반출 문제를 당국 차원의 협상 대상으로 내세워 왔던 북한이 전향적인 자세를 보이는 것으로 기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미 국무부 한국과장을 지낸 데이비드 스트로브 스탠포드대학 아시아태평양연구소 부소장은 북한의 의도를 확실히 파악하기 힘들지만, 이번 사례는 태도 변화나 특정 신호가 아닌 개인적인 차원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데이비드 스트로브 부소장] “I’m inclined to believe that this is mostly, if not entirely, an act of kindness on the part of the North Korean authorities to a person who has helped North Korean people quite a bit.”
북한 당국이 주민들에게 도움을 준 이에게 친절을 베푼 것으로 이해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산가족들은 북한의 작은 변화에도 민감해 할 수밖에 없습니다.
평양 만수대 인근 공동묘지에 묻혀있던 유골이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 도착하는 모습에 놀라면서도 혹시나 하는 기대를 저버리기 힘듭니다.
60년 동안 이산가족 상봉은 물론, 생사 확인과 서신 교환, 화상 상봉까지 어려웠던 현실이 쉽게 바뀌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한 자락 희망의 끈을 놓을 수가 없는 겁니다.
눈물마저 말랐다는 이산가족의 체념은 그래서 사실이 아닙니다.
[녹취: 왕규현 씨, 79세 이산가족] “난 지금도 생각나요. 어머니가…(흐느낌)… 없는 돈에 어디서 인절미를 조금 사오셨더라고. 그걸 주면서 점심으로 먹으라고 그러면서 통곡을 하면서 우는 게 내가 지금도 생각나죠…(한숨)”
어머니라는 단어만 입에 올려도 금새 솟는 눈물은 60년이 지났어도 멈추지 않습니다.
VOA 뉴스 백성원 입니다.
이산가족들은 또 한 번 울었습니다.
[녹취: 왕규현 씨, 79세 이산가족] “부모님 묘도 가서 뵙고, 절도 하고 그러면 얼마나…(흐느낌)…더 좋죠, 물론.”
미국 미네소타 주에 거주하는 심장내과 전문의 왕규현 씨는 마을 어귀까지 따라 나온 어머니 얼굴이 생생합니다.
6.25 전쟁이 터지자 아들을 고향 개성에서 인천으로 홀로 내려 보내면서 3개월 뒤에 만나자고 했습니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막내 아들은 이제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습니다.
같은 이산가족인 한국계 미국인 의사 박문재 씨가 지난 10일 평양에서 누나의 유골 일부를 수습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북한에 묻힌 부모님 생각이 더욱 간절합니다.
[녹취: 왕규현 씨, 79세 이산가족] “동포의 원을 풀어줬다는 건 남북이 좀 더 화해할 수 있는 에비던스(evidence) 가 아니냐, 그런 증거가 아니냐, 만일 그렇다면 참 좋은 일이죠.”
북한은 최근 이례적으로 미국 내 한인 이산가족의 유골 반출을 허용했습니다.
미국 시카고의 어머니 곁에 누나를 함께 묻고 싶다는 박 씨의 요청을 받아들인 겁니다.
미 서부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는 86살 방흥규 씨는 누나의 유골함을 들고 귀국한 박 씨의 사연이 남의 일 같지 않습니다. 자신에게도 북한에 묻힌 누나가 있기 때문입니다.
[녹취: 방흥규 씨, 86세 이산가족] “제가 죽기 전에 한 번 갈 수 있으면, 절반이라도, 조금이라도 (유골을) 가져올 수 있으면, 화장이라도 가져올 수 있으면 여기다 모실 수 있고, 그런 생각이 있네요.”
68년 전, 곱게 차려 입고 시집가는 누나를 장난스럽게 올려다 본 게 마지막이었습니다.
살아있다면 아흔 살이 넘었을 누나의 흔적을 이제라도 곁에 두고 싶습니다.
하지만 고령의 이산가족들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습니다.
미 중서부 일리노이 주에 사는 86살 이원희 씨는 그래서 유골 수습까지는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녹취: 이원희 씨, 86세 이산가족] “이제는 눈물도 말랐고, 다 말랐습니다. 나도 이제 몸도 늙었고.”
그저 해방되던 해에 헤어진 아버지 묘소 앞에 술 한잔 따라 올릴 수 있는 기회만이라도 주어지길 바랄 뿐입니다.
[녹취: 이원희 씨, 86세 이산가족] “살아 생전에 소원은 묘지라도 한 번 찾아 봤으면 하는 그런 소원이 있지요. 기회가 되면 내가 살아있을 동안에 거기 성묘라도 한 번 해 봤으면.”
이산가족의 유골 반출을 허용한 북한의 결정이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았으면 하는 건 그 때문입니다.
‘재미 이산가족 상봉추진위원회’ 이차희 사무총장입니다.
[녹취: 이차희 사무총장] “이번 일은 전례에 없었던 일이고 그리고 현재의 정치적인 상황에 비춰서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라고 봅니다.”
그런 만큼 이번 조치가 개인 차원이 아니라 친지가 사망한 이산가족에게 적용되는 선례가 되기를 조심스럽게 기대했습니다.
[녹취: 이차희 사무총장] “부모님들의 유해를 이북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 땅으로 옮겨와서 함께 묻히는 것을 소망하고 있습니다. 아주 절박한 희망입니다.”
절박한 희망은 한인 이산가족들만 갖고 있는 게 아닙니다.
6.25 전쟁 참전 미군 유해 송환에 앞장 서 왔던 미국 내 단체들도 북한의 이번 행보에 주목했습니다.
‘전미 전쟁포로.실종자 가족연합’의 린 오시아 조사국장은 박문재 씨가 누나 유골을 미국에 묻을 수 있도록 배려한 북한의 인도주의 조처를 환영한다고 밝혔습니다.
[녹취: 린 오시아 조사국장] “We certainly welcome the humanitarian gesture of the North Korean government by allowing this gentleman to bring his sister’s remains to rest in the United States.”
오시아 국장은 북한이 현지에서 실종된 6.25 참전용사들의 유골 발굴에까지 그런 조치를 확대해 전몰자 유족도 같은 안식을 얻게 해 줄 것을 촉구했습니다.
하지만 북한 전문가들은 북한의 이번 결정에 대한 확대해석을 경계합니다. 유골 반출 문제를 당국 차원의 협상 대상으로 내세워 왔던 북한이 전향적인 자세를 보이는 것으로 기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미 국무부 한국과장을 지낸 데이비드 스트로브 스탠포드대학 아시아태평양연구소 부소장은 북한의 의도를 확실히 파악하기 힘들지만, 이번 사례는 태도 변화나 특정 신호가 아닌 개인적인 차원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데이비드 스트로브 부소장] “I’m inclined to believe that this is mostly, if not entirely, an act of kindness on the part of the North Korean authorities to a person who has helped North Korean people quite a bit.”
북한 당국이 주민들에게 도움을 준 이에게 친절을 베푼 것으로 이해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산가족들은 북한의 작은 변화에도 민감해 할 수밖에 없습니다.
평양 만수대 인근 공동묘지에 묻혀있던 유골이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 도착하는 모습에 놀라면서도 혹시나 하는 기대를 저버리기 힘듭니다.
60년 동안 이산가족 상봉은 물론, 생사 확인과 서신 교환, 화상 상봉까지 어려웠던 현실이 쉽게 바뀌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한 자락 희망의 끈을 놓을 수가 없는 겁니다.
눈물마저 말랐다는 이산가족의 체념은 그래서 사실이 아닙니다.
[녹취: 왕규현 씨, 79세 이산가족] “난 지금도 생각나요. 어머니가…(흐느낌)… 없는 돈에 어디서 인절미를 조금 사오셨더라고. 그걸 주면서 점심으로 먹으라고 그러면서 통곡을 하면서 우는 게 내가 지금도 생각나죠…(한숨)”
어머니라는 단어만 입에 올려도 금새 솟는 눈물은 60년이 지났어도 멈추지 않습니다.
VOA 뉴스 백성원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