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분야에서 미국을 이끌어 가는 사람들을 만나보는 '인물 아메리카'. 오늘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자유와 평등을 위해 싸운 노예 출신 지도자 프레드릭 더글러스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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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드릭 더글러스는 민권 운동가이며 작가이고, 강력한 웅변가에다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고문이었습니다.
프레드릭 더글러스는 당시 노예들이 다 그랬던 것처럼 극심한 육체적 정신적 학대를 당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지식이야말로 자유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했고, 언젠가는 글을 읽을 수 있고 자유의 몸이 되는 날을 꿈꾸며 살았습니다.
정식 이름은 프레드릭 오거스터스 워싱턴 베일리(Frederick Augustus Washington Bailey)로 1818년 메릴랜드주 터카호라는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프레드릭 더글러스와 그의 어머니 해리엇 베일리는 에드워드 로이드 대령이라는 사람이 소유한 장원의 노예였습니다.
이들의 첫 번째 주인은 아론 앤서니라는 백인 대위였습니다. 프레드릭은 아버지가 백인이라는 것 외에는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안토니 대위가 바로 아버지였을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프레드릭은 어머니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했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 어머니 해리엇 베일리가 다른 장원으로 보내졌기 때문입니다. 두어 차례 엄마가 찾아온 적이 있었지만 프레드릭이 7살 때쯤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프레드릭은 그 후 할아버지 아이잭 베일리와 할머니 벳시 베일리 밑에서 자랐습니다. 프레드릭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그 지역의 다른 노예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었고 가정은 사랑이 있는 곳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흑인들에게는 가족이 서로 떨어지고 한 번 떨어지면 다시는 못 만나는 일이 보통이었습니다. 노예는 인간 대접을 받지 못했고 주인은 가축이나 물건처럼 노예를 사고팔았습니다. 프레드릭도 6살 때 조부모와 헤어져야 했습니다. 나중에 쓴 글에서 프레드릭은 자신의 일생 중 그날 집을 떠나야 했던 일이 가장 뼈 아픈 경험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1826년 프레드릭은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시에 있는 휴 올드라는 사람을 위해 일하도록 보내졌습니다. 올드의 부인 소피아는 프레드릭에게 매우 친절했습니다. 마치 자기 집 식구처럼 대했고 글도 가르쳤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매우 화를 내며 당장 그만두라고 명령했습니다.
당시 노예들에게는 교육이 금지돼 있었습니다. 백인들은 노예가 글을 읽을 줄 알면 반란을 일으키고 달아나 버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소피아는 글 가르치는 일을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프레드릭은 볼티모어에서 만난 백인 소년들로부터 계속 글을 배웠습니다.
어느 날 올디는 프레드릭을 에드워드 코베이라는 가난한 농부에게 보냈습니다. 소문난 폭군이었던 코베이는 걸핏하면 프레드릭을 구타했습니다. 견디다 못한 프레드릭은 1836년 탈출을 시도했으나 체포됐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본 주인 휴와 소피아 올드 집으로 보내졌습니다.
프레데릭은 거기서 애나 머리라는 흑인 여성을 만났습니다. 그는 다섯 살 연상인 애나와 사랑을 하게 됐습니다. 그때 머리는 노예 신분을 벗어나 파출부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머리는 돈을 모아 프레드릭에게 주어 기차를 타고 뉴욕시로 탈출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프레드릭 베일리는 뉴욕에 도착해 이름을 프레드릭 더글러스로 바꾸었습니다. 얼마 후 프레데릭은 애나 머리와 재회해 결혼했습니다.
1841년 프레드릭은 매사추세츠 낸터킷에서 열린 ‘Massachusetts Anti-Slavery Society’라는 노예 반대 단체의 회의에 참석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자리에서 노예 생활의 경험을 이야기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 회의의 대부분 노예 반대 운동가들은 백인이었습니다.
프레드릭은 굵고 강력한 목소리로 비참했던 경험을 털어놓았습니다. 청중은 그의 연설에 큰 충격과 함께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연설이 있은 후 매사추세츠 노예 반대 단체는 프레드릭에게 북부의 여러 주를 순회하면서 연설해주도록 요청했습니다. 프레드릭은 거듭 주인들이 노예들을 매일 구타하는 이야기, 굶주리는 이야기 등 잔인하고 억압적인 노예 생활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듣는 사람 중에는 상당수가 믿을 수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후 프레드릭은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글로 썼습니다. 그것이 바로 1845년에 발간된 ‘미국 노예 프레드릭 더글러스의 삶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프레드릭은 자신이 연설할 때 들려준 참혹한 이야기들이 사실이란 것을 증명하기 위해 책을 쓴 것이었습니다.
그 책은 즉각 베스트셀러가 됐고, 3년 동안 9번이나 새로 찍어 냈습니다. 책은 프랑스어와 독일어로 번역되어 유럽을 비롯한 각지에 퍼졌고 오늘날까지도 많이 읽히는 책이 됐습니다. 프레드릭 더글러스는 그 후에도 자신의 노예 시절에 대한 여러 권의 책을 펴냈습니다.
그는 감동적인 연설도 많이 했습니다. 1852년에는 뉴욕주 로체스터에서 열린 독립기념일 기념행사에서 연설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는 백인과 흑인에게 독립 기념일은 어떻게 다른가를 이야기했습니다.
“오늘의 행사는 7월 4일을 축하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날은 여러분의 나라, 정치적 자유의 생일입니다. 7월 4일은 여러분의 것입니다. 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축하할 수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의 7월 4일이 미국 노예에게는 무엇인가를 놓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말합니다. 흑인들에게는 매일 매일 겪는 그 무서운 차별과 벌을 1년 중 어느 날보다 뚜렷이 되새기는 날이 이날입니다. 미국 말고는 이 시간 세상의 어느 나라도 그 이상 충격적이고 피를 흘리는 죄악의 행위가 자행되는 곳은 없습니다.”
1861년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벌어졌습니다. 프레드릭은 흑인들에게도 북군에 들어가 노예해방전에 참전할 수 있도록 허용되기를 바랐습니다. 2년 후 흑인들도 군에 들어갈 수 있게 됐습니다.
1865년 북군이 승리하면서 남북 전쟁이 끝났습니다. 프레드릭 더글러스는 그 후 워싱턴 D.C.의 경찰서장을 포함한 여러 정부 요직을 맡았습니다. 그러는 동안에도 프레드릭은 인간의 평등을 위한 싸움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역사가들은 프레드릭 더글러스가 2천 회가 넘는 연설과 함께, 수천 건의 글과 편지를 썼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의 투쟁 가운데는 여성의 권리도 포함돼 있습니다. 1895년 2월 20일, 그는 전국 여성회의에서 연설했습니다. 그날 오후 프레드릭 더글러스는 워싱턴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가 심장마비로 숨을 거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