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외교관으로 꼽히는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이 100세를 일기로 타계했습니다. 미국의 전직 관리들은 역사적 경험과 혜안을 가진 뛰어난 외교관이었으며, 북한 문제와 관련해선 중국의 역할을 강조했다고 회고했습니다. 안소영 기자가 보도합니다.
제56대 미국 국무장관을 역임하면서 중국의 개방과 미-소 긴장 완화를 이끌어내며 냉전 시대의 국제 질서를 재편했다고 평가받아 온 헨리 키신저 전 장관이 29일 별세했습니다.
키신저 전 장관의 국제정치 자문회사인 ‘키신저 어소시에이츠’는 이날 성명을 내고 그가 향년 100세를 일기로 미국 코네티컷주의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고 밝혔습니다.
하버드대학 국제정치학 교수를 지내다 1969년 리처드 닉슨 행정부 출범 당시 국가안보보좌관으로 발탁된 키신저 전 장관은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국무장관을 겸직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냉전 시기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이른바 ‘핑퐁외교’를 주도하며 1972년 닉슨 대통령과 마오쩌둥 중국 국가주석의 정상회담을 성사시킨 것이 주요 업적 중 하나로 평가됩니다.
또한 같은 해 미국과 구소련 간 전략무기제한 협정(SALT)을 이끌어 긴장 완화, 이른바 ‘데탕트’를 조성했습니다.
하지만 일각에선 냉전 시대 라이벌인 소련과의 군비 경쟁을 일으키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이어졌지만 키신저 전 장관은 이를 일축했습니다.
[녹취: 키신저 전 장관(1977년 퇴임 연설) “I do not believe that the Soviet Union is achieving military supremacy over the United States. I do not believe that any American administration would permit a situation to arise in which the Soviet Union could achieve strategic superiority over the United States.”
키신저 전 장관은 1977년 퇴임 연설에서 “미국의 어떤 행정부도 소련이 미국보다 전략적 우위를 점하는 상황을 허용하지 않을 것으로 믿는다”고 강조했습니다.
앞서 1973년엔 베트남전 종식에 기여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받았고, 이스라엘과 아랍국가 사이의 4차 중동전쟁이 발발했을 때에는 이들 국가를 오가며 휴전을 이끌어내 일명 ‘셔틀외교’라는 말이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이후 1977년 제럴드 포드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을 끝으로 퇴임했지만 이후에도 외교 자문 등 왕성한 활동을 이어왔습니다.
로버트 갈루치 전 미국 국무부 북핵 특사는 30일 VOA에 “헨리 키신저는 70년 동안 미국 외교 정책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다고 평가했습니다.
[갈루치 전 특사] “Henry Kissinger was a unique presence in American foreign policy for seventy years. For the next four decades, over both Democratic and Republican administrations, he was the ultimate sage advisor to successive presidents until his death at the age of 100. He was certainly a realist in his approach to international affairs, and was often criticized for his failure to take account of the ethical dimensions of policies he advocated, particularly their impact on human rights. Ultimately, he will be remembered for his consistent, insightful analyses of international affairs, from which he drew prescription for a US foreign policy that effectively protected the nation's security and interests.”
그러면서 “국제 문제에 대한 접근 방식에 있어 현실주의자로서 자신이 옹호하는 정책의 윤리적 측면, 특히 인권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기는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국제 문제에 대해 일관되고 통찰력 있는 분석으로 미국의 안보와 이익을 효과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미국 외교 정책의 처방을 이끌어낸 인물로 기억될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키신저 전 장관은 과거 칠레의 군사 쿠데타를 지원하고, 베트남 전쟁 중 베트콩 소탕을 위해 수많은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한 캄보디아 폭격을 승인해 전략적 이익을 인권보다 우선시했다는 비난도 받았습니다.
키신저 전 장관은 한반도 문제에도 깊이 관여했습니다.
트럼프 행정부 시절인 2018년 국가안보전략을 주제로 열린 상원 군사위 청문회에 출석해 북한의 비핵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전 세계적인 핵 확산 움직임이 일 수 있다고 경고한 바 있습니다.
[녹취: 키신저 전 장관] “I think that the denuclearization of North Korea must be a fundamental objective, and if it’s not achieved, we have to prepare for ourselves for the proliferation of weapons to other countries, which will create a new pattern of the international politics which will affect our concept of deterrence and our possibility of deterrence...”
특히 2005년 9.19 공동성명을 도출한 북핵 6자회담에 큰 관심을 갖고 조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당시 북핵 6자회담 미국측 수석대표를 역임한 크리스토퍼 힐 주세르비아 미국대사는 30일 VOA와의 통화에서 키신저 전 장관과 “다양한 여러 환경에서 일할 수 있는 영광을 누렸다”며 이같이 회고했습니다.
[녹취: 힐 대사] “I have the honor really of dealing with Doctor Kissinger and a number of different settings, and I must say, he followed the North Korean negotiations, the six party talks very closely. Dr. Kissinger was very interested in the idea that we could work with China on an issue of mutual interest. He always said we could get together with China and really have a common position, we could make progress with the North Korean. So he constantly asked me for updating of that idea, sometimes, when I had difficulty with people in the White House understanding what I was doing, I actually had the opportunity to ask him to call the President and explain what I was doing and he was very very engaged and helpful.”
키신저 전 장관은 미국이 중국과 상호 관심사에 대해 협력할 수 있다는 데 매우 관심이 많았고, 중국과 협력해 공통의 입장을 가질 수 있다면 북한과의 협상에서 진전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설명입니다.
힐 대사는 그러면서 키신저 전 장관이 관련 사안에 대한 아이디어를 계속 업데이트해 줄 것을 요청했고 자신이 (6자회담과 관련해) 하는 일을 백악관이 이해하지 못할 때는 키신저 전 장관이 직접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설명해 준 적이 있을 정도로 매우 적극적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로버트 랩슨 전 주한미국 대사대리는 키신저 전 장관은 한반도 문제에 있어 중국 역할론을 주장했다고 회고했습니다.
[랩슨 전 대사] “Kissinger was an active proponent of diplomatic engagement with the North on denuclearization, but on terms that addressed and advanced US interests. He also emphasized the necessity of working with China to find lasting solutions for the Peninsula.”
랩슨 전 대사대리는 키신저 전 장관이 비핵화를 위한 북한과의 외교적 관여를 적극적으로 지지했지만 미국의 국익에 부합하고 진전되는 조건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으며, 한반도의 항구적인 해결책을 찾기 위해 중국과 협력할 필요성을 강조했다고 설명했습니다.
미첼 리스 전 국무부 정책기획실장은 키신저 전 장관은 “당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외교관”으로 “역사와 철학에 대한 깊은 지식을 국제 정세에 접목했다”고 평가했습니다.
특히 1970년대 중반 한국과 북한의 유엔 동시 가입을 제안하며, 한국은 중국과 당시 소련이 승인하고 북한은 미국과 일본이 승인하도록 한 이른바 ‘교차승인’ 구상은 외교관으로서의 그의 통찰력을 엿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리스 전 실장] “I think that understanding the limitations of politics informed his approach to Northeast Asia and to supporting the ROK. The ROK is a crucial ally of the United States, but he also understood that the ROK could only join the United Nations if it had the support of Russia and China. So, I think he again understood what the goal was, as well as where the guardrails were.”
리스 전 실장은 “어린 시절 자치 독일과, 2차세계대전, 홀로코스트의 참상을 경험한 키신저 전 장관은 무엇보다 규범과 질서를 최우선시했다”고 강조하며 “한국인들은 역내 및 글로벌 균형이 깨지는 것을 막고자 했던 키신저 전 장관의 신념을 기억하길 바란다”고 덧붙였습니다.
한편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도 30일 성명을 내고 키신저 전 장관은 “국무장관으로서 또 국가안보보좌관으로서 역사에 남을 수많은 결정을 내렸다”고 회고했습니다.
[블링컨 국무장관 성명] “As Secretary of State and as National Security Advisor, Henry made countless history-bending decisions. To serve as America’s chief diplomat today is to move through a world that bears Henry’s lasting imprint – from the relationships he forged, to the tools he pioneered, to the architecture he built. Henry wrote that, ‘For any student, change is the law of life.’ A lifelong student, Henry anticipated and understood the forces changing our world, and helped us grapple with their implications. Even in his tenth decade, he was as determined to look to the future as he was to the past.”
이어 “오늘날 미국의 수석 외교관으로 일한다는 것은 키신저 전 국무장관이 구축한 관계와 도구, 설계 등에 이르기까지 그가 남긴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세계를 움직이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VOA 뉴스 안소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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