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범한 지 석 달이 된 윤석열 한국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북한의 비난이 거세지고 있습니다. 남북관계가 ‘강대강’ 국면에 돌입했다는 관측이 나오는 가운데 일각에선 북한이 한반도 긴장을 전략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대남 도발에 나설 가능성을 점치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김환용 기자가 보도합니다.
박진 한국 외교부 장관은 지난 5일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열린 아세안 지역안보포럼(ARF) 외교장관 회의에서 윤석열 정부의 대북정책 로드맵인 ‘담대한 계획’을 소개했습니다.
‘담대한 계획’은 북한의 비핵화 조치에 상응해 단계적으로 경제 지원을 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국 정부가 현재 구체적인 방안들을 만들고 있고 관련국들과의 협의도 진행 중입니다.
하지만 북한은 7일 대외용 매체 ‘통일신보’를 통해 “10여 년 전 휴짓조각이 된 이명박 역도의 ‘비핵 개방 3천’을 적당히 손질했다”며 공개적으로 ‘담대한 계획’을 비판했습니다.
이명박 정부에서 추진했던 ‘비핵 개방 3천’ 정책은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개방하면 1인당 주민소득을 3천 달러까지 올려주겠다는 내용으로 ‘담대한 계획’과 유사합니다.
9일엔 북한 선전매체 ‘메아리’가 최근 한국 통일부가 발표한 대북정책 추진 방향을 두고 “공화국을 주적으로 여기며 맞서려는 윤석열 역적패당의 흉심이 드러나고 있다”고 비난했습니다.
또 다른 선전매체인 ‘우리민족끼리’는 같은 날 한국 외교부가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밝힌 외교정책에 대해 친미 친일 일변도의 사대외교 굴종외교, 나아가서 한반도 긴장을 격화시키는 전쟁외교라고 헐뜯었습니다.
한국 내 북한전문가들은 지난 5월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이후 한동안 추이를 지켜보던 북한이 윤석열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판단을 마치고 비난의 포문을 열기 시작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는 지난달 말 북한이 ‘전승절’이라고 부르는 한국전쟁 휴전협정일을 기념해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연설을 통해 윤석열 대통령 실명을 거론하며 노골적으로 대남 비난에 나선 게 변곡점이 됐다는 분석입니다.
한국 정부 산하 국책연구기관인 통일연구원 홍민 북한연구실장입니다.
[녹취: 홍민 실장] “한국의 대북정책과 향후 행보에 대해서 북한 나름대로의 평가와 전망을 이미 갖게 된 것이고 한국 역시도 최근 김정은 위원장의 전승절 연설 등을 봤을 때 ‘강대강’ 반응하면서 올 것이라는 것을 한국도 예상할 수밖에 없는 상황, 그래서 향후 어떻게 나올지에 대한 일종의 견적을 어느 정도 갖게 됐고 그 내용은 어쨌든 ‘강대강’으로 서로 비방하는 그런 국면으로 돌입했다.”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는 오는 15일 광복절을 계기로 윤석열 정부가 ‘담대한 계획’의 구체적인 내용을 발표할 계획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박 교수는 ‘담대한 계획’에 대해 북한에 경제적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체제 안전을 보장함으로써 핵을 포기하게 만들겠다는 구상으로 알고 있다며 북한은 이미 자신들의 핵 보유를 체제 안전이나 경제 지원과 맞바꿀 성질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 왔다는 점에서 호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또 북한의 선 비핵화와 상호주의를 표방하는 윤석열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해 북한의 반발이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박 교수는 현 시점에서 북한의 1차적 관심은 사실상의 핵 보유국 지위를 확보하기 위한 대미 줄다리기에 있기 때문에 그만큼 남북관계는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습니다.
[녹취: 박원곤 교수] “대남관계에서 한 발이라도 밀릴 생각은 안 할 겁니다. 윤석열 정부가 대북정책을 담대한 계획이라는 이름으로 발표를 하면 한국의 제안에 대해서 응할 가능성은 없고 오히려 자신들이 주도권을 갖고 한국이 거기에 따라 오도록 하는 형태로 역제안과 요구를 해 갈 가능성이 있죠.”
북한의 한국 무시전략은 최근 아세안 외교무대에서도 드러났다는 관측입니다.
한국 외교부 등에 따르면 박진 외교부 장관은 최근 프놈펜에서 열린 ARF와 동남아시아국가연합 즉 아세안 관련 외교장관 회의에서 북한의 안광일 주아세안대표부 대사 겸 주인도네시아 대사와 조우했습니다.
박 장관은 안 대사에게 “최선희 외무상이 새로 취임했는데 축하 인사를 전해달라, 최 외무상과 만나길 기대한다”며 “조건 없는 남북대화가 필요하다”고 의중을 내비쳤습니다.
그러나 안 대사는 “여건 조성이 먼저”라는 취지로 대응했고 이후 안 대사는 한국 취재진과 마주친 자리에서 “박 장관을 만난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가 취재진이 함께 찍힌 사진을 제시하자 “아무 말도 안 했고 만날 생각도 없다”고 평가절하했습니다.
통일연구원 조한범 선임연구위원은 북한의 이런 윤석열 정부에 대한 태도는 지난달 22일 통일부의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윤 대통령의 헌법 3조 언급이 큰 영향을 줬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윤 대통령은 업무보고 자리에서 권영세 장관에게 “통일부는 헌법 제3조와 제4조를 실현하고 구체화하기 위한 부처라는 인식을 명확히 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헌법 3조는 ‘대한민국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는 내용으로, 한국 정부가 사실상 한반도에서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규정했습니다.
김형석 전 한국 통일부 차관은 북한이 남북대화에 나설지 여부엔 한국 정부의 이념적 성향이나 정책도 중요하지만 북한이 처한 상황이 더 큰 변수로 작용하기도 한다고 말했습니다.
김 전 차관은 미중 미러 갈등 심화에 따른 진영 구도 속에서 미-한 글로벌 동맹 강화 흐름이 북한으로 하여금 중러와의 밀착에 집착하도록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다고 진단했습니다.
[녹취: 김형석 전 차관] “북한 스스로의 판단은 자기들이 중국 러시아의 입장에 딱 부합해서 행동을 하듯이 대한민국도 미국의 입장에 부합해서 행동을 한다, 그러면 이런 상태에서 대화와 협력을 해봐야 실익이 없다고 지금 판단을 하는 거죠.”
북한의 대남 전략이 무시전략을 넘어 모종의 도발로 나타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조한범 선임연구위원은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로 모라토리엄을 깨는 등 미국을 겨냥한 무력시위를 벌였지만 소기의 성과를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약한 고리로 여기는 한국을 압박해 한반도 긴장을 높이는 전략을 구사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조한범 선임연구위원] “원점이 확인되면 한국 군의 대응이 있을 수밖에 없고요. 한미가 대응하기 어려운 수준의 도발 그러니까 개성공단의 특정 시설 폭파나 폐기나 아니면 NLL이나 MDL에서 원점을 알 수 없는 그러니까 목함지뢰 도발 같은 그런 도발의 가능성은 상당히 높고요.”
조 선임연구위원은 도발 시기와 관련해선 미한 연합훈련이 끝난 이후인 다음달이 유력하다고 예상했습니다.
서울에서 VOA 뉴스 김환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