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과 러시아가 밀착 행보를 보이면서 러시아 내 탈북민들의 상황이 상당히 악화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복수의 소식통은 러시아 파견 중 탈출한 북한인들에 대한 현지 경찰의 체포가 급증했다며 상황이 크게 변했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따라 그동안 순조롭게 진행되던 러시아 내 탈북민들의 한국행에도 적신호가 켜졌다는 우려가 나옵니다. 김영권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러시아가 옛 공산주의 시대로 회귀한 것 같다”
러시아에 정통한 한 소식통이 5일 러시아 지역 당국의 탈북민 관련 협조 공문을 VOA에 공유하며 한 말입니다.
이 협조 공문은 러시아 하바롭스크 경찰국이 러시아 내 유엔 난민기구(UNHCR) 파트너 변호사에게 보낸 것으로 지난 7월 8일 실종돼 수배령이 내려진 북한 유학생 김태성 씨에 관한 정보 제공을 요청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VOA가 단독 입수한 이 공문을 보면 경찰은 올해 26살의 북한 유학생 김 씨에 대해 러시아 형법 105조에 따라 살인 등 심각한 범죄가 저질러 졌을 수 있다며 그가 변호사에게 접근했는지 또는 주위에서 그를 돕는 단체가 있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소식통은 “유학생이 무슨 살인과 연관이 있겠냐”면서 그를 체포하기 위해 북한과 러시아 당국이 허위로 만든 혐의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지적했습니다.
러시아 경찰은 일부 언론 보도를 통해서도 알려진 이 북한 유학생을 계속 추적하고 있지만 여전히 실종 상태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2022년 노벨평화상을 공동 수상한 러시아 인권단체 ‘메모리얼’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5일 VOA에 “매우 걱정스러운 소식”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실종자가 살인 피해자일 수 있다고 언급한 것은 “속임수로 보이며 이는 더욱 부끄러운 일”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러시아 내 복수의 소식통은 이날 VOA에 최근 북한과 러시아의 밀착 행보가 이어지면서 러시아에 파견 또는 유학 중 탈출한 북한인들에 대한 러시아 경찰의 단속이 상당히 강화됐다고 전했습니다
북한 노동자들이 다수 파견된 러시아 동부의 한 소식통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특히 올해 초부터 (북한인 탈출자 관련)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말했습니다.
과거에는 북한인이 “튀어나와 숨어있는 경우 러시아 경찰은 다 알면서도, 또 위에서 공문을 받아도 불쌍하다며 잡지 않았지만 지금은 튀어나오면 무조건 잡아서 넘겨준다”고 설명했습니다.
[소식통] “국가적인 지시를 내려가지고 튀어 나와도 무조건 잡아요. 무조건 잡아서 무조건 넘겨주는 것으로 완전히 달라졌어요.”
이 소식통은 이 때문에 코로나 여파로 장기간 러시아에 체류하며 탈북을 고민하던 여러 파견 노동자들이 “크게 위축된 상황”이라고 전했습니다.
북한의 외화벌이 노동자 파견은 유엔 안보리의 대북 결의에 따라 전면 금지됐지만 러시아에는 여전히 많은 북한 노동자가 불법으로 일을 하고 있다고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위 전문가 패널과 미국 정부는 지적해 왔습니다.
국무부는 특히 지난 6월 발표한 연례 ‘2023 인신매매 실태 보고서’ 러시아 편에서 “러시아 정부가 북한의 해외 노동을 금지하는 유엔 안보리 결의를 회피하기 위해 2022년에 북한인에게 4천723건의 비자를 발급하거나 재발급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이는 전년(2021년)에 발급한 4천 93건과 비교해 630건이 더 증가한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러시아 내 탈북민을 돕는 단체들과 러시아에서 난민 지위를 받아 미국에 입국한 북한인들은 최근 상황에 큰 우려를 나타냈습니다.
러시아 내 탈북민 여러 명의 탈출을 지원했던 민간단체 ‘무궁화구조대’의 허강일 씨는 러시아가 중국을 닮아간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허강일 씨] “몇 달 전부터 이제는 중국처럼 되어가요. 그래서 러시아는 올해 하반기부터 (한국행이) 힘들 것 같습니다. 이젠 탈출하면 전국 수배령이 떨어져요. 전의 러시아 모자처럼요.”
실제로 러시아 연방수사위원회는 지난 6월 블라디보스토크 영사관을 탈출한 북한인 엄마와 아들에 대해 공개수사를 촉구하는 명령서를 홈페이지에 게재했고 이후 이들은 러시아 경찰에 체포돼 북한 측에 인도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허 씨는 또 모스크바에서 유엔 난민기구에 망명 신청을 한 뒤 대기 중이던 탈북민 두 명이 “북한 유학생이 실종된 직후인 지난 7월 말에 러시아 경찰에 체포돼 북한 측에 인도됐다”면서, 이는 과거에 없던 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러시아 파견 중 탈출한 뒤 난민 지위를 받아 미국에 입국한 탈북민들은 VOA에 과거와 다른 상황이 러시아에서 벌어지고 있다며 우려를 나타냈습니다.
지난 2010년 미국에 입국한 한동호(가명) 씨는 탈출한 러시아 내 파견노동자에게 살인 혐의 등을 씌어 체포하는 것은 대개 2000년 이전에 있었던 관행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한동호 씨] “나갔다 안 들어오는 놈들 잡을 때는 이제 꼭 살인자로 서류를 만들거든요. 그다음에 무조건 붙들어 내가야 한다면 무슨 엉뚱한 죄를 만들어서 서류를 만들어 경찰에 넣거든요. 그럼 경찰은 무조건 체포하죠. 그런데 지금 딱 그게 돌아왔네요.”
지난 2016년 역시 러시아에서 난민 지위를 받아 미국에 입국한 뒤 미 서부에 정착한 김국철(가명) 씨는 러시아 내 거주지에서 모스크바까지 먼 거리를 세 번 오가면서도 큰 두려움을 느끼지 못했다며 상황이 많이 달라진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김국철 씨] “내가 할 때는 아무 그런 거 없었어요 나는 000000란 도시에 살았는데 거기서 모스크바로 인터뷰하러 3번인가 올라갔거든요. 근데 그때만 해도 그런 거 한 번 더 못 느꼈어요. 이제 너무 심해지는 거죠.”
러시아 출신 탈북 난민들은 또 과거에는 러시아 경찰에 체포돼도 뇌물을 조금 주면 다 풀려났다며, 최근의 움직임은 과거와 분명 다르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런 분위기가 러시아에서 한국으로 가는 탈북민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관심사입니다.
러시아 내 탈북민들은 중국과 달리 현지 변호사들의 도움을 받아 모스크바 주재 유엔 난민기구(UNHCR)와 한국 대사관을 통해 올해 초까지 한국에 꾸준히 입국했었습니다.
이와 관련해 한 외교 소식통과 유엔 난민기구 관계자는 앞서 VOA에 이는 러시아 당국과 한국, 유엔의 3자 조율 속에 조용히 이뤄지는 것이라 확인하거나 공개할 사안이 아니라고 말했었습니다.
하지만 VOA가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한 결과 적어도 지난 2010년 이후 매년 평균 러시아 내 탈북민 20~30명이 유엔 난민기구의 도움을 받아 한국에 입국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특히 코로나 팬데믹 기간 중국 내 탈북민들의 입국이 사실상 중단돼 입국 규모가 대폭 줄었을 때 한국에 입국한 탈북민은 대부분 러시아 파견 북한 노동자들로, 2021년과 2022년 각각 입국한 남성 40명과 35명 중 대부분이 러시아 출신들로 알려졌습니다.
한 소식통은 올 상반기에 러시아 내 탈북민 5명 정도가 한국에 갔지만 하반기에는 장담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최근 북러 밀착으로 한국행 가능성이 불투명해지자 제3국으로 탈출해 한국행을 시도하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VOA의 취재 결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난해 2월 이후 러시아에서 제3국을 경유해 자유세계에 정착한 탈북민이 최소한 2명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워싱턴의 민간단체인 북한인권위원회(HRNK)의 그레그 스칼라튜 사무총장은 “현재 러시아 내 탈북민들의 상황은 악화하는 지정학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지난 수십 년간 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탈북 난민 강제북송과 비슷한 상황이 (러시아에서도) 발생하지 않을까 매우 걱정스럽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스칼라튜 총장] “I'm very afraid that we'll face a situation similar to what has been happening in China for decades that the forcible repatriation of North Korean refugees. I would not be surprised if the transit of North Korean refugees from Russia or through Russia to South Korea were halted at some point. So this will have unavoidable consequences for North Korean escapee.”
스칼라튜 총장은 최근의 북러 밀착을 볼 때 “러시아에서 또는 러시아를 통해 한국으로 가는 탈북민들의 이동이 언젠가는 중단된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것”이라며 이는 탈북민들에게 피할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것으로 보인다고 우려했습니다.
VOA 뉴스 김영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