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방송 여기는 워싱턴입니다. 12월을 맞아 매주 금요일에 분야별로 올 한 해를 돌아보는 연말 특집을 보내드리고 있는데요. 오늘은 그 마지막 시간으로 올 한 해 국제 사회의 눈길을 끌었던 인물을 정리했습니다. 김정우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2022년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전격적으로 침공했습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이 전쟁을 ‘특별군사작전’으로 이름 붙였습니다.
[녹취: 블라디미르 러시아 대통령 2월 24일 TV 연설]
이번 전쟁이 우크라이나의 비무장화, 탈나치화를 목표로 한 ‘특별 군사작전’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는 격렬하게 저항했고, 미국과 EU를 비롯한 많은 나라가 러시아와 싸우는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고 있는데요. 이를 계기로 푸틴 대통령에게 다시 눈길이 쏠렸습니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 1999년 12월 31일 러시아 2대 대통령으로 취임했습니다. 그는 2004년 대통령 선거에 다시 출마해 연임에 성공합니다.
이후 그는 2008년에 임기가 끝났지만, 3 연임 제한 조항에 묶여서 대선에 다시 나올 수 없었는데요. 하지만 후임인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푸틴을 바로 총리로 임명했습니다.
총리직을 끝낸 푸틴은 2012년 대선에 이어 2018년 또다시 대통령 선거에 당선돼 지금 네 번째 임기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재직 기간 높은 지지율을 기록해온 푸틴 대통령은 하지만 언론과 정적을 탄압하는 등 권위주의적 통치 행태를 보여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 올해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일으켜 국제 사회의 ‘왕따’가 됐습니다.
일각에서는 푸틴 대통령에게 전범 혐의를 적용해야 한다고 촉구하는데요.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이 푸틴 대통령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눈길이 쏠리고 있습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전 세계의 이목을 끈 사람이 또 있습니다. 바로 자국 영토를 침범한 러시아군에 맞선 싸움을 이끄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입니다.
[녹취: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2월 25일 TV 연설]
젤렌스키 대통령은 전쟁이 발발한 뒤 연설에서 러시아에 결사 항전할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이후 그는 수시로 연설을 통해 군과 국민들을 격려하고 러시아에 대한 저항 의지를 북돋았습니다. 또 국제 사회의 지원을 끌어내 이를 바탕으로 끈질기게 러시아에 대항하고 있습니다.
올해 44세인 젤렌스키 대통령은 코미디언 출신입니다. 그는 2015년부터 3년 넘게 방영된 TV 연속극에 출연해 큰 인기를 끌었고, 결국 2019년 대통령에 당선됐습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취임 이후 친서방 정책을 펼쳤습니다. 특히 그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과 유럽연합(EU) 가입을 추진했습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번 전쟁을 계기로 국민적 영웅이 됐지만, 전쟁 전에는 지지율이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부패 척결에 미온적이라는 비판받았고, 일부 국민은 그가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맞서기에 너무 약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젤렌스키 대통령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남다른 지도력을 선보였는데요.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2022년 올해의 인물로 젤렌스키 대통령을 뽑기도 했습니다.
타임지는 이번 선정과 관련해 “우크라이나를 위한 전투가 희망으로 가득 차든, 두려움으로 가득 차든 젤렌스키 대통령은 우리가 수십 년 동안 보지 못한 방식으로 세계를 자극했다”고 평가했습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최근 중국에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최고 권력자 자리에 계속 남게 된 것입니다.
올해 열린 중국 공산당 제20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시 주석은 3 연임에 성공했습니다. 전례대로라면 두 번 임기를 지낸 시 주석은 내년에 물러나야 합니다.
하지만 중국은 지난 2018년 헌법 개정을 통해 주석 임기 제한을 철폐해 시 주석의 장기 집권 발판을 마련했고, 중국 공산당은 이번 전국대표대회에서 그의 3 연임을 확인했습니다.
[녹취: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당대회 연설]
시 주석은 당대회 대표 연설을 통해 지난 집권 기간 공산당이 이룩한 업적을 거론하고 다음 집권 기간 목표를 설명했습니다.
지난 1953년에 태어난 시진핑 주석은 공산당 혁명 원로인 시중쉰의 아들입니다.
그는 중국 문화대혁명 기간 지방으로 추방되는 등 고난을 겪었지만, 1974년 공산당에 입당할 수 있었습니다. 이어 칭화대학 화공과를 졸업하자마자 아버지 후광으로 당료와 관료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시 주석은 허베이성 정딩현 당 부서기를 시작으로 푸젠성, 저장성 등 지방 관리직을 거쳤고, 2007년 중국 최대 도시 상하이의 당서기가 됐습니다.
시 주석은 같은 해 열린 17차 당 대회에서 정치국원 자리를 건너뛰고 바로 상무위원으로 발탁됐습니다. 그는 이듬해 국가 부주석직에 올랐고, 2012년 11월에는 당 총서기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그리고 이듬해인 2013년 3월에 국가주석으로 선출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시진핑은 강력한 권력을 앞세워 ‘중국몽’을 달성하려 합니다. 중국몽은 사회주의 현대화와 최강국 만들기입니다.
“영국 국왕 찰스 3세”
지난 9월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서거하고 장남 찰스 왕세자가 왕위를 승계했습니다. 영국 역사상 최장수 군주였던 엘리자베스 2세가 서거하고 새 국왕이 등장함으로써 영국은 다양한 변화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녹취: 찰스 3세 영국 국왕 대국민 연설]
찰스 3세는 TV를 통해 방영된 첫 대국민 연설에서 서거한 어머니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업적을 강조하고 그의 유지를 따라 나라에 봉사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찰스 3세는 1948년 11월 14일,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필립공의 네 자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케임브리지대학을 졸업한 후 군에서 복무했고, 1981년 영국 귀족 가문 출신인 다이애나 스펜서와 결혼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윌리엄과 헨리, 두 아들이 생겼지만, 결혼 생활은 순탄하지 못했고, 결국 두 사람은 1996년에 전격적으로 이혼했습니다.
그리고 한 해 뒤인 1997년 다이애나비가 젊은 나이로 프랑스 파리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고 찰스 왕세자는 2005년 카밀라와 재혼하는데요. 이런 과정를 거치면서 찰스 왕세자에 대한 여론의 호감도가 크게 추락하기도 했습니다.
찰스 3세는 오랜 기간 왕세자로 지내면서 기후와 환경 문제에 특히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400개가 넘는 자선단체를 이끌거나 활동에 참여하는 등 다양한 문제에 관심을 나타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 시우바 브라질 대통령 당선인”
룰라가 돌아왔습니다. 브라질 최초의 노동자 출신 대통령이었던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가 정계에서 물러난 지 12년 만에 다시 대통령에 당선됐습니다.
이로써 룰라 당선자는 브라질 역사상 최초의 3선 대통령이자 최고령 대통령 당선인이라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그는 대통령 선거가 끝난 뒤 승리 연설에서 “오늘 우리는 세계에 ‘브라질이 돌아왔다’고, ‘브라질이 따돌림받는 신세로 전락할 수는 없는 큰 나라’라고 당당히 말하고 있다”고 역설했습니다.
[녹취: 룰라 브라질 대통령 당선인 승리 연설]
룰라의 대통령 복귀는 자이르 보우소나루 현 대통령 집권 기간 더욱 깊어진 분열과 경제 양극화, 그리고 국제 사회에서의 고립에 크게 실망한 유권자들이 변화에 대한 열망을 표현한 결과로 보입니다.
올해 77세인 룰라 당선인은 노동운동가 출신으로 노동자당(PT)을 만들었고 지난 2003년부터 2010년까지 대통령을 역임했습니다.
그는 80%라는 경이적인 지지율을 유지하며 퇴임했지만, 부패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고 수감됐습니다. 룰라 당선인은 1년 반 정도 교도소에 있었고 석방된 지 약 3년 만에 다시 대통령에 당선됐습니다.
룰라 당선인은 과거 대통령 재임 기간 복지 프로그램을 확대하고 최저임금을 올렸으며 경제를 성장시키고 무역을 확대했습니다. 이런 정책으로 수백만 명이 빈곤에서 벗어나고 중산층이 육성된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룰라 당선인은 선거 운동 중에 이전 재임 기간 동안 제시했던 것과 유사한 빈곤 퇴치 방안들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내일의 브라질에 보내는 서한’에서 “새 정부의 우선적 정책은 3천300만 명의 국민을 굶주림으로부터, 그리고 1억 명이 넘는 국민을 빈곤으로부터 해방하는 것이다”라고 강조했습니다.
네. 연말 특집, 오늘은 그 마지막 시간으로 올 한 해 국제 사회의 눈길을 끌었던 인물들을 살펴봤습니다. 김정우 기자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