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인권기구가 북한 내 인권 침해에 대한 책임규명 노력을 강화하기 위해 시민사회단체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시작했습니다. 단체들은 매우 고무적이라면서도 유엔이 예산 증액을 통해 실질적인 책임규명 작업을 지원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김영권 기자가 보도합니다.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 서울사무소(이하 서울 유엔 인권사무소)는 최근 북한 관련 시민사회단체들에 책임규명에 관한 설문지를 보내 협력을 요청했습니다.
VOA가 입수한 설문지를 보면 서울사무소는 “북한 내 인권 침해에 대한 책임규명 방안과 관련해 어떤 견해와 인식을 갖고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이해당사자의 의견을 청취해 유엔 인권최고대표의 북한 인권상황보고서에 반영하고 내년 3월 유엔 인권이사회에 제출할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총 16개 질문을 담은 설문지는 내용이 매우 구체적입니다.
가령 북한 내 심각한 인권 범죄 관련 책임규명에 대해 국제법상 실현가능한 방안은 무엇인지, 사법적·비사법적 책임규명 방안은 무엇인지 자세히 묻고 있습니다.
형사 소추 등 사법적 책임에 있어 인권을 탄압하는 북한의 고위급과 하위급 당국자들을 동등하게 혹은 다르게 취급해야 하는지 등 처벌 우선순위에 관한 질문도 있습니다.
또 가해자에 대한 민사소송 제기 의향, 시민법정, 진실위원회 등 진실규명 메커니즘이나 배상과 교육, 제도개혁 등 ‘회복적 사법 정의(restorative justice)’ 구현 노력에 관해서도 접근방식과 가능성 여부를 물었습니다.
‘회복적 사법’은 가해자 처벌만이 피해자를 위한 최선의 방안이란 기존 ‘응보적 사법론’과 달리 피해자에 대한 정신심리적 상처 치유, 가해자의 진정성 있는 사죄를 통한 관계 회복을 지향하는 사법적 정의를 의미합니다.
범죄를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관계 중심의 관점에서 보고 가해자와 피해자, 지역공동체가 해결·회복 과정에 적극 동참해 당사자가 원하는 회복이나 보상 또는 관계 회복이 이뤄지도록 돕는 과정입니다.
이런 책임규명 대상 범위에는 북한 정권이 자행하는 모든 반인도적 범죄가 포함됩니다.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는 홈페이지를 통해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가 최종 보고서에서 북한 내 반인도적 범죄를 규명한 뒤 이에 대한 책임규명 목적 등으로 서울사무소를 설치한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조사위원회가 명시한 반인도범죄 관련 책임규명 대상으로 ‘절멸, 살해, 노예화, 고문, 구금, 강간, 강제 낙태, 기타 형태의 성폭력, 정치·종교·인종·성별에 근거한 박해, 주민에 대한 강제 이주, 강제 실종, 고의로 장기간 굶주림을 초래한 비인도적 행위”를 명시하고 있습니다.
서울 유엔인권사무소는 이번 책임규명 설문의 의미와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가 올해 초 예고했던 강제실종 관련 보고서와의 연관성을 묻는 VOA의 질의에 “당분간 이에 관해 언급할 것이 없다”고 짤막하게 답했습니다.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는 지난 6월 발표한 ‘유엔인권보고서 2021’에서 ‘납치·강제실종’ 보고서를 올해 완료한다는 목표로 피해자 가족과 탈북민 등을 인터뷰했다고 소개했었습니다.
시민사회단체들은 VOA에 유엔 인권기구로부터 책임규명과 관련해 이렇게 구체적인 설문지를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밝혔습니다.
전환기정의워킹그룹(TJWG)의 신희석 법률분석관은 “서울사무소가 이런 자세한 설문을 하는 것 자체는 고무적”이라고 말했습니다.
신 분석관은 그러나 서울사무소가 이를 실질적으로 수행할 의지와 역량이 있는지에 관해선 단체들 사이에 의구심이 많다고 전했습니다.
[녹취: 신희석 법률분석관] “책임규명 하려면 조사해야 합니다. 조사관들이 탈북민들을 면담해 기록해야 하고 그것을 법률적으로 분석해 케이스 파일을 만들어야 하는데 지금 규모로 그것을 제대로 할 수 있는지. 지금 조사관이 2~3명 밖에 없는 것 같은데 그런 규모로는 택도 없죠. 인력이나 예산이 너무 부족하고요. 1년에 겨우 60~70명 정도 면담하는 것 같은데 그 정도로 제대로 책임규명을 할 수 있을지 솔직히 회의적이네요.”
북한인권정보센터의 윤여상 소장도 서울사무소의 요청에 협력할 뿐 책임규명 노력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는지 불투명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우선적으로 피해자 보호와 예방 조치를 하면서 책임규명 노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VOA가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의 지난해 예산 지출 명세 보고서를 검토한 결과 2021년의 총 예산 2억 2천 700만 달러 가운데 서울사무소의 정규 예산 지출은 91만 달러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또 이 가운데 94%인 85만 달러는 인건비로 지출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은 이 때문에 서울사무소가 단체들에 자료를 요청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100만 달러도 되지 않는 예산으론 제대로 된 조사와 기록 작업을 수행하기 힘들다며 유엔이 서울사무소에 대한 예산을 증액하고 한국 정부도 협력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VOA 뉴스 김영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