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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미국 제2대 대통령, 존 애덤스


[인물 아메리카] 미국 제2대 대통령, 존 애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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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미국이 있기까지 중요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인물 아메리카 시간입니다. 이 시간에는 미국 제2대 대통령 존 애덤스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존 애덤스는 1796년 대통령에 당선됐습니다. 두 번째가 된다는 것은 정치에서나 사회에서나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위대한 지도자로 추앙을 받던 첫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뒤를 이은 신생국의 두 번째 대통령 존 애덤스도 대통령직 수행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오늘의 미국이 있기까지 중요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인물 아메리카 시간입니다. 이 시간에는 미국 제2대 대통령 존 애덤스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존 애덤스는 1796년 대통령에 당선됐습니다. 두 번째가 된다는 것은 정치에서나 사회에서나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위대한 지도자로 추앙을 받던 첫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뒤를 이은 신생국의 두 번째 대통령 존 애덤스도 대통령직 수행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전임자의 명성으로 인한 어려움 외에 애덤스 자신의 성격도, 다른 사람들과 잘 화합하지 못해 더욱 어려웠습니다. 그는 걸핏하면 화를 내는 성격이기도 했습니다. 거기에다 그의 내각은 극도의 대립상태에 있었고, 부통령과도 자주 의견 대립을 겪었습니다. 그같은 상황은 당시 헌법에 들어있는 한 규정의 결과이기도 했습니다. 해당 헌법 조항은, 유권자들로부터 가장 많은 표를 얻는 사람이 대통령, 그리고 차점자가 부통령을 맡도록 돼 있었습니다.

이 조항은 처음 두 번의 선거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워싱턴이 대통령, 애덤스가 부통령이 됐습니다. 두 사람 다 같은 정당 소속이었고, 여러 면에서 같은 견해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796년 선거에서는 당이 다른 토마스 제퍼슨이 부통령이 됐습니다. 두 사람은 개인적으로는 친구였지만 정치적으로는 반대당 소속이었습니다. 애덤스는 강력한 연방제를 주장했습니다. 연방제는 기업가와 부자들의 이익을 보호하는 체제였습니다. 반면 제퍼슨 부통령은 연방정부의 기능을 제한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두 사람은 자주 충돌했습니다.

애덤스는 자신의 각료 임명에서 실패했다고 역사가들은 보고 있습니다. 애덤스는 워싱턴 내각의 인물들을 그대로 임명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는 나중에 애담스에 반대 입장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애덤스에게 특히 어려웠던 일은 외교정책의 위기였습니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후 영국은 프랑스에 반대하는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동맹이 됐습니다. 이들 나라는 프랑스에서와 같은 혁명이 자국에서도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애덤스는 미국이 영국과 프랑스 전쟁에 말려들지 않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프랑스는 미국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미국 선박을 나포함으로써 무역을 방해했습니다.

애덤스는 그 문제를 평화롭게 해결하려 애썼습니다. 그는 군사적인 위협을 가하면서 한편으로는 프랑스 관리들에게 외교관들을 보내 대화를 시도했습니다. 애덤스는 영예로운 평화를 추구했고, 시간이 걸렸지만 그것을 이루어냈습니다. 어떤 역사가는 그러나 유럽의 위기는 애덤스에게 끝없는 문제를 안겨주었다고 분석했습니다. 여러 해가 지난 후 애담스는 프랑스와의 평화를 이룬데 대해 왕관의 가장 큰 보석이었다고 기록했습니다.

애덤스가 대통령으로서는 많은 어려움을 겪은 정치인이었지만 다른 면에서는 성공적인 삶을 산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동북부 보스톤 시 외곽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농장주였고, 교회의 집사였습니다. 그는 지역의 유지였습니다. 아버지는 애덤스가 목사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애덤스는 하버드 대학에 들어갔고, 졸업 후에는 라틴 스쿨에서 잠시 교사로 일했습니다. 그러다 지역 변호사 밑에서 법을 공부한 다음 1758년 변호사가 됐습니다. 그의 나이 불과 23살 때였습니다. 애덤스는 보스톤에서 변호사 개업을 했지만 초기에는 고객이 없어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점차 매우 유능한 변호사로 소문이 났고, 보스톤에서 가장 잘나가는 변호사가 됐습니다. 그는 수입이 많아 매사추세츠 퀸시라는 곳에 아직도 남아있는 2층짜리 대저택도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애덤스는 1764년 애비게일 스미스와 결혼했습니다. 이웃 웨이머스에 사는 목사의 딸이었습니다. 애비게일은 공부를 많이 한 활달한 여성이었습니다. 애비게일은 남편의 긴 정치생애 내내 화를 잘 내는 남편을 진정시키고 자신감을 높여주는 정치적 동반자이기도 했습니다. 애덤스와 부인 애비게일은 그 당시 최고의 부부로 소문나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떨어져 있을 때면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습니다. 이들이 주고받은 편지는 아직도 천 통 이상이나 보존되고 있습니다. 이들 서신에서는 두 사람의 사상과 감정이 어려운 혁명의 시기에도 얼마나 진지한 것이었는지를 현대인들에게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노예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이 같았습니다. 당시 다른 여러 건국 가문에 비해 이들 부부는 노예를 소유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이 다른 인간을 소유한다는 제도에 대해 공공연하게 강한 비판을 가했습니다. 메사추세츠주는 1780년에 애덤스가 작성한 주 헌법에 따라 노예제를 폐지했습니다. 애덤스와 애비게일은 아메리카의 독립을 지지하는 열렬한 애국자들이었습니다. 미국의 역사 분석가들은 거의 모두 역대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 부인 중 애비게일을 10위권 이내로 평가하고 있고 어떤 평가서는 1위로 꼽기도 합니다.

존 애덤스는 혁명 지도자들과 함께 독립선언서 작성에 참여했습니다. 그중에는 토마스 제퍼슨도 있었습니다. 미국 독립전쟁이 막바지에 이르고 파리에서 영국과 독립협상을 벌이게 되었을 때, 그는 벤저민 프랭클린 등과 함께 협상대표로 참가해 1783년 영국으로부터 미국 독립의 승인을 받아냈습니다. 애덤스는 초대 조지 워싱턴 대통령의 후임으로 2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습니다. 경쟁자는 토마스 제퍼슨이었습니다.

대선에서 승리한 애덤스는 1797년 3월에 정식 취임했습니다. 그리고, 1800년 11월 부인 애비게일과 함께 워싱턴 디씨에 있는 관저로 들어왔습니다. 이로써 애덤스는 지금의 백악관에 입주한 첫 대통령이 됐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그곳에서 오래 살지는 못했습니다. 재선에 실패한 후인 1801년 3월에 백악관을 떠나야 했기 때문입니다.

1차 임기를 마친 애덤스 대통령은 재선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선거운동은 애덤스에게 많은 어려움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는 부통령이던 토마스 제퍼슨과 경쟁해야 했습니다. 그의 당은 두 파로 갈라졌습니다. 많은 연방당원들은 다른 후보를 지지했습니다. 일부 유권자들도 상설 군대의 창설이라든가, 세금 인상, 이민자들에 대한 권리 제한 등 애덤스의 결정들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외국인과 선동법, 즉 Alien and Sedition Acts는 이민자들에게 시민권을 받기 위한 대기 기간을 늘려놓았습니다.

이들 법은 전쟁이 벌어졌을 때 정부가 적대국 국적자들을 이유를 불문하고 구속할 수 있게 했습니다. 이 법은 또 외국 출신이 위험인물로 간주되면 대통령이 이들을 추방을 할 수 있게 했습니다. 대통령이나 의회를 비판하는 것도 범죄로 규정했습니다. 애덤스는 그런 법들이 프랑스를 지원하는 사람들을 표적으로 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많은 정치인들은 그 법이 정치적 반대파들을 겨냥한 것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역사가들은 그런 법들이 애덤스 자신의 정치 생명을 위한 것이라고 보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국 그 법은 애덤스의 이미지에 역효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런 법들은 연방법에 대한 또 다른 의문을 처음으로 제기했습니다. 즉 각 주가 이들 법에 동의하지 않을 때 연방법을 무시할 권한이 있는가였습니다. 부통령 토마스 제퍼슨의 선거운동 지지자들은 애덤스 대통령의 외국인과 선동법 승인을, 그를 공격하는데 이용했습니다. 즉 제퍼슨 지지자들은 애덤스 대통령이 대통령으로서의 권한을 지나치게 행사해 미국을 군주국가로 만들려 한다고 공격했습니다.

애덤스 선거운동원들은 제퍼슨이 나라에 혁명을 불러오려는 극단주의자라고 비난했습니다. 미국이 당시로서는 그때만큼 혼탁한 선거를 치른 적이 없었습니다. 선거결과는 제퍼슨의 승리였습니다. 애덤스는 그러나 그 결과를 순순히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는 매사추세츠 주에 있는 농장으로 돌아갔습니다. 애덤스는 은퇴 후 대부분의 시간을 저술로 보냈습니다. 심지어 정적이었지만 옛 친구인 토마스 제퍼슨과도 장문의 서신을 주고받으며 지냈습니다.

두 사람은 자신의 가족 이야기, 정치와 종교에 대한 철학, 나라의 역사에 관한 것 등 다양한 주제를 논의했습니다. 당시의 그 서신들은 두 사람 개인으로나 역사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애덤스와 제퍼슨은 새로운 나라를 건설한 마지막 남은 원조 애국자들이었습니다. 미국이 독립 50주년을 맞는 1826년 7월 4일, 두 친구와 애국자, 전직 대통령들은 불과 몇 시간 차이를 두고 같은 날 세상을 떠났습니다.

애덤스는 아메리카 혁명시대 가장 중요한 정치인 중 한 명이었지만 19세기 들어 그의 명성은 잠시 퇴색한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중반부터 그의 진가는 다시 평가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쓴 서신들을 분석한 현대의 전문가들은 그의 정직성, 예리한 언어들, 정치 사상가로서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부각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외교정책에서도 당시로서는 매우 현실적인 감각을 갖고 있었으며, 미국 건국 과정에서 역사상 가장 애국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가문의 일원이라는 점 등이 재발견된 것입니다.

1825년 미국에는 같은 이름의 대통령이 또 한 사람 등장했습니다. 제 6대 대통령 존 애덤스였습니다. 6대 애덤스는 2대 애덤스의 아들이었습니다. 이로써 두 사람은 미국 역사상 최초의 부자 대통령이 됐습니다.

인물 아메리카 이 시간에는 미국 제2대 대통령 존 애덤스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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