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선박이 국제해사기구(IMO)의 고유 번호를 감춘 채 변경 가능한 식별번호만을 발신하며 운항 중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과거 행적을 조회하기 어렵게 만들어 대북제재 위반 전력을 숨기려는 의도인지 주목됩니다. 함지하 기자가 보도합니다.
선박의 위치정보를 보여주는 ‘마린트래픽(MarineTraffic)’ 지도에 지난달 29일 중국 롄윈강항 인근 바다에서 대기 중인 선박 한 척이 포착됐습니다.
선박이 발신하는 선박자동식별장치(AIS) 정보에 ‘SP111’호로 표시되는 이 선박은 북한 깃발을 달았으며, 신호 발신 직후 사라져 6일 현재까지 위치가 파악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SP111호가 잠시나마 발신한 정보는 국제해사기구(IMO)의 선박 고유번호를 담지 않았습니다. 대신 언제든 변경할 수 있는 해상이동업무식별번호(MMSI)를 제공했는데, 마린트래픽도 이를 근거로 선박명을 파악했습니다.
국제해사기구(IMO)는 ‘해상에서의 인명 안전을 위한 국제협약(SOLAS)’을 통해 각 선박이 자국 해상을 벗어날 땐 IMO 번호를 의무적으로 발신하도록 했는데, SP111호가 이러한 규정을 어겼다는 의미입니다.
선박이 국제해사기구에 등록되는 시점에 부여되는 IMO 번호는 마치 한국의 주민등록번호처럼 선박의 소유주나 기국이 변경되더라도 그대로 유지됩니다.
반면 MMSI는 선박의 등록 국가가 부여하며 언제든 새 번호로 바꿀 수 있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에 따라 유엔 안보리와 유엔 회원국들은 처음에 정해지면 폐선 때까지 달고 다녀야 하는 IMO 번호로 북한 선박을 식별해 왔습니다.
만약 선박이 IMO 번호를 감춘다면 해당 선박이 제재 대상인지, 제재 위반 전력이 있는지 등을 조회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또 다른 북한 선박 SP7호도 MMSI 번호만을 발신하며 지난달 29일 일본 대마도 인근 해상을 항해하는 모습이 포착됐습니다. 북한 해역을 벗어나서도 IMO 번호를 외부로 공개하지 않은 채 운항을 계속한 것입니다.
아울러 북한 선박 TH호와 양각도7호, 66061호 등도 MMSI 번호만으로 운항한 흔적을 남겼습니다.
지난해 VOA는 마린트래픽 정보를 토대로 MMSI 번호만을 외부로 발신하는 북한 선박이 부쩍 늘었다고 전한 바 있는데, 올해에도 그런 추세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북한 선박이 현재 유효한 정보는 물론 과거 전력까지 연동되는 IMO 번호 대신 사실상 ‘신분 세탁’이 가능한 MMSI 정보만을 노출하는 이유는 국제사회의 제재 단속이 주로 IMO 번호를 근거로 이행되는 것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과거와 현재는 물론 미래의 불법 활동까지도 기록에 남기지 않을 회피 수단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날 북한 서해 해상에서 포착된 TH호의 MMSI 번호를 IMO의 국제통합해운정보시스템(GISIS)으로 조회해 보면, 공교롭게도 TH호와 이니셜이 같은 ‘태해’호가 검색됩니다.
언제든 변경할 수 있는 MMSI 번호만을 근거로 태해호와 TH호를 동일 선박으로 규정할 순 없지만, 최소한 이름이 다른 두 선박이 똑같은 MMSI 번호를 공유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태해호는 지난해까지 아시아 아너호로 운영됐던 선박이며, 이 아시아 아너호는 지난 2022년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위원회 전문가패널로부터 석탄을 불법 운송했다고 지적받은 바 있습니다.
아시아 아너호가 이런 행적을 지우기 위해 IMO 번호를 감춘 채 MMSI 번호만을 내세우는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될 만한 대목입니다.
앞서 선박 전문가인 우창해운의 이동근 대표는 VOA에 “정상적인 선박으로 국제 항행을 할 땐 두 가지 번호(IMO, MMSI)가 필수이지만, 이미 제재 대상 선박이거나 선박의 신분을 구태여 나타낼 필요가 없는 경우엔 이를 공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다만 IMO는 감추면서 굳이 MMSI를 공개한 데 대해선 “비상시 유일한 연락 수단이기 때문에 가동했을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VOA 뉴스 함지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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