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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석유왕' 존 D. 록펠러


[인물 아메리카] '석유왕' 존 D. 록펠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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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미국을 건설한 위대한 미국인을 만나보는 '인물 아메리카'. '석유왕' 존 D. 록펠러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존 D. 록펠러.
존 D. 록펠러.

석유 사업으로 많은 재산을 모아 한때 세계 최고 부자의 자리에 올랐던 존 데이비슨 록펠러는 1839년 뉴욕주 리치포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건강식품 행상을 하는 아버지 윌리엄 록펠러 시니어로부터 철저히 돈 모으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용돈도 그냥 주지 않았고, 일손을 거드는 등 어떤 일을 했을 때 그 대가를 주었습니다. 또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일을 시킬 때 다른 일꾼들과 똑같은 인건비를 주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록펠러는 어린 나이 때부터 수입 장부를 만들어가며 돈 버는 데 재미를 붙였습니다.

나중에는 중부인 오하이오주의 클리블랜드로 옮겨 살았습니다. 학교는 고등학교까지 다녔습니다. 록펠러는 학교를 마친 후 어느 회사의 경리직원으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 돼 곡물, 건초, 육류 등을 중개하는 자기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차츰 사업을 늘려가던 그는 20살이 되자 도매상을 차렸습니다. 사업수단이 좋아 사업은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석유에 손을 대게 된 것은 1859년 펜실베이니아주에서 최초의 유전이 발견되면서부터였습니다. 당시 석유는 별로 많이 사용되는 기름은 아니었으나 과학자들이 등잔불용 기름을 정제하는 방법을 개발하자 차츰 판매가 늘어났습니다. 비록 석유가 주로 등유로 이용되고 있지만, 장래성이 있다고 판단한 록펠러는 정제기술자인 동업자와 합작해 본격적으로 석유 사업에 뛰어들었습니다.

석유는 차츰 등유만이 아니라 발동기를 돌리는 연료 등 사용 용도가 늘어나고 그 가치가 높아졌습니다. 그 결과 펜실베이니아 외에도 미국 내 여러 곳에서 원유를 뽑아 올리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록펠러가 살던 오하이오주에서도 대량의 석유 광맥이 발견됐습니다.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 일대에는 중동 못지않은 대량의 석유가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됐습니다. 클리블랜드는 당시 인구 5만 정도의 소도시였습니다. 록펠러는 여기서 많은 석유를 뽑아 올리 수 있었지만, 그것을 다른 곳으로 실어 나르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던 중 철도 재벌 코넬리우스 밴더빌트가 클리블랜드에 철도망을 연결했습니다. 오하이오의 석유 수송업을 장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록펠러는 밴더빌트와 할인 계약을 체결하고 여러 지역으로 석유를 공급했습니다.

록펠러는 운송업, 송유관 사업, 석유 저장고 사업 등 여러 분야로 사업을 확대해 나갔습니다. 록펠러는 1870년 ‘스탠더드오일(Standard Oil)’ 회사를 설립했습니다. 압도적인 생산량에서 나오는 단가 절감뿐만 아니라, 환불제도로 인한 운송비 절감에 힘입어 스탠더드오일은 점점 더 크게 성장했습니다. 1880년대 초 그의 스탠더드오일은 미국 정제유의 90%를 장악하는 초대형 기업이 됐습니다.

이처럼 눈부신 성장을 이루는 과정에서 록펠러는 비판도 많이 받았습니다. 록펠러는 석유 가격을 원가 이하로 떨어뜨려 경쟁사를 파산하게 만들고 경쟁이 사라지면 시장을 독점했습니다. 일단 독점하고 있는 동안에는 가격을 올리지 않았습니다. 그럼으로써 다른 업자가 들어오는 것을 막았습니다. 직원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작업을 하고, 봉급도 적었습니다. 직원들이 항의하면 무자비하게 진압했습니다.

계속 사업을 확장한 록펠러는 43세 때 미국 최고 부자가 됐습니다. 록펠러는 기업의 본부를 경제 중심지인 뉴욕으로 옮겼습니다. 그는 광산 매입을 시작으로 철강 산업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습니다.

스탠더드오일은 외국에도 발 빠르게 진출했습니다. 차츰 세계적인 석유의 시대가 열리면서 스탠더드오일은 더욱 번창했고, 1880년대 들어서서는 전 세계 석유의 80%가량을 공급하는 큰 국제적 기업이 됐습니다. 외국 시장 중에서는 중국이 가장 큰 고객이었습니다.

석유가 없으면 살아가기가 어려울 만큼 세계는 석유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록펠러는53세 때 세계 최고 부자 순위 1위에 올랐습니다. 33세에 백만장자, 43세에 미국 최고의 부자, 53세에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된 것입니다. 한때 록펠러 재산은 14억 달러로 미국 GDP의 1.5% 이상을 차지했습니다.

1900년대 초 미국 정부는 석유, 철강, 철도 등 대규모 독점기업들이 가져다주는 부작용을 막기 위해 독점금지법을 제정했습니다. 연방 대법원에서 스탠더드오일이 이 법을 위반하고 있다는 판결이 나오자 그는 회사를 모바일, 엑손, 애모코, 쉐브론, 쉘 등 30개가 넘는 여러 자회사로 분산시켰습니다. 쪼개어 놓은 계열사가 주식시장에 상장되자 주식 가격이 크게 오르고 계열사의 지분을 골고루 갖고 있던 록펠러는 결과적으로 그 전보다 재산이 더 늘어났습니다.

50대 중반에 접어들자 록펠러는 소화불량과 우울증 등 건강에 이상이 나타났습니다. 돈을 모으느라 너무 신경을 쓴 스트레스가 원인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때, 록펠러는 신앙의 지도자였던 교회 목사로부터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는 권고를 듣고, 여기저기 고아원과 도서관을 세우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1911 년 72세 때 은퇴한 록펠러는 보다 체계적인 기부를 위해 1913년 록펠러재단(The Rockefeller Foundation)을 설립했습니다. 이 재단은 자선 단체로서는 세계 최대 규모이고, 2016년 기준 기금은 41억 달러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 재단은 병원· 보건의학 연구·학교 등의 사업에 많은 지원을 했습니다. 미국의 명문 대학인 시카고대학에는 막대한 기증을 해 평범했던 대학을 세계 정상급 학교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미국 북침례교의 충실한 신자였던 록펠러는 교회와 관련된 분야에도 많은 지원을 했습니다. 그는 10대 청소년으로 처음 돈을 벌기 시작했을 때부터 교회에는 꼬박꼬박 헌금을 했습니다. 그는 일요일이면 동네에 있는 침례 교회에 나가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했습니다. 사업상 출타를 할 때면 반드시 현지의 흑인 침례교회에 나가 예배를 보고 후한 헌금을 했습니다.

그는 인종차별을 반대한 사람이었습니다. 부인 로라 스펠만 록펠러가 은밀히 흑인차별 반대 운동을 지원하는 것을 알고도 모른 체했습니다. 그리고 평생 술과 담배를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존 록펠러는 평소 부인의 조언을 많이 참고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언젠가 “아내의 판단은 항상 나보다 나았다. 아내의 충고가 없었더라면 나는 아마 지금 가난뱅이가 됐을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록펠러는 1937년 98세 생일을 약 두 달 남겨놓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휴양지인 플로리다에서 숨진 그는 고향인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 묻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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