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외교관과 무역 일군 등 고위급 인사들의 탈북이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북한 엘리트층의 연쇄 탈북 가능성이 주목되고 있습니다. 북한에 남은 가족 때문에 신분 공개를 꺼리고 침묵하던 과거와 달리 북한의 변화를 촉구하는 엘리트층 탈북민들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습니다. VOA가 20일 세계 난민의 날을 맞아 보내드리는 탈북 엘리트 관련 기획 보도, 오늘은 두 번째 순서로 자유세계에 정착한 탈북 엘리트들의 활동과 바람 등을 들어보겠습니다. 김영권 기자가 보도합니다.
지난 2016년 한국을 거쳐 미국에 망명한 북한 노동당 39호실 고위 관리 출신의 리정호 씨는 VOA에 요즘 그 어느 때보다 탈북을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딸인 이서현(리서현) 씨가 지난해 미 명문 아이비리그 소속 컬럼비아대 대학원에 진학한 데 이어 아들 이현승(리현승) 씨도 올해 같은 대학원에 합격해 다음 달부터 글로벌 리더십 공공행정학 석사 과정을 밟기 때문입니다.
리 씨는 자녀들이 명문대에 들어가서 기쁜 것보다는 미 주류사회에서 공부하고 인맥을 쌓으면서 “북한 주민들을 독재로부터 해방시키는 길을 향해 정진하고 있다는 것이 훨씬 더 흐뭇하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리정호 씨] “우리 가족은 항상 북한 인민들이 자유 속에서 하루빨리 해방되기를 바라고 그날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공부하는 목적도 자기의 지식을 쌓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향후 북한의 자유민주주의, 북한의 미래를 건설하는 주도적 역할, 역군이 되자는 장기적 목표가 있어서 공부하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진학하는 대학원에는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을 비롯해 여러 전직 고위관리와 영향력 있는 학자들이 포진해 있어 북한을 변화시킬 수 있는 통찰을 나눌 좋은 기회란 것입니다.
리 씨 가족은 미국에 정착한 이후 이례적으로 거의 온 가족이 북한의 인권과 민주주의 옹호 활동을 적극 펼치고 있습니다.
리 씨는 수시로 워싱턴의 전·현직 관리, 학자들을 만나 북한 지도부의 실체와 돈줄에 관한 실상, 제재 방안 등을 조언하고 있습니다.
두 자녀도 유엔 안보리 회의, 미한 정상회담 만찬, 미 의회 토론회 등 다양한 주류 행사에 초청돼 북한 주민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민간단체 글로벌피스파원데이션 연구원으로도 활동 중인 이현승 씨는 19일 VOA에 자신이 대학원에 진학하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중국과 이란 출신 인사들이 주류사회에 진출해 자국의 변화를 위해 적극 활동하는 것과 달리 워싱턴에 북한 출신은 사실상 전무하기 때문에 “새 길을 열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녹취: 이현승 씨] “북한 문제를 전 세계적으로 특히 미국에서 잘 제기하고 정책 제안을 하려면 본인 스스로 지식을 잘 갖춰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인과 국제사회의 기준에 맞는 정책을 조언하도록 내가 스스로 준비하고 그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앞으로 탈북하는 젊은 세대에 귀감이 될 수 있고 나아가 북한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국 유학 중 탈북해 한국에서 방송인, 소셜 인풀루언서 등으로 활동 중인 평양 엘리트 가정 출신 김금혁 씨는 19일 한국 국가보훈부 5급 사무관으로 첫 출근을 했습니다.
김 씨는 일부 탈북민이 통일부 7급 공무원으로 채용된 사례는 있지만 5급은 처음으로 알고 있다며, 한국에서 열심히 노력한 결과로 본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김금혁 씨] “(국회의원이나 조명철 전 통일교육원장 외에) 그런 사례는 없다고 해서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성공이라고 부르면 절대 안 되지만 그래도 자기 분야에서 자리를 잡고 열심히 성과를 내는 사람들의 소식이 좀 더 많이 북한에 전해져서 탈북을 고민하거나 동요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긍정적 시그널을 줬으면 좋겠습니다.”
한국 출신의 아내가 최근 아기를 출산해 겹경사를 맞았다는 김 씨는 지난 10여 년의 한국 생활 만족도를 점수로 환산하면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북한 엘리트라고 해서 한국 정부가 제공하는 혜택만을 의지한다면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녹취: 김금혁 씨] “점수로 획일화하는 것은 좀 무리일 수 있지만 굳이 한다면 100점 만점 중에 90점 이상을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느 사회이든 본인이 얼마나 좋은 마음으로 어떤 정신 상태에서 삶을 임하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북한이탈주민은 사실 혜택을 받습니다. 장학금, 집이라든가 국가에서 해결해 주는 부분이 상당하죠. 이런 혜택에 기대면 나중에 사라졌을 때 실망하게 되죠. 하지만 그런 어드벤티지를 자신의 무기로 만들어서 그것을 발판 삼아서 더 훌륭한 삶으로 나아가려는 사람들이 있었고…”
데이비드 맥스웰 아태전략센터 부대표와 수미 테리 우드로윌슨센터 아시아 프로그램 국장 등 미 전문가들은 앞서 VOA에 북한 엘리트들의 탈북과 성공적 삶은 김정은 위원장의 정당성을 훼손하고 북한 특권층에 대안적 삶을 선택할 수 있다는 신호를 준다고 평가했었습니다.
지난 2019년 한국에 망명한 류현우 전 쿠웨이트 주재 북한 대사대리는 요즘 자유롭게 인터넷을 사용하고 자기 생각을 거침없이 표현하는 자녀를 볼 때마다 한국에 잘 왔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고 말합니다.
자녀가 행복을 누리는 것이 부모에게는 가장 큰 기쁨이란 것입니다.
[녹취: 류현우 전 대사대리] “세계 어느 나라 사람들도 자기 자식이 잘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까? 그게 다 우리 부모가 바라는 심정이고. 저의 아이가 여기 와서 굉장히 행복해합니다. 이런 자유를 만끽하고 공부도 하고 싶은 만큼 마음껏 하고. 인터넷도 마음껏 볼 수 있고. 모든 게 다 열려있지 않습니까? 자식이 크는 것을 보면 아, 내가 정말 여기 잘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최근 국내 안팎으로 강연과 학술 교류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는 류 전 대사대리는 또 한국에 와서 역사에 대한 무지함 때문에 많이 부끄러웠다고 말합니다.
북한에서 “김씨 가족 우상숭배 교육에 매몰돼 세계 역사는 물론 한국 역사를 빛낸 인물들마저 너무 몰랐던 나 자신을 보면서 후회가 많다”는 것입니다.
류 전 대사대리는 이런 이유들 때문에 기회가 닿는대로 언론과 강연 행사 등을 통해 북한 엘리트들도 결국 고급 노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리려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류 전 대사대라] “내가 나아서 자란 조국 저 북한이란 땅은 김정은의 점유물이 아닙니다. 내 조국에는 2천 500만 북한 주민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국이 항상 변화길 바랍니다. 통일이 되기 전이라도 북한 주민들이 김정은의 세습 독재에서 벗어나 북한의 민주화가 하루빨리 깃들길 염원하는 마음에서 제가 목소리를 내는 겁니다.”
한국 내 북한 외교관 1호 망명자인 고영환 전 국가안보전략연구원 부원장은 1991년 한국에 도착해 겪었던 어려움을 담담하게 나눴습니다.
[녹취: 고영환 전 부원장] “처음에 와서 5~6년 동안은 멘탈이 거의 붕괴됐습니다. 죄책감 등 때문에 많아 좌절하고 힘들었죠.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그래도 내가 이 나라의 안보를 지키고 바른 대북정책을 펼치는 데 힘이 된다는 느끼게 됐습니다. 제가 가족에게는 죄를 저질렀지만 민족적 측면에서는 너무 거국적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옳은 선택을 한 것이다.”
은퇴 후 적지 않은 정부 연금을 받으면서 방송인으로도 활발히 활동 중인 고 전 부원장은 “세월이 지나면서 북한에서 망명한 외교관들을 통해 숙청 등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동료 선후배 소식을 들으면서 한국에 온 것은 ‘신의 한 수’였다는 생각을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북한의 노동당 간부들도 자신의 인생에 대해 한 번 자문해 봤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고영환 전 부원장] “아 이게 결국은 자녀들에게 좋은 교육 환경을 제공하고 훌륭한 미래를 보장해 주는 것. 인생에 대해 생각을 다시 깊이 해 봤으면 좋겠어요. 내가 대대로 노예처럼 삶을 이어가는 게 맞는 것인지 아니면 아이들에게 밝은 미래를 만들어 주고 건강하게 살고. 결단의 순간이 괴롭긴 하겠지만 나라나 민족이나 자기 자신이나 자기 가족을 위해서는 옳은 선택일 수 있다...”
하지만 한국 등 자유세계에 정착한 모든 탈북 엘리트가 성공적으로 정착한 것은 아닙니다.
탈북민 상황에 정통한 한국 정부 소식통은 17일 VOA에 “평양에서 제법 잘 살았는데 한국에서 사업에 실패해 해외 이민을 생각하는 탈북 엘리트 가정들도 있다”고 전했습니다.
또 다른 소식통은 “문재인 정부 시기에 한국에 망명한 고위 탈북민들은 과거처럼 국정원 산하 연구원, 국책 기관에 들어가거나 안보 강사 등으로 자유롭게 활동하지 못했다”면서 “궁여지책으로 편의점 등 자영업을 시작했다가 폐업하고 가정 파탄 위기에 놓인 사례들도 있었다”고 전했습니다.
북한 외교관 출신 김동수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자문연구위원은 이들 중 여러 명이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다행히 국가 연구 기관에 들어가 일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북한 엘리트뿐 아니라 어느 나라 엘리트들도 새로운 곳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10~20%는 도태하기 마련”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녹취: 김동수 위원] “그중 에서 낙오자가 되는 게 10%나 될까 말까 하고요. 나머지 엘리트들은 다 적응 잘합니다. 특히 IT 기술자들 지식인들이 과감하게 한국행을 결정하는 것은 내가 가서 지식 IT 기술로 얼마든지 돈벌이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어요.”
엘리트 출신 탈북민들은 또 자신들의 한국 국정원의 공작에 넘어가 망명했다는 주장이나 정부 당국이 엘리트들의 탈북 증가 추세를 공개적으로 알리는 것이 오히려 북한 지도부를 자극해 남북 관계를 더 악화시킬 수 있다는 일각의 지적에도 동의할 수 없다고 반박했습니다.
아무리 남한 정보당국의 공작이 있어도 탈북은 오롯이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며, 엘리트들이 한국과 미국에서 성공적으로 정착했다는 소식은 북한 고위층들에게 희망이지 절망적 소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리정호 씨는 북한 간부들도 결국 진정한 자유가 없는 ‘고급 노예’에 불과하다는 점을 여러 차례 강조했습니다.
[녹취: 리정호 씨] “엘리트들이 무슨 특권이 있나요? 자기 소유의 집이 있나, 자기 소유의 승용차가 있나? 엘리트라도 그저 노예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엘리트라고 배제하지 말고 그들도 우리와 한 편에 설 수 있게 미래에 대한 희망도 주고 안녕도 보장해 준다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보내야 합니다. 북한 체제를 김정은과 엘리트를 한 세트로 묶지 말고 명확히 분리해서 대응해야 합니다.”
청년 세대인 이현승 씨와 김금혁 씨는 북한 엘리트들에게 개혁개방은 특권의 상실이 아닌 새로운 기회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녹취: 이현승 씨] “(엘리트들은) 김정은 정권에서 받은 자산이 없습니다. 땅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정권에서 돈을 많이 받는 것도 아니고요. 오히려 개혁개방을 하면 중국처럼 본인들에게 더 많은 기회가 올 것입니다.”
[녹취: 김금혁 씨] “차근차근 기초를 쌓아 나가면 북한에서의 경험, 한국에서의 지식 등 여러 가지가 콤비네이션이 잘 이뤄지면서 아무도 갖지 못한 특별한 능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융합적인 지식을 갖춰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현승 씨와 김금혁 씨는 그러면서 반동사상문화개혁법 등 김씨 정권의 정보 통제에 굴복하지 말고 외부 정보로 탄탄하게 무장한다면 향후 북한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융합의 힘’을 갖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VOA 뉴스 김영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