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건설한 위대한 미국인들을 만나보는 '인물 아메리카'. 오늘은 올림픽 다이빙 경기에서 2연패를 한 한국인 2세 새미 리 이야기를 소개 합니다.
한국계 미국인 새미 리 박사는 1948년 런던 올림픽과 1952년 헬싱키 올림픽 하이 다이빙에서 금메달을 땄습니다. 미국이 올림픽 다이빙에서 2연패를 달성한 것은 새미 리가 처음이었습니다.
미국의 올림픽 영웅으로 환영 받았던 새미 리는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이민자의 후손으로 1920년 8월 1일 캘리포니아주 프레즈노(Fresno)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이순기 씨는 하와이를 거쳐 캘리포니아에 정착한 미국 이민 초기 세대였습니다. 아버지는 옥시덴탈 칼레지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했고 한국말과 영어를 능통하게 했습니다. 새미 리 가족은 조그마한 찹수이 식당, 중국 음식점을 운영했습니다.
새미 리가 12살 때였던 1932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올림픽이 열렸습니다. 수많은 배너, 포스터, 각종 기념품을 본 새미 리는 올림픽에 큰 흥미를 갖게 됐습니다. 새미 리는 그 해 여름 친구들과 함께 수영장에서 공중 돌기를 하던 중, 친구들보다 자신이 월등히 잘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아버지한테 다이빙을 열심히 해 올림픽에 나가겠다고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의과대학에 가서 의사가 된다는 약속을 하면 도와주겠다는 조건부 허락을 했습니다. 인종 차별이 심한 때라 미국에서 인정받고 살려면 사회적 신분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 아버지의 생각이었습니다.
새미 리의 다이빙 훈련은 쉽지 않았습니다. 당시 이 지역에서는 흑인이나 동양인에게 일주일에 단 하루만 수영장 입장이 허용됐습니다. 새미 리는 수영장에 입장을 못하는 날엔 구덩이에 모래를 채워놓고 뛰어내리는 연습을 했습니다.
새미 리는 성인이 돼서도 키가 157cm밖에 안 돼 그것이 다이빙에는 오히려 유리했습니다. 그는 다이빙을 열심히 연습하면서 학교 공부도 열심히 했습니다. 새미 리는 프랭클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옥시덴탈대학에 들어갔습니다. 대학 때는 학교 스포츠팀에서도 활약했습니다. 대학 졸업 후에는 남캘리포니아대학교 (USC) 의과대학에 들어가 1947년에 의사가 됐습니다.
새미 리가 다이빙 선수로 전국에 이름을 내기 시작한 것은 1942년 전미 다이빙선수권 대회 때였습니다. 10m와 3m 두 종목에 출전했는데, 모두 우승을 했습니다. 유색인종이 미국 다이빙 챔피언이 된 것은 최초였고, 그때부터 화제의 인물로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1948년 런던 올림픽 남자 다이빙 10m 플랫폼에서 금메달을 땄습니다. 아시아계 미국인으로는 처음이었습니다. 같은 대회 3m 스프링보드에도 출전했는데 동메달을 땄습니다.
4년 뒤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도 출전해 10m 플랫폼 다이빙에서 다시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올림픽 다이빙에서 연속 금메달을 딴 건 미국 최초의 기록이었습니다. 헬싱키 대회 때 새미 리는 육군 소령으로 군의관 신분이었습니다. 그가 2관왕이 된 8월 1일은 바로 그의 32세 생일 날이기도 해 최고령 올림픽 금메달 수상자라는 기록도 남기게 됐습니다.
미국인들의 반응은 뜨거웠습니다. 언론의 집중적인 주목을 받은 건 말할 것도 없고 여러 텔레비전 쇼에서도 출연 요청이 쇄도했습니다. 헬싱키 올림픽 다음 해인 1953년에는 미국 체육계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활약을 보인 아마추어 선수에게 수여하는 제임스 설리번 상을 받았습니다.
1956 멜버른 올림픽, 1972 뮌헨 올림픽, 1988 서울 올림픽에서는 미국 대통령이 임명한 특사로 파견되기도 했습니다. 1990년에는 올림픽 명예의 전당에 헌정됐고, 2009년에는 캘리포니아주 애너하임에 있는 ‘별들의 길’에도 헌정됐습니다.
그 외 국제 수영 ‘명성의 전당’, 로스앤젤레스 통합교육구의 ‘고교 스포츠 명예의 전당’ 등 여러 곳에서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습니다. 닉슨 대통령과 포드 대통령 시절에는 ‘국민보건 스포츠 대통령 위원회’ 15인 중 한 명이기도 했습니다.
새미 리 박사는 미국과 한국의 체육 발전을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새미 리는 대학교 때 장교 후보생으로 훈련을 받은 다음 군의관으로 자원 입대했습니다. 1953년부터 1955년까지는 주한미군에서 복무하기도 했습니다. 미 8군 군의관으로 근무하는 동안 그는 한국의 다이빙 선수를 지도했습니다.
또 미국에서는 다이빙 코치로 활약하며 1984년과 1988 두 번의 올림픽에서 금메달 수상자를 배출했습니다. 2010년과 2014년에는 평창 동계 올림픽 유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명예 홍보대사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2010년 로스앤젤레스 시 의회는 한인타운에 있는 광장을 새미 리 광장(Sammy Lee Square)으로 이름을 바꾸어 당시 90세이던 올림픽 영웅에게 영광을 안겨주었습니다. 2013년 5월 로스앤젤레스 통합교육국은 한인 타운에 있는 초등학교를 최초의 ‘새미 리 보건의학 특수 초등학교’로 지정했습니다.
노구를 이끌고 명명식에 참석한 새미 리 박사는 학생들에게 장래의 꿈을 이루는데 어떤 난관이 닥치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밀고 나가라고 당부하기도 했습니다.
미국 수영 영웅 새미 리 박사는 2016년 12월 2일 96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습니다. 미국과 세계의 신문 방송은 새미 리의 죽음을 일제히 보도하면서, 어떤 편견과 장애도 새미 리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고 찬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