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을 탈출해 한국에 입국한 탈북민이 3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VOA는 ‘탈북민 3만 명 시대’를 맞아 탈북민들이 한국에 정착하는 과정의 명암과 한국 정부의 탈북민 정책의 현주소를 짚어 보는 특집을 다섯 차례로 나눠서 보내 드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네 번째 순서로, 탈북 청소년들의 학업 중도 포기 실태와 대책에 대해 전해 드립니다. 서울에서 김환용 기자가 보도합니다.
한국에서 서강대를 나와 영국 정부 장학금으로 영국 워릭대학교에서 석사 과정까지 밟은 이성주 씨는 지난 2002년 16살의 나이로 한국에 들어온 탈북민입니다.
이 씨는 한국 정부의 탈북민 정착교육기관인 ‘하나원’을 거쳐 사회에 첫 발을 디딘 뒤 남한 사람들의 편견과 멸시로 아르바이트 일자리조차 잡지 못한 채 정체성의 혼란을 심하게 겪었다고 회고했습니다.
[녹취: 탈북민 이성주] “한국 사람들을 우리 형제, 우리 친척, 우리 동포라고 하는데 결국 내가 북한에서 왔는데 나를 외국인 노동자 또는 그 이하로 취급하는구나. 그럼 나는 누구지? 내가 북한 사람인가? 외국인 노동자인가? 남한 사람인가?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저한테 닥쳤던 거죠.”
이 씨는 ‘북한에 고향을 둔 한국인’이라는 나름의 정체성을 세우는 데 꼬박 2년이 걸렸고 그 때서야 비로소 학업에 전념할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지난해 새누리당 김영우 의원이 통일부와 교육부로부터 제출 받은 자료에 따르면 탈북 청소년의 학업 중단율은 전반적으로 감소 추세지만 고학년일수록 중단율이 높아 남한의 일반 청소년 보다 최대 10배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탈북 청소년들의 학업 중도 포기의 가장 큰 원인은 정체성 혼란이 꼽힙니다.
지난 2002년 한국에 들어와 현재 북한개발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는 탈북민 김병욱 소장은 대학교를 다니는 자녀가 두 명 있는데 이들의 청소년 시절도 예외가 아니었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김병욱 소장 / 북한개발연구소] “난 우리 애 같은 경우 여기서 전교 부회장도 해서 몰랐죠. 그런데 어느 날 아이 일기장을 보니까 무장공비, 빨갱이라고 애들한테 놀림 받고 싸움도 하고 그런 내용을 봤어요. 우리 애 같은 경우는 공부 잘하고 부회장도 해서 그런 일이 먼 이야긴 줄 알았는데 탈북자이기 때문에 겪게 되는 거죠. 그건 예외가 없어요.”
탈북 청소년들을 위한 대안학교 ‘여명’의 조명숙 교감은 탈북 청소년들이 학년이 높을수록 학업을 포기하는 비율이 높아지는 이유는 시험위주, 그리고 억압적인 학교 문화 속에서 또래들의 화풀이 대상이 돼 따돌림을 당하는 등의 심리적 상처를 받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때문에 특히 고교 재학 중에 일반학교를 다니다 탈북 청소년만을 위한 대안학교로 전학하는 학생들이 많다는 설명입니다.
조 교감은 탈북 청소년들은 교과 공부 이전에 심리적인 문제들을 풀어줘야 하지만 이들의 사정을 잘 아는 전문 상담교사가 없는 일반 학교에서 이를 감당하긴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일반 학교가 탈북 청소년교육으로 특화된 민간단체들과 위탁이나 방과 후 교육 방식으로 협력하는 방안을 정책적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습니다.
[녹취: 조명숙 교감 / 여명학교] “학교 자체 역량만으로는 사실은 이것을 감당하기가 힘들어요. 그래서 외부 전문기관과 연계하는 시스템을 더 많이 개발해야 될 것 같아요. 그런데 지원이 굉장히 약하죠. 그래서 지원이 10%라면 저희가 90%를 부담해야 하는 경우가 많죠.”
더 심각한 상황에 놓인 탈북 청소년들은 중국 등 제3국에서 태어나 한국 정부로부터 탈북민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이른바 ‘비보호 탈북 청소년’입니다.
한국 교육부는 중국에서 출생해 한국의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는 탈북민 자녀가 지난해 말을 기준으로 모두 1천249명이라고 밝혔습니다. 이는 북한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는 학생보다 조금 더 많은 수치입니다.
이 같은 현상은 북한에 김정은 정권이 들어선 이후 북-중 국경 통제가 강화돼 북한을 탈출하는 주민들의 수가 줄어든 반면 이미 중국에 나와 있는 탈북 여성들이 중국인 남편의 아이를 낳은 뒤 한국으로 들어와 나중에 중국에 두고 온 자녀들을 불러오는 경우가 많아진 때문입니다.
조명숙 교감은 여명학교의 경우 초·중·고교 과정에 다니는 110명 가운데 30명 정도가 비보호 탈북 청소년이지만 중학교 과정은 20명 가운데 15명, 그리고 초등학교 과정은 5명 모두가 비보호 탈북청소년이라고 밝혔습니다. 학년이 낮을수록 비보호 탈북청소년의 비중이 크게 늘어나는 추세라는 설명입니다.
이들 청소년들은 무엇보다 중국에서 태어나 한국말을 거의 하지 못하기 때문에 한국에서 공부하는 데 더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대안학교 ‘우리들학교’의 윤동주 교장입니다.
[녹취: 윤동주 교장 / 우리들학교] “중국에 태어나서 조선족들이 다니는 학교에 진학한 경우 우리말을 좀 익힌 아이들도 있어요. 그러나 대다수는 한족 학교를 다니거나 학교를 못 다닌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우리말을 전혀 못하는 아이들이 급증하고 있죠.”
학교 현장에선 이들에게 한국말을 가르칠, 중국어와 한국어를 모두 할 수 있는 이중언어 강사가 부족한 실정입니다.
조명숙 교감은 여명학교의 경우 올해는 통일부에서 강사를 지원해줬지만 내년엔 어떻게 될지 불투명하다며 제도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지적했습니다.
[녹취: 조명숙 교감 / 여명학교] “자국민 언어강사들이 다문화의 경우엔 있잖아요. 이중언어 강사들이. 그런 식으로 탈북민의 자녀들 가운데 중국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위해선 정부에서 제도적으로 그 아이들의 언어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그런 부분들 필요하죠.”
비보호 탈북 청소년들은 이처럼 학업에 더 불리한 조건인데다 대학 진학에서 북한에서 태어난 청소년들이 받는 특별전형 혜택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일반 한국 학생들과 같은 조건에서 경쟁을 해야 합니다.
탈북민 지원단체 관계자들은 비보호 탈북청소년으로선 이겨내기가 거의 불가능한 경쟁이라며, 이들의 좌절은 장기적으로 한국사회 불안요인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제도적 보완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서울에서 VOA뉴스 김환용입니다.
한국 내 탈북민 3만 명 시대를 맞아 준비한 기획보도, 내일 이 시간에는 다섯 번째, 마지막 순서로 젊은 신세대 탈북민들의 한국사회 정착 사례를 전해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