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이 올해로 70주년을 맞았습니다. VOA는 한국전쟁의 의미와 시사점을 되돌아 보는 기획보도를 전해 드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네 번째로 찰스 랭글 전 하원의원과의 인터뷰를 보내드립니다. 랭글 전 의원은 미 의회 내 ‘한국전쟁 참전 4인방’ 중 유일한 생존 인물로, 46년의 의정활동 기간 중 한반도 관련 입법을 주도했습니다. 조은정 기자가 랭글 전 의원을 인터뷰했습니다.
기자) 랭글 의원님,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0년이 됐습니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한반도는 분리돼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랭글 전 의원) 한반도 통일이 이뤄질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미국도 남북전쟁의 고통을 겪었기에, 전쟁의 상처가 완전히 치유되지 않곤 한다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에 대한 믿음으로 인해, 전 세계에서 이런 종류의 전쟁이 종식되길 바랍니다. 남북한이 하나되고 세계에 평화가 오길 바랍니다.
기자) 20살 나이에 미 제2사단 503 포병대대 소속으로 한국전쟁에 파병되셨습니다. 한국전쟁 기념관에 있는 글귀대로, “알지 못하는 나라, 만나지 못한 사람들을 지켜달라는 부름에 응한” 소감이 어떠셨습니까?
랭글 전 의원) 제2 보병사단 소속으로 1950년 7월 한국에 보내졌을 때, 솔직히 저는 한국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문제가 무엇인지도 몰랐고, ‘경찰 행동’으로 알았는데 실제로는 전쟁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서로를 죽였는데, 나는 놀라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기자) 1950년 겨울, 랭글 의원님은 부대원들과 부산에서 시작해 북쪽으로 계속 진격하다 북한 대동강 인근 근우리에서 중공군에게 포위되었습니다. 그 당시 상황을 ‘악몽보다 끔찍한 기억’으로 표현하셨었죠?
랭글 전 의원) 수 만 명의 중공군이 있었는데, 어떤 이는 말을 타고, 소리 지르고, 고함 치고, 트럼펫을 불었습니다. 나는 우리가 적군에게 완전히 포위됐고, 숫적으로 열세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 느꼈던 감정과 가장 유사한 단어가 ‘악몽’이었습니다. 아직도 1950년 11월 30일을 생각하면 전율합니다. 우리 부대뿐 아니라 미8군 전체에서 대규모 사상자가 났습니다. 저는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지만, 사실 그 기도가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 주변에는 죽은 사람들, 다친 사람들, 포로로 끌려가는 사람들로 가득찼기 때문입니다. 제가 살아남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기자) 근우리에서 중공군의 총에 맞아 구덩이로 떨어지셨는데, 그럼에도 전우들을 이끌고 산을 넘어 전장을 안전하게 탈출하는데 성공하셨죠. 어떻게 그런 용기가 났을까요?
랭글 전 의원) 대단한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스스로 뭘 하고 있는지도 몰랐죠. 더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나는 트럭 밑에 있었는데 분명히 발각돼 살해될 것 같았습니다. 그 때 산길을 봤고, 그 쪽으로 기어 올라갔습니다. 많은 젊은 병사들이 나를 따라왔습니다. 이것은 영웅적 행동이 아닌 생존을 위한 행동이었습니다. 저는 그저 살아서 나오고 싶었습니다. 그 때 함께 했던 44명이 모두 생존한 것이 기적입니다.
기자) 한국전쟁 후 미국으로 돌아와서 하원의원이 되기까지 어떻게 교육을 받고 경력을 쌓았습니까?
랭글 전 의원) 나는 4년 군 복무를 한 뒤 제대했습니다. 군대 가기 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했죠. 그래서 직업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나는 총에 맞았기에 전상자가 받는 훈장인 퍼플하트를 받았습니다. 보훈청에 가서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연방 정부는 제가 참전용사이기에 많은 혜택을 줬고, 장학금을 받아 법대도 갔습니다.
기자) 한국전쟁이 의원님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끼쳤습니까?
랭글 전 의원) 제가 11월 30일 총에 맞았을 때 하나님께 “내 목숨을 살려주면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어떤 일에도 불평하지 않겠습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이후로 하루도 ‘운 나쁜 날’이 없었습니다.
기자) 1971년부터 2017년까지 하원의원으로 23선을 하시면서 한반도와 관련해 많은 입법 활동을 하셨습니다. 공동 발의하신 ‘한국전쟁 참전군인의 해’로 지정하는 결의안이 2012 채택됐고, ‘한국전 참전용사를 기리는 추모벽 건립을 위한 법안’도 2016년에 채택됐습니다. ‘이산가족 상봉 촉구 결의안’과 ‘한반도 평화와 통일 촉구 결의안’을 발의하셨죠. 어떤 부분이 가장 기억에 남으십니까?
랭글 전 의원) 한반도 통일과 관련한 입법 활동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눈부신 역사를 가진 나라가 비로소 하나로 합쳐져 잠재력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의회에서 운이 좋았습니다. 내 보좌관 중에 한나 김이라는 한국계 미국인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열정이 넘치는 사람입니다.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을 만나기 위해 미국의 50개 주를 다 방문하고 전 세계를 다녔습니다. 한나는 나와 한국계 미국인 사회의 연결고리였습니다. 나는 한국계 미국인 선출 공무원들, 지도자들과 계속 접촉해왔으며, 한반도에 평화를 불러와야 한다는 의무감을 갖고 있습니다.
기자) 이미 의회에서 한반도와 관련해 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아직도 남은 일은 무엇일까요?
랭글 전 의원) 우리는 먼저 대통령을 선출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미 의회는 한반도 통일을 지지하기 위해 전 세계를 하나로 연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미국 혼자서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기자) 미 의회 ‘참전용사 4인방’ 중 이제 혼자 남으셨습니다. 샘 존슨, 존 코니어스, 하워드 코블 하원의원들이 모두 별세하셨죠. 이 분들의 삶을 통해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요?
랭글 전 의원) 어떤 나라 출신이던, 어떤 종교를 가졌던, 옳은 일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존 코니어스, 하워드 코블, 샘 존슨과 나는 정말 좋은 친구들이었습니다. 한국에서 지도자들이 오면 우리는 함께 모임을 갖고 식사를 했습니다. 나는 그들이 너무나 그립습니다. 미 의회도 그립습니다. 하원에는 이들 외에도 평화와 통일을 원하는 의원들이 많습니다. 새로운 미국 대통령이 진전을 낼 것으로 확신합니다.
기자) 한반도 비핵화 협상을 수 십 년 동안 지켜보셨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세 번 만나기도 했지만, 현재 교착 상태에 있죠. 북한 핵 문제는 어떻게 해결돼야 할까요?
랭글 전 의원) 전 세계가 힘을 모아 이 문제에 더 집중해야 합니다. 핵무기는 수 만 명이 희생되고 몇 몇 나라가 희생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에 대한 위협입니다. 특히 종교 지도자들이 나서서 평화를 촉구하고 세계를 하나로 모아야 합니다. 생존하는 데 핵무기가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조은정 기자가 진행한 한국전쟁 참전용사 출신인 찰스 랭글 전 하원의원과의 인터뷰였습니다. 내일은 마지막 순서로 미국 내에서 한국전쟁을 기억하고 알리기 위한 노력들을 살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