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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인사이드] 한국, 10년만에 진보정권 재집권


지난 2000년 6월 평양에서 6·15 남북 공동선언을 발표한 김대중 한국 대통령(왼쪽)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지난 2000년 6월 평양에서 6·15 남북 공동선언을 발표한 김대중 한국 대통령(왼쪽)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매주 월요일 주요 뉴스의 배경을 살펴보는 ‘뉴스 인사이드’ 입니다. 최근 한국에서는 제 19대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으로 이명박-박근혜 보수파 9년 집권이 끝나고 진보 성향 정부가 들어섰습니다. 과거 진보 성향의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남북관계에서 어떤 성취를 이루고,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 알아봅니다. 최원기 기자가 전해 드립니다.

1998년 2월 한국의 15대 대통령에 취임한 김대중 대통령은 집권 내내 남북 화해와 협력을 위한 `햇볕정책'을 펼쳤습니다.

특히 집권 3년차인 2000년 6월에는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갖고 6.15 공동선언에 합의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입니다.

[녹취: 김대중] "이제 공동성명에 완전히 합의를 봤습니다. 여러분 축하해 주십시오.”

김정일 위원장도 정상회담을 계기로 자신이 ‘은둔’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농담을 했습니다.

[녹취: 김정일] “나보고 은둔생활을 한다는데, 김 대통령이 오셔서 은둔에서 해방됐다...”

남북한의 최고 지도자가 만나 합의한 6.15 공동선언은 통일 방안을 검토하는 한편 이산가족 상봉과 경제협력, 남북대화 정례화, 그리고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 방문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다시 김대중 대통령입니다.

[녹취: 김대중] "이번 저의 방북이 한반도의 평화, 남북 교류협력, 그리고 조국의 통일이 되는 길을 닦는데 조그마한 보탬이 된다면 그 이상 다행이 없겠습니다.”

6.15 선언 이후 남북 간에는 화해와 협력의 분위기가 고조됐습니다. 남북 장관급 회담과 국방장관 회담이 열렸으며 금강산 관광, 남북 도로와 철도 연결, 그리고 개성공단이 추진됐습니다. 또 12 차례에 걸쳐 1만2천여 명의 이산가족이 상봉했습니다.

김대중 정부 시절에도 남북 간에 군사적 갈등과 충돌이 있었습니다. 1999년과 2002년 서해에서는 남북 해군 간 교전이 발생했고, 1998년에는 동해에서 북한 잠수정이 남한 어선의 그물에 걸려 발각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김대중 정부는 군사적 충돌과 남북관계를 분리대응해 본격적인 남북관계 경색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고 한국 현대사연구소의 정창현 소장은 말했습니다.

[녹취: 정창현]”충돌이 발생해도 그것은 그것대로 대응하면서도 정치와 경제협력을 분리하는 투 트랙 정책을 일관되게 유지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북한 핵 문제는 김대중 정부 초기에는 크게 불거지지 않았습니다. 앞서 북한과 미국 클린턴 행정부가 북 핵 문제를 풀기 위해 1994년 미-북 제네바 합의를 체결했기 때문입니다.

또 당시에는 김대중 정부와 미국 클린턴 행정부가 모두 대북 개입정책을 내세웠기 때문에 미-한 간에 별다른 마찰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2001년 미국에서 보수적인 공화당 조지 부시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부시 대통령이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면서 김 대통령의 햇볕정책은 커다란 장벽에 부딪쳤습니다.

특히 부시 행정부는 2002년 10월 제임스 켈리 당시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를 평양으로 보내 북한의 비밀 우라늄 농축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그러자 북한의 강석주 당시 외무성 제1부상이 이를 시인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2차 북 핵 위기가 시작됐고, 그 후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도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지난 2007년 10월 평양에선 열린 남북정상회담에서 노무현 한국 대통령(왼쪽)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맞잡은 손을 들어올리고 있다
지난 2007년 10월 평양에선 열린 남북정상회담에서 노무현 한국 대통령(왼쪽)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맞잡은 손을 들어올리고 있다

2003년 2월 집권한 한국의 제 16대 노무현 대통령은 전임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을 이어 받아 ‘남북 화해와 평화번영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이 정책의 핵심은 2가지였습니다. 한국이 주도적으로 핵 문제를 풀어나가면서, 남북관계도 동시에 발전시킨다는 병행 추진론이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의취임사입니다.

[녹취: 노무현]”저는 한반도 평화 증진과 공동의 번영을 목표하는 평화와 번영의 정책을 몇 가지 원칙을 갖고 추진해 나가겠습니다. 첫째 모든 현안을 대화로 풀어나가겠습니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의 대북정책 구상은 뜻대로 풀리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북한 김정일 정권이 핵 개발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북한은 2005년 2월 핵 보유 선언을 한 이래 영변의 핵 시설을 재가동했습니다. 이어 2006년 10월에는 핵실험까지 강행했습니다.

북한이 핵실험을 실시하자 유엔 안보리는 대북 제재 결의를 채택했습니다. 6자회담 참가국인 한국의 노무현 정부도 이 제재 결의에 동참했습니다. 그 결과 남북관계는 얼어붙고 말았습니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한국과 미국 관계도 좋지 않았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4년 11월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북한이 핵 개발을 하는 것은 일리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노 대통령의 이 발언은 당시 부시 미국 대통령의 격노를 샀고, 한-미 양국은 한동안 불편한 관계를 겪어야만 했습니다.

노무현 정부가 핵 문제에 성과를 거둔 것도 있습니다.2차 북 핵 위기가 불거지자 노무현 정부는 외교력을 발휘해 2005년 9월 베이징에서 열린 6자회담에서 북한 비핵화 원칙을 담은 ‘9.19 공동성명’을 채택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어 2007년에는 구체적인 비핵화 방안을 담은 ‘2.13합의’를 이끌어 냈습니다.

핵 문제가 풀려갈 조짐을 보이자 노무현 대통령은 2007년 10월 평양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정상회담을 갖고 '10.4 선언'에 합의했습니다. 8개항에 걸친 10.4선언은 남북 군사회담, 그리고 경제협력을 확대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군사분계선을 통과하며 언급한 내용입니다.

[녹취: 노무현] ”저는 이번에 대통령으로서 이 금단의 선을 넘어갑니다. 제가 다녀오면 더 많은 사람이 다녀오게 될 것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전향적인 대북정책은 한국 내에서 큰 정치적 문제가 됐습니다. 보수파들은 노 대통령의 대북정책을 '퍼주기 정책'이라고 비판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을 마치고 넉 달 뒤 대통령직에서 물러났습니다. 그 후 남북관계는 10.4 선언 이행 문제와 북한의 거듭된 핵실험으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습니다.

VOA뉴스 최원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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