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내 북한 관련 화제성 뉴스를 전해 드리는 ‘뉴스 풍경’ 입니다. 구한말 일본제국에 굴욕적 수모를 겪으며 지위를 잃었던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이 113년 만에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옛 모습을 복원하고 역사 교육의 장으로 새로워졌습니다. 장양희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녹취:오수동 관장] “이 공관은 조선의 자주독립 의지를 상징하는 외교공관입니다. 한국과 미국의 오랜 역사를 상징. 한-미 우호의 요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역사의 교훈을 잊지 말자는 교육의 장이 될 것이고, 미국인들에게는 두 나라의 동맹은136년의 역사를 갖는 긴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장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이 6년여 기간에 걸쳐 진행된 보수복원 공사를 모두 마치고 개관식을 앞두고 있습니다.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은 1889년 구한말 조선의 자주독립 의지를 상징하는 외교공관으로 탄생했습니다.
1882년 러시아와 청나라, 일본이 한반도에서 주도권 다툼을 벌일때 미-한 양국은 조미수호통상 외교조약을 맺었습니다.
같은 해 서울 정동에서는 주한 미국공사가 공식 업무를 시작했고, 워싱턴의 대한제국 공관은 1889년부터 빌려쓰던 건물을 1891년 고종황제가 당시 거액인 2만 5천 달러를 주고 직접 구입했습니다.
그러나 1905년 조선은 일제에 의해 외교권을 빼앗겼고 공관은 1910년 당시 단돈 5달러의 헐값에 미국인에게 팔렸습니다.
격변의 시기에 세계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수모를 겪은 후 한 세기가 넘는 침묵의 시간이 시작된 시점이었습니다.
이후 공사관은 2차 세계대전 당시 군인 휴양시설로, 노조 사무실로, 개인주택 등으로 사용됐고, 1990년대 말 미주 한인사회에 의해 재조명됐습니다.
미주 한인사회에서는 외교공관을 되찾기 위한 기금 모금 등 풀뿌리 운동을 시작했고, 이런 노력을 밑거름으로 2012년 한국 문화재청은 당시 공사관에 거주하던 미국인에게 350만 달러의 거금을 주고 공관 건물을 재매입했습니다.
대한제국이 일제에 의해 외교권을 강탈 당한 지 102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한국 문화재청은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을 설립했고, 첫 사업인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 보수복원 사업’이 2015년 10월 19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당시 워싱턴에 상주하며 보수복원 작업에 참여했던 김종헌 건축사학자는 `VOA’에 공관 복원 사업의 의미를 설명했습니다.
[녹취: 김종헌] “이 공사관의 복원은 단순한 한국의 외교공관을 복원한다는 개념만이 아니라 새롭게 역사를 조명하면서 풀어가면서 조명하는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고..”
1년여 시간이 흐른 지난 2016년 12월 처음으로 복원 공사의 과정과 현장이 한인사회에 공개됐고, 2017년 봄 개관 계획을 밝혔습니다.
그러나 약속했던 개관 시점은 보수복원 공사 기간이 늘어나면서 원래 계획에서 1년을 넘긴 올해 5월 22일 이뤄지게 됐습니다.
5월 22일은 미-한 양국의 첫 수교가 이뤄진 조미수교 외교통상 조약 체결일입니다.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은 미국 수도 워싱턴 시내 중심가, 역사 보존 지역인 로간서클 15번지에 위치해 있는데, 1870년대 도시계획 개발자가 지은 사택이었던 만큼 지역 내 가장 잘 지어진 건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하 1층, 지상 3층 구조의 빅토리안 양식의 건물로 지하는 사료 보관과 연구 공간으로, 1, 2층은 옛 모습을 그대로 살려 외교공관의 용도과 격식을 갖춘 모습으로 복원됐습니다.
한국의 창덕궁 원형을 복제한 ‘불로문’, 한국의 전통 기왓장 아래 매란국죽의 문양을 새겨 넣은 꽃담 등이 조성된 정원은 한국에서 공수된 재료로 한국의 인간문화재들이 직접 와서 시공했습니다.
공사관 현관에는 오래 전 모습대로 지붕과 기둥을 세웠고,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방문 크기 만한 태극기가 복도의 우측 벽면에 길다랗게 걸려있습니다.
태극기와 마주하고 있는 공간은 ‘객당’으로 귀빈을 접대하던 방입니다. 주미 대한제국 공관 오수동 관장의 설명입니다.
[녹취: 오수동 관장] “그 당시에 헌팅턴 도서관에 있는 사료의 사진을 보고 똑같은 물건을 앤티크 샵에서 구해서 같은 물건을 같은 위치에 배치했습니다. 객당인데요, 손님을 모시는 장소입니다. 저희가 임의로 조화를 하려고 한 게 아니라, 옛날 사진 모습 그대로 복원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습니다. 이 사진은 초대공사 박정양 공사고요. 의자의 갯수, 탁자의 갯수. 소품들.. 태극기가 그려진 쿠션…”
1880년대 말 당시 찍은 흑백사진에 색깔을 입힌 듯이 예전 모습이 그대로 복원됐는데, 한국화가 그려진 병풍과 벽난로 좌우에 나란히 놓인 도자기는 서양식 벽거울, 램프, 소파와 커튼, 벽지 등과 어우려저 동서양의 아름다운 조화를 이뤘습니다.
객당과 마주하고 있는 식당은 외교관들 만을 위한 공간인데요, 진열장에 식기들과 손뜨게 식탁보 등도 품위있게 오래 전 모습으로 복원됐습니다.
[녹취:오수동 관장] “기록에 의하면 3대 이채현 공사의 부인이 부인회를 구성해서 백악관과도 활발한 교류를 해서 클리브랜드 대통령이 여기를 방문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오 관장은 1층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으로 ‘정당’을 소개했는데요, 한 달에 두 번 혹은 특별한 날 신하가 임금에게 예를 올리는 장소입니다.
[녹취: 오수동 관장] “당시 공관원들이 제일 중요하게 생각했던 공간인데, ‘정당’입니다. 바를 정 자에 집 당, 고종황제 어진과 황태자 예진을 모셔놓고 ‘망궐례’를 드리던 곳입니다. 조선시대에 도성을 떠난 지방 관원들이 임금이 있는 곳을 향해 예를 드렸어요.”
정당은 객당과 대조될 만큼 간단한 장식장과 탁자 등으로 검소하게 꾸며졌습니다.
그 밖에 식당과 붙어있는 옛 보조주방은 관람객들을 위한 오리엔테이션 공간으로 개조했고 복원 과정에서 발견한 서양식 가옥만의 하인 전용 계단과 복도, 음식용 승강기가 흥미롭습니다.
오 관장은 1층은 당시 사진이 남아있어 예전 모습 그대로 복원이 가능했지만 2층 공간은 물품대장에 적힌 목록들을 갖고 복원했다고 설명했습니다.
2층에는 공사 부부를 위한 침실과 공사 직무실, 공관원들의 서재와 직무실, 화장실이 있습니다. 직무실에 대한 오 관장의 설명입니다.
[녹취: 오수동 관장] “공관원들의 “동양식 필기구와 서양식 필기구가 같이 있어요. 자체기록은 한글로 하지만 외국 사람과 주고 받을 때는 영문으로 하지 않았겠어요?”
나선형 계단을 따라 3층으로 올라가면 대한제국 공관에 대한 역사 교육의 장,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 박물관입니다.
이 공간은 네 개 부문으로 나누었는데, 한-미 교류의 시작에서 공관 설치 전까지의 과정, 공관 개설 과정와 개설 후 활동, 대한제국 관련 자료, 끝으로 한국의 발전과 공사관 복원입니다.
초대 박정양 공사가 클리브랜드 미국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하러 간 상황, 이범진 공사가 초청된 백악관 만찬 회동, 미-한 두 나라에 각각 머물었던 한국인과 미국인들, 공사관의 매각, 1990년대 말 한인사회의 풀뿌리 운동 등 공관의 운명에 얽힌 역사자료들이 사진과 동영상으로 정리됐습니다.
구한말 고종황제가 조선의 자주외교를 외치기 위해 당시 조선의 전체 예산의 절반을 들여 사들일 만큼 공관에 많은 공을 들였다고 말하는 오수동 관장.
오 관장은 지난 5년 반이란 시간 동안 한국과 미국에서 수 백 명이 보수복원 작업에 투입됐고, 비용은 대략 1천만 달러가 들었다고 밝혔습니다.
오 관장은 현재 한반도를 둘러싼 긴박한 상황에서 양국의 우호관계가 실제로 작동하고 있는 시기에 재개관을 앞두고 있다며, 공관을 찾는 관람객들을 위한 관람 포인트를 짚어 줬습니다.
[녹취: 오수동 관장] “한국인들에게는 19세기 조선과 대한제국이 미국에서 어떻게 생활하고 활동했는가 유심히 살펴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하게 집기 가구들만 구경하는 것 보다 여기서 생활했던 모습을 상상하면서 보면 좋겠고, 미국인들에게는 우리 한-미 관계의 오래된 역사가 어떻게 시작하고 발전됐고, 어디를 지향하고 있는지 관심을 가졌으면 합니다.”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은 월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무료관람이 가능합니다.
동시수용 인원은 50명에 제한되지만 향후 미국인 학생들이 관심을 가질 수 있는 단체관람 계획 등 한인사회는 물론 미 주류사회를 상대로 다양한 행사들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VOA 뉴스 장양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