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한국 대통령이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한반도 종전 선언 카드를 거듭 꺼내든 것은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불씨를 살려보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라는 분석입니다. 하지만 미-북 관계가 장기 교착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실현 가능성에 대해선 회의적인 전망들이 많습니다. 서울에서 김환용 기자가 보도합니다.
문재인 한국 대통령이 유엔총회에서 한반도 종전 선언의 필요성을 제기한 것은 지난 2018년 유엔총회 이후 2년만입니다.
종전 선언은 2018년 연이어 열린 남북정상회담과 6.12 싱가포르 미-북 정상회담 등 비핵화 협상에서 주요 의제로 다뤄졌지만 아직까지 결론을 내리지 못한 상태입니다.
남북 정상은 4.27 판문점 선언을 통해 종전 선언에 대한 공감대를 확인하고 이어지는 6.12 미-북 첫 정상회담에선 북한의 비핵화 조치에 대한 미국의 상응 조치로서 종전 선언이 제시됐습니다.
하지만 지난해 2월 미-북 하노이 정상회담이 결렬된 이후 미-북 관계가 교착 상태에 빠졌고 관련 논의도 사라졌습니다.
한국의 전문가들은 미-북 관계에 별다른 진전이 없는 상황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또다시 종전 선언 카드를 꺼낸 것은 유엔이라는 국제무대를 통해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불씨를 살려보려는 의지를 천명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문재인 정부가 집권 하반기를 맞았다는 점, 그리고 오는 11월 미국 대선 이후 국제정세의 불확실성 등을 감안해 미국과 남북한 간 대화 모멘텀을 회복하기 위한 적극적인 제안의 필요성이 컸으리라는 관측입니다.
하지만 종전 선언의 의미를 놓고 당사국들 사이에서 서로 다른 입장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실현 가능성에 대해선 회의적인 전망들이 많습니다.
한국 정부 산하 국책연구기관인 통일연구원 조한범 박사는 문재인 정부는 종전 선언을 구속력이 있는 평화협정과 분리된 정치적 선언 정도로 접근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조한범 박사] “문재인 정부의 종전 선언은 원래 평화협정에서 분리해서 북-미 관계, 남북관계, 비핵화 모든 것을 들어가는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입구로 생각했던 게 종전 선언이었어요.”
실제로 문 대통령은 이번 유엔 연설에서 “종전 선언이 한반도에서 비핵화와 함께 항구적 평화체제의 길을 여는 문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종전 선언이 비핵화 여정을 위한 ‘입구’라는 인식을 확인한 겁니다.
김형석 전 한국 통일부 차관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종전 선언에 긍정적인 발언을 한 적이 있었지만 미국 내 주류는 종전 선언을 평화협정과 분리하기 어려운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김 전 차관은 종전 선언에 섣불리 응할 경우 북한에 주한미군 철수나 미-한 합동훈련 중단 주장의 빌미를 줄 수 있고 이는 인도태평양 전략 차원에서 미국으로선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설명했습니다.
[녹취: 김형석 전 차관] “이것 자체를 단순히 선언만 해선 안되고 평화협정으로 가기 위한 중요 요소이기 때문에 그렇다면 평화협정이 되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북한의 위해적 요소가 사라져야 되고, 당면한 핵 문제를 비롯해서 북한의 여러가지 안보에 위협되는 게 제거돼야 한다. 그러면서 여러 가지 북한이 정상국가로 가야되는 걸 요구하는 그런 쪽으로 전선이 넓혀져 버린 거죠.”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북한의 종전 선언에 대한 태도도 냉담하게 바뀌었습니다.
김명길 북한 외부성 순회대사는 스톡홀름 미-북 실무 협상이 별 성과없이 끝난 지 한 달 뒤인 지난해 11월 담화에서 북한의 생존권과 발전권을 저해하는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 철회를 촉구하면서 순간에 휴지장으로 변할 수 있는 종전 선언 같은 부차적인 문제들은 협상 대상이 아니라고 못을 박기도 했습니다.
박원곤 한동대 국제지역학과 교수는 문 대통령의 종전 선언 언급은
미국이 이를 선제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북한을 다시 한 번 비핵화 테이블로 끌어내자는 제안으로 이해된다며, 하지만 미국은 물론 북한 조차 셈법이 다르다고 지적했습니다.
[녹취: 박원곤 교수] “실질적으로 하노이에서 보여준 것을 보면 종전 선언은 선언적 의미니까 북한은 그런 건 필요없이 자신들에게 필요한 실질 조치를 취해라, 그런 입장으로 선회한 것으로 보이고요. 그렇다면 지금 이 시점에서 북한이 발전권과 생존권까지 제기하면서 훨씬 더 문턱을 높여놨는데 종전 선언에 만족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생각을 하고….”
전문가들은 이와 함께 문 대통령이 이번 연설에서 따로 제안한 동북아방역협력 협의체에 대해 북한과의 관계 복원을 염두에 둔 측면이 강하다고 평가했습니다.
북한이 남북 대화와 협력 제안들을 철저히 외면하고 있지만 중국 등이 포함된 다자협력의 틀이라면 참가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게 한국 정부의 기대라는 겁니다.
통일연구원 조한범 박사입니다.
[녹취: 조한범 박사] “사실 북한도 지금 출구가 필요합니다. 외부 지원을 받지 말라는 취지의 발언을 김정은 위원장이 했지만 남포에 이미 2만5천t 러시아로부터의 밀 지원이 왔고요. 그렇기 때문에 북한도 절박한 상황입니다. 그리고 이게 인간안보의 방역이고 북한에게 절대로 정치적 부담이 발생하는 게 아니거든요. 최대의 수혜자가 될 수 있거든요. 왜냐하면 중국도 참여하는 거니까.”
김형석 전 차관은 그러나 해당 국가들 사이의 불편한 관계들을 감안했을 때 이 구상이 현실화하기 쉽지 않다는 견해를 밝혔습니다.
김 전 차관은 북한은 남북관계를 대적관계로 규정하고 자력갱생노선을 천명했고, 한-일 관계는 과거사 문제로 최악인 상황인데다, 중-일 관계도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미-중 갈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며, 협의체 추진 동력을 찾기 힘든 상태라고 진단했습니다.
서울에서 VOA뉴스 김환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