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부실 대출 책임 명시' 대부법 제정..."경제난 속 민간자금 국영은행에 유인하려는 조치"

지난달 5일 북한 평양 5월1일경기장에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결정을 관철하기 위한 궐기대회가 진행되고 있다. (자료사진)

북한이 이달 초 대부법을 제정해 취약한 금융체계 전반을 손질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극심한 경제난과 빈약한 국가 재정 상황에서 민간 자금과 외국인 투자를 국가가 통제하는 금융시스템으로 유인하기 위한 조치라는 분석입니다. 서울에서 김환용 기자가 보도합니다.

북한은 지난 2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제14기 제24차 전원회의에서 대부법을 채택했습니다.

북한 대외선전매체인 ‘조선의 오늘’은 13일 이 법의 구체적인 내용을 소개했습니다.

이 매체는 “대부사업에서 제도와 질서를 세워 경제건설과 인민생활 향상에 필요한 자금을 원만히 보장하는 데 이바지하기 위해” 28개 조문으로 된 대부법이 새로 채택됐다고 밝혔습니다.

법 조문 가운데 제6조부터 11조까지는 은행의 대부 원천은 중앙은행 또는 다른 은행으로부터 받은 대부, 예금 등이며 대부는 대부 수요자가 거래하는 은행을 통해 받는다는 등의 내용을 명시했습니다.

17조부터 19조는 대부금을 상환하지 못한 차입자와 보증자에 대해 은행이 취할 조치들을 밝혔습니다.

대부금을 상환하지 못하는 경우 은행이 대부계약 문건에 밝힌 담보 재산을 처분할 수 있다고 명시했습니다.

보증자에 대해선 차입자가 대부금을 상환하지 못하면 대부계약에서 정한 데 따라 자기가 보증한 금액을 대부금으로 상환하도록 했습니다.

대부법은 이와 함께 대부사업 과정에 재산상 손해를 발생시켰을 경우 책임 있는 당사자에게 손해보상과 위약금, 연체료 지불과 같은 민사적 책임을 지운다는 점과 법 위반 행위에 따르는 처벌 내용도 담았습니다.

북한은 앞서 지난 2006년 1월 대출 송금 환전 등 은행업무를 규정한 상업은행법을 채택한 바 있습니다.

상업은행법 제정은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으로 북한 당국의 재정이 무너지면서 일반 주민은 물론 공장과 기업소들까지 신흥 부유층인 ‘돈주’의 불법 사금융에 의존하는 현상이 생기자 국가가 금융기능을 통제하기 위해 행한 조치였습니다.

전문가들은 대부법이 상업은행법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부실 대출 문제 등에 대한 대응책 등 국영 금융기관의 정상화 차원의 조치를 담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임을출 교수는 북한이 상업은행법을 개정한 게 아니고 대부법을 따로 떼서 제정한 것은 그만큼 은행 기능 정상화를 위해 해당 분야가 중요하다는 의미라고 말했습니다.

국제사회 대북 제재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사태 등으로 북한 내 자금 사정이 악화된 상황에서 주민들이 보유하고 있는 유휴 자금을 은행으로 유인하려면 적정한 예금 금리를 보장하기 위한 대출 관리는 기본일 수밖에 없다는 게 임 교수의 설명입니다.

[녹취: 임을출 교수] “대부법은 핵심이 결국 은행과 개인, 은행과 기업 간 대출 관계를 새롭게 정비했다, 그러니까 은행 정상화도 중요하지만 결국 대부와 관련된 법 질서를 제대로 세우는 게 중요하다는 거죠.”

차입자가 대부금을 갚지 않을 경우 담보재산을 처분한다든지 보증자의 책임을 명시한 게 대부법 제정 취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겁니다.

국가배급체제를 오래 경험한 북한에서 은행은 적정한 이자를 보장하는 금융기관 역할은 커녕 원금도 보장하지 못하는 불신의 대상이었습니다.

북한 주민들은 2009년 11월 실시된 화폐개혁이 실패하면서 힘들게 모은 재산이 휴짓조각이 되는 경험을 했습니다.

장마당 경제 비중이 커지면서 큰 돈을 모은 ‘돈주’ 계층이 형성됐지만 이들의 돈이 은행으로 흘러 들어갈 수 없는 구조입니다.

한국 정부 산하 국책연구기관인 통일연구원 조한범 박사는 북한은 장마당이 활성화돼도 국가 재정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단절된 구조라며, 이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대부법을 통해 국영 금융시스템을 강화하려는 의도라고 분석했습니다.

[녹취: 조한범 박사] “대부는 은행을 통해서 받는다는 대목을 확실히 집어넣은 것을 봐서, 지금 사실상 북한 은행은 국가기관이나 성간의 거래가 주요 업무이지 민간인들 중심의 금융은 거의 이뤄지지 않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민간에서 유통하고 있는 사금융 체계를 국가중심체계로 바꿈으로써 국가 재정에 효율성을 꾀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엿보입니다.”

탈북민 출신인 조충희 굿파머스 연구소장은 북한은 재정은 고갈되고 그나마 있는 민간의 유휴 자금은 갈 곳을 찾지 못해 경제와 민생 회복에 절실한 돈의 흐름이 막힌 상태라고 지적했습니다.

조 소장은 북한이 뒤늦게 대부법을 만든 것은 경제난에 대한 위기 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풀이했습니다.

[녹취: 조충희 소장] “이제 5개년 계획의 3년차이고 지금까지 경제 5개년 계획 목표들이 수행되지 못한 게 물론 코로나19 같은 외부적인 조건도 있지만 내부에서 충분히 유통될 수 있는 자금 흐름이 막혀 있는데 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대책으로서 이런 법을 만들지 않았나 이렇게 얘기할 수 있겠죠.”

대부법이 대외선전매체를 통해 자세하게 공개된 것은 이 법이 외자 유치를 의식해 제정됐음을 보여준다는 분석도 나옵니다.

조 소장은 북한 당국이 지난해 말부터 주민들에게 외국에 있는 친인척 심지어 한국으로 탈북한 가족에게 북한 투자를 권하라는 주문을 하고 있다며 외자 유치에 그만큼 신경을 쓰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조충희 소장] “제대로 정상화하려면 이게 외국 투자자들 돈도 북한에 들어갔을 때 안전하다는 것을 이 법을 통해서 보여주려는 게 많은 것 같아요.”

전문가들은 대부법 채택에 대해 대체로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문제는 북한 주민들의 국영 은행에 대한 강한 불신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임을출 교수는 돈주들 입장에서 보면 북한 당국이 안팎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 경제발전 5개년 계획을 명분으로 은행에 맡긴 돈을 묶어버릴 위험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서울에서 VOA 뉴스 김환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