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의 포성이 멈춘 지 70년이 넘었지만 이산가족들의 아픔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특히 남북한의 이산가족들은 지금까지 여러 차례 대면 상봉과 화상 상봉을 했지만 미국 내 한인 이산가족들은 기회조차 얻지 못했습니다. VOA는 한인 이산가족들의 아픔과 상봉 노력을 주도하는 선구자들, 미국 의회의 관련 입법 활동과 도전 과제 등을 조명하는 특별기획을 마련했습니다. 오늘은 두 번째 순서로 김영권 기자가 미국 내 이산가족 상봉 풀뿌리 운동을 주도한 선구자들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1990년대 중반 미 중서부 시카고 근교 한인 밀집 지역인 알바니 파크의 한 도서관에서 한인 이산가족의 존재를 알리며 정부를 상대로 상봉 캠페인을 펼치는 풀뿌리 운동이 시작됐습니다.
이곳의 도서관장으로 부임한 이차희 씨(현 재미이산가족상봉 추진위원회 사무총장)가 정부 기금을 받아 한국 관련 시청각 교재들을 대거 배치하자 많은 한인이 몰렸습니다. 그리고 그중 다수가 이산가족이었습니다.
자신도 북한에 아버지와 큰오빠가 있는 이산가족이었던 이 씨는 도서관을 찾은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교류하면서 이산의 아픔을 새롭게 보게 됐다고 회고합니다.
[녹취: 이차희 사무총장] “그전까지는 제가 아버님에 관해서 우리 어머니를 고생시킨 분이라고 그렇게 별로 아버지라는 느낌 없이 살았는데요. 그 아버님들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에 제가 느낀 것은… 제가 도서관에서 본 노인들이 저의 손을 잡고 (상봉을 도와 달라고) 관장님만 믿습니다. 우시던 그 노인들이. 그래서 아 우리 아버지도 이 사람들 중의 한 명이었구나.”
이 씨는 눈물을 글썽이던 이들을 돕기 위해 미국 내 한인 이산가족 관련 자료들을 검색했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당시 북미 지역에선 캐나다의 한인 전충림 씨 부부가 1980년에 설립한 ‘해외교포 이산가족찾기회’ 등 일부 친북 단체가 북한의 가족을 연결하는 비공식 브로커 활동을 했을 뿐 공식적으로 이산가족 상봉을 옹호하는 움직임은 없었습니다.
[녹취: 이차희 씨] “저희들이 이민 왔을 때는 우선 사는 것이 바빠서 이산가족, 북한의 이산가족들을 찾는다는 그게 없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저희에게 그 냉전 시대의 그 마음 때문에 미국 정부에 우리가 북한에 가족들이 있다는 것을 알리기를 꺼렸습니다.”
이 씨는 북한에 두고 온 가족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이산가족들을 보면서 자신이 직접 미국 주류사회의 문을 두드리기로 결심합니다.
[녹취: 이차희 사무총장] “우선 미국 주류 사회와 일을 시작하려니까 이산가족의 숫자가 필요했습니다. 그 다큐먼트가 아무 데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이산가족들 열다섯 명을 모아서... 각 주를 대강 한인 인구를 파악해서 저희들이 적어도 10만 명, 이건 상당히 보수적인 숫자였습니다.”
10만 명은 2000년 미국 인구조사 데이터와 한국의 이산가족 비율을 바탕으로 여러 전문가와 옹호자들이 당시 공통으로 추산한 수치입니다. 이후 미국 의회의 결의안과 입법 과정에서도 이 수치가 계속 인용됐지만 공식적인 집계는 아닙니다.
이산가족들은 VOA에 한국에 가족이나 재산 등 유대 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미국 이민을 선택하는 실향민들이 상대적으로 많았을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이차희 씨는 확보한 자료를 들고 자신들을 도와줄 정치인을 물색하다 적임자를 만납니다. 2000년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 처음 도전한 공화당의 마크 커크 후보였습니다.
[녹취: 이차희 사무총장] “(커크 후보의) 아버님이 6.25 참전용사이고 또 단 하나인 여동생이 한국 입양압니다. 그래서 저 사람 같으면 우리 사정을 이해하겠지. 우리를 위해서 일을 해주겠지.”
다행히 한인 유권자들의 지지가 필요했던 커크 후보는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고, 당선 뒤엔 이 씨 등 이산가족들을 워싱턴으로 초청해 2001년 국무부 청사에서 고위 관리들과의 만남을 주선합니다.
당시 커크 의원실에 따르면 이 씨 등 한인 대표단은 미국 내 이산가족의 실태와 아픔에 대해 브리핑했고 국무부는 북한과의 관계를 정상화할 때 이산가족 상봉을 주요 의제 가운데 하나로 다루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특히 그해 11월 하원, 이듬해 2월 상원에서 각각 이산가족 상봉 결의안이 미국 의회 역사상 처음으로 채택됩니다.
이어 2007년에는 미 하원에서 한인 이산가족들의 직접 상봉을 지지하는 의원들의 첫 모임인 ‘미국 하원 한인 이산가족위원회(Congressional commission on the Divided Families)가 공식 출범합니다.
이 위원회는 전년에 조직된 민간 ‘샘소리’ 프로젝트에 이산가족 목록 작성을 당부하고 법안 홍보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미국 상·하원은 2008년 12월 이산가족상봉법안을 국방수권법안에 포함시켜 처음으로 채택하고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이듬해 1월 이에 서명합니다.
이러한 빠른 진전은 미국 전역에 퍼져 살고 있는 이산가족들의 크고 작은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1976년 미국에 정착한 94세의 최창준 재미이산가족상봉추진위원회 남가주 회장도 그중 한 명입니다.
북한 개성 출신으로 한국전쟁에 한국군 육군 장교로 참전했던 최 회장은 1983년 서부 캘리포니아주에서 한인들을 위해 KBC TV를 설립한 뒤 이산가족 상봉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녹취: 최창준 회장] “딱 그때가 이산가족 상봉 찾기(‘이산가족을 찾습니다’) KBS에서 할 당시입니다. 그래서 눈물바다가 됐고 방송으로 그 누구나 보면 눈물 안 흘릴 수 없는 그런 장면입니다. 저도 사실 이북에서 나왔지만.”
최 회장은 이 프로그램에 영감을 받아 캘리포니아주에 사는 이산가족의 자료를 모으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많은 이산가족이 노령으로 눈을 감자 2000년대 초반부터 영상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신청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녹취 최창준 회장] “그 당시만 하더라도 자기 가족이 영상으로 녹화 되어 가지고 나가면 자기 가족이 혹시 이북에서 피해를 받지 않겠는가. 그런 것 때문에. 그렇고 지금 만날 수도 없는데 그거 해야 뭘 하느냐 이런 면도 없잖아 있었습니다.”
최 회장은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남가주이북도민연합회, 미수복지 경기도민회 소속 회원들과 지인들을 찾아가 설득해 20여 명의 영상을 제작했습니다.
[녹취: KBC-TV 이산가족 영상] “고향을 떠난 지가 59년 전. 17살에 떠나서 지금 78살인데 그동안의 내 동생 셋 모두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생사 불명입니다. 아직도 이북에서 고생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최 회장은 또 미국 의회에 이산가족 상봉 결의안과 법안이 상정되자 2006년부터 지역 의원들에게 지지를 촉구하는 서한을 보내고 ‘샘소리’ 프로젝트와 공동으로 영상 다큐멘터리 제작 지원에 나섰습니다.
[녹취: KBC-TV 이산가족 기자회견] “이렇게 미국 정부가 밀어주시고 그러면 만날 가능성이 있는 것 같아서 희망을 걸고 기다리겠습니다.”
이러한 선구자들의 노력과 미국 의회의 지원으로 미북 이산가족 상봉은 2011년 거의 성사 단계까지 갔었습니다.
당시 로버트 킹 국무부 북한인권특사와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이 평양과 뉴욕에서 각각 만난 뒤 미북 이산가족 상봉 시범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로 하고 미 적십자사를 통해 조용히 논의를 시작한 것입니다.
2008년 미국 내 12개 주의 한인 이산가족들과 재미이산가족상봉추진위원회(DFUSA)를 공식 설립한 뒤 상봉 행사를 촉구했던 이차희 사무총장은 모든 이산가족이 당시 큰 기대를 했었다고 회고합니다.
[녹취: 이차희 총장] “미 적십자사와 북한과의 협상이 시작됐을 때. 그러니까 첫 번째 협상이 시작됐을 때 이제는 되는 거로 알았습니다. 2011년 9월입니다.”
하지만 여러 이견으로 협상이 길어지다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그해 12월에 사망하면서 모든 대화와 접촉은 중단됐습니다.
이후 2012년 미국과 북한의 이른바 ‘윤년 합의’가 결렬되고 양측 사이의 긴장이 다시 고조되면서 미북 이산가족 상봉에 대한 희망은 동력을 잃었습니다.
일각에선 이산가족들이 하나로 뭉쳐 더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는 자성론도 나왔습니다.
유진벨 재단의 ‘샘소리’ 프로젝트를 버지니아주에서 적극 지원했던 이산가족 이승엽 씨입니다.
[녹취: 이승엽 씨] “미국 정부나 뭐 누구한테 탓할 것도 없고 우리 자신들이 제대로 하지 못한, 그게 첫째로 더 정말 아쉬움이 있는 거고. 우리들의 불찰이죠. 우리가 거기에 뒷받침도 못 하고 당사자들이 거기에 호응까지도 못 해주는 미숙한 점이 너무 아쉽고 지금은 후회가 됩니다.”
과거 킹 전 특사를 도와 미북 이산가족 상봉 협상에 관여했던 줄리 터너 국무부 북한인권특사가 지난해 취임하면서 이 사안에 다시 탄력이 붙고 있습니다.
터너 특사는 지난해 10월 취임 후 미북 이산가족 상봉이 자신의 5대 주요 목표 중 하나라고 강조한 뒤 이차희 총장과 최창준 회장 등을 국무부에 초청해 환담했습니다.
또한 최근까지 한인들이 다수 거주하는 LA, 시카고, 뉴욕 등을 방문해 거동이 불편한 이산가족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터너 특사는 VOA에 “이차희 사무총장과 최창준 회장을 비롯해 제가 만날 수 있었던 이산가족 공동체의 다른 많은 분께 무한한 존경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터너 특사] “I have the utmost respect for Chahee Lee Stanfield and Mr. Choi as well as many others within the divided families community that I've been able to meet with. They have endured so much in their lifetimes from experiencing the pain of separation to advocating for many, many years for the US government and for the international community to really, truly understand the imperative to act to bring about these reunifications.”
“이분들은 평생 이산의 아픔을 겪으며 많은 것을 감내했고, 미국 정부와 국제사회가 상봉을 위해 행동해야 한다는 절실함을 진정으로 이해하도록 오랜 세월 동안 옹호해 왔다”는 것입니다.
터너 특사는 그러면서 미국 정부와 의회, 생각이 같은 동맹국· 파트너들과 협력해 너무 늦기 전에 지속적인 상봉을 촉진할 수 있도록 최대한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미국 내 여론도 선구자들의 풀뿌리 운동 등으로 이산가족 상봉에 대해 좀 더 호의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미국 여론조사기관인 ‘해리스폴(The Harris Poll)이 지난해 1월 미국 성인 2천 6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조사 대상 미국인의 66%가 미주 한인 이산가족과 북한 내 가족과의 상봉을 위한 미북 협력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지난해 한국 통일부가 실시한 ‘북미지역 해외이산가족 실태조사’를 지원했던 최창준 회장은 80~90대 고령에도 불구하고 이산가족 다수가 여전히 가족의 생사 확인과 상봉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한국 통일부가 ‘남북이산가족찾기 시스템’에 등록한 북미 지역 이산가족 825명 가운데 146명을 대상으로 실시해 올해 2월 발표한 결과에 따르면 가장 선호한 희망은 서신이나 영상 편지 96%, 고향 방문 94.5%, 생사 확인 90%, 상봉 희망 84%로 나타났습니다.
이차희 사무총장은 최근에는 유언으로 자신의 재를 향후 북한의 고향 땅에 묻어 달라는 이산가족이 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최대의 적은 시간”이라고 말했습니다.
[녹취: 이차희 총장] “평생에 가슴에 한을 뭍고 무덤까지 갖고 가시는 분들이 이산가족들입니다. 시간이 이제 거의 다 끝났습니다. 저희는 마지막 커튼을 내려야 할 그런 시기입니다. 이제 그냥 1~2년 안으로 이제는 일이 끝날 것 같습니다.”
VOA 뉴스 김영권입니다.
아웃트로: VOA가 보내드리는 5부작 이산가족 특집방송, 내일 3부는 1세대로부터 바톤을 받은 다음 세대의 활동을 전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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