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주요 뉴스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보는 ‘쉬운 뉴스, 흥미로운 소식: 뉴스 동서남북’ 입니다. 북한이 경제난과 코로나 사태로 그 어느 때 보다 조용한 `태양절’을 보냈습니다. 최원기 기자가 전해 드립니다.
평양의 노동당 청사에서 지난 11일 열린 정치국 회의 분위기는 그리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북한 관영 `조선중앙TV’가 이튿날 공개한 영상을 보면 회의 초반에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뭔가를 얘기하자 서열 2위와 3위인 최룡해와 박봉주가 급히 일어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김 위원장이 불만족스런 표정으로 뭔가를 얘기하자 최룡해가 두 손을 모으고 한참 서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한국의 강인덕 전 통일부 장관은 김정은 위원장이 간부들에게 경제 문제를 질책한 것같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강인덕 전 장관] ”경제발전 5개년 전략, 10대 전망이라는 것이 코로나로 인해 불가능하게 됐는데, 자기는 경제에 책임 안지고, 내각을 경제 문제의 총사령부라고 했으니까, 똑똑히 하라는 것 아닐까요.”
이날 정치국 회의에서는 코로나 전염병 문제와 함께 경제, 예산, 인사 문제가 논의됐습니다.
북한 관영 `노동신문’은 이 회의에서 지난해 12월 전원회의에서 결정된 ‘정면돌파전’ 과업을 조정, 변경하는 문제가 논의됐다고 보도했습니다. 그러니까, 북한 수뇌부는 4개월 전 자신들이 결정한 노선을 다시 뒤집어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겁니다.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인 윌리엄 브라운 조지타운대 교수는 경제난에 코로나 사태까지 겹쳐 북한이 상당한 어려움을 겪는 것같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윌리엄 브라운 교수]”Severe difficulty even without virus…”
이런 분위기는 12일 열린 최고인민회의에서도 계속 이어졌습니다.
북한은 이날 만수대의사당에서 열린 최고인민회의에서 국가예산에서 보건 부문 투자를 지난해보다 7.4% 늘렸습니다. 또 올해 전체 예산 지출의 47.8%를 경제 건설에 투입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문제의 핵심인 경제 구조와 정책을 바꾸지 않고 예산만 늘리는 것은 별 도움이 안된다고 지적합니다. 한국의 북한경제 전문가인 서울대 김병연 교수입니다.
[녹취: 김병연 교수] “근본적인 문제는 북한 경제 여건 또 경제구조로 볼 때 북한 정부가 취하고 있는 경제개발 정책 수단이라는 게 잘못돼 있다, 이런 문제가 근본적인 소위 기저질환이라고 볼 수 있고요.”
북한은 이번 최고인민회의에서 '재자원화법', '원격교육법', '제대군관(장교) 생활조건 보장법' 등 3개 법령을 제정했습니다.
‘재자원화’라는 것은 폐기물 수매 사업을 의미합니다. 한 마디로 공장이나 가정에서 고철, 파지, 폐비닐, 폐유리, 구리, 알루미늄. 신발 밑창에 이르기까지 모든 폐기물을 수거해 다시 쓸 수 있는 물건을 만들자는 겁니다.
이는 북한이 극심한 원부자재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는 얘기라고 강인덕 전 장관은 말했습니다.
‘제대군관 생활조건 보장법’은 오랜 군 복무를 마치고 사회에 나온 장교 출신 퇴역 군인들의 생활안정을 위한 법으로 보입니다.
북한에서 장마당을 비롯한 시장화가 확산되면서 오랫동안 군 생활을 한 군 장교 상당수가 사회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당장 생계가 곤란한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보입니다.
‘원격교육법’은 인터넷 시대에 맞는 교육을 의미하는데, 재원이 문제입니다. 북한에는 초등학교(소학교)가 4천800여개, 중학교가 4천600여개, 그리고 고등학교와 대학교가 480여개가 있습니다. 학생 수 만도 568만 명에 달합니다.
이 많은 학교와 학생을 대상으로 인터넷 원격교육을 하려면 엄청난 투자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번에 제정된 법령은 원격교육법 재원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는 일종의 생색을 내기 위한 법령이라고 강인덕 전 장관은 말했습니다.
[녹취: 강인덕 전 장관] ”이건 형식이죠, 남한에서는 코로나 때문에 전부 인터넷으로 교육을 하는데, 북한도 우리도 이런 것을 만들어 장래를 준비한다는 의미에서 원격교육법을 만든 것같아요.”
경제난에 코로나 사태까지 겹친 탓인지 북한은 `태양절’을 상당히 조용히 보냈습니다.
태양절을 전후해 열려 온 열병식과 축하공연, 그리고 중앙보고대회가 사라진 것은 물론 매년 개최했던 평양국제마라톤과 친선예술축전도 일찌감치 취소됐습니다.
김정은 위원장이 태양절까지 완성하라고 지시했던 원산갈마 해안관광지구도 완공이 안 된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김정은 위원장은 태양절인 15일 자신의 할아버지 김일성 주석의 시신이 있는 금수산태양궁전에 참배하지 않았습니다.
조선중앙통신’이 공개한 사진을 보면 최룡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비롯한 수 십 명의 간부들이 참배했는데 김정은 위원장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김 위원장이 2012년 집권 이후 `태양절’에 금수산태양궁전을 참배하지 않은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북한 관측통들은 북한 내부에 불만의 목소리가 조용히 쌓여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앞서 북한은 1월 말 전염병 유입을 막기 위해 중국과의 국경을 봉쇄했습니다. 이에 따라 북-중 물류 흐름이 끊어지면서 북한 전역의 400여개 장마당과 종합시장에서 쌀과 식용유같은 생활필수품 가격이 일제히 올랐습니다.
게다가 북한 당국은 주민들의 이동도 금지해 불만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북한 내 지인들과 정기적으로 전화통화를 하는 서울의 민간단체인 `NK 지식인연대’ 김흥광 대표가 유튜브에서 밝힌 내용입니다.
[녹취: 김흥광 대표] ”그들이 하는 얘기는 이렇습니다. 바이러스를 잡기 위해 국가가 정확한 방역대책을 세우면 되지 왜 이렇게 장사도 못하게 집에 딱 붙들어 두느냐, 나라에서 굶어죽지 않게 배급이라도 줘야지, 아무 것도 안 주고, 그럼 죽으란 얘기 아니냐…”
일부 전문가들은 북한 수뇌부가 조만간 대남 접근에 나설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북한은 `태양절’을 계기로 외교 라인을 정비했습니다. 또 한국에서는 집권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4.15 총선거에서 압승했습니다.
따라서 남북관계의 불확실성이 사라졌기 때문에 북한이 본격적으로 대남 접근에 나설 것이라고, 강인덕 전 장관은 말했습니다.
[녹취: 강인덕 전 장관] ”가능성이 충분히 있죠. 문재인 여당이 180석이나 확보 했으니까, 이제 마음대로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을 북한이 알고 있거든요, 그러나 금강산, 개성공단, 철도 연결 이런 것이 그렇게 쉬운 게 아니죠.”
앞서 김정은 위원장은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냈습니다.
업친데 덥친 겪으로 경제난에 겹친 코로나 사태로 `내우외환’을 겪는 북한이 실제로 한국 측과 대화의 물꼬를 트게 될지 주목됩니다.
VOA뉴스 최원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