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의 배경과 관련 용어를 설명해드리는 뉴스 따라잡기 시간입니다. 지난 2015년 이란과 주요 6개국이 체결한 ‘이란 핵 합의’가 이란 핵 과학자 암살이라는 새로운 암초를 만나 또다시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뉴스 따라잡기 오늘은 이란의 핵 개발 과정과 현황 살펴보겠습니다. 박영서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1950년대 시작된 이란의 핵 개발 노력”
이란이 핵 개발에 관심을 두고 처음 연구를 시작한 건 1950년대입니다. 당시 이란은 친미 성향의 모하마드 레자 팔레비 국왕이 통치하고 있을 때였는데요. 팔레비 국왕은 에너지 공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 아이젠하워 행정부와 협력하며 민간용 핵 개발, 원자력 연구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1967년, 이란에서 처음으로 미국이 제공한 실험용 원자로가 가동에 들어갑니다. 이를 계기로 이란은 이듬해인 1968년 ‘핵확산금지조약(NPT)’에 서명하고, 결코 핵무기로 전용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합니다. 이란 의회는 1970년 이를 비준했습니다.
1973년, 이란 정부는 원자력 문제를 전담할 ‘이란원자력기구’를 신설했습니다. 그러면서 서독의 한 원자력 회사와 테헤란 남쪽 ‘부셰르’ 단지에 경수로 2기 건설 계약도 합니다. 더불어 국내와 해외에서 과학자들을 양성하며 빠르게 핵기술을 습득하기에 이르렀는데요. 이 무렵부터 미국 조야에서는 이란이 핵기술을 무기용으로 전용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팔레비 왕조의 몰락과 이란 핵 문제 부상”
오늘날 이란 핵 문제의 시초는 1979년 이란에서 벌어진 이른바 이슬람 혁명과 맥을 같이 합니다.
이란은 이슬람 혁명으로 팔레비 왕조가 무너지고 이슬람 성직자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가 최고 권력을 잡으며 사실상 신정국가 체제로 전환하는데요. 그러면서 이란과 서방 국가들과의 관계가 악화합니다. 특히 미국과 이란은 1979년 발생한 이란 주재 미 대사관 인질 사건으로 파국을 맞았고, 외교 관계 단절과 함께 양국의 원자력 협력도 모두 중단됐습니다.
당초 호메이니는 핵 개발에는 큰 관심이 없었고 이로 인해 많은 이란의 핵 과학자들이 이란을 떠났습니다.
이런 가운데 이란은 1980년부터 이라크와 전쟁을 벌이게 되는데요. 1988년까지 계속된 이 전쟁은 이란이 핵무기 개발에 눈을 돌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습니다. 당시 사담 후세인 이라크 정권은 핵 개발을 추구했고, 이에 자극받은 호메이니도 중단했던 핵 프로그램을 비밀리에 재개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이란은 혁명 와중에 일방적으로 취소했던 부셰르 원자력 발전소 건설도 다시 추진합니다.
“이란의 비밀 핵 시설”
1990년대 들어와 국제사회에서는 이란이 비밀리에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을 거라는 의혹이 점점 더 커졌습니다. 이런 가운데 1996년 빌 클린턴 미 행정부는 이란과 거래하는 외국 기업들에 대한 제재를 단행하며 이란 압박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결국 2002년, 이란 반정부 단체의 폭로로 중부 나탄즈 지역에 비밀 우라늄 농축시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근 아라크 지역에 중수 생산공장이 있는 것도 드러났습니다.
국제사회의 강력한 비판 속에 이란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을 받는 데 동의합니다. 그리고 2003년 핵 개발 유예를 선언하는데요. 하지만 2005년, 반서방 강경파 마무드 아흐마디네자드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이란은 다시 평화적 목적이라고 주장하면서 핵 개발을 추진합니다. 국제사회는 이란의 핵 위협에 맞서, 유엔 안보리 대이란 제재 결의안을 통해 이란을 압박합니다.
“이란의 정권 교체와 핵 협상”
2013년 하산 로하니 이란 정부가 출범하면서 이란은 보수 강경파에서 중도파로 정권 교체가 이뤄집니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처음으로 이란과 이른바 ‘P5+1’ 즉, 유엔안보리 5개 상임이사국(미국 · 중국 · 러시아 · 영국 · 프랑스)과 독일이 이란 핵 문제에 대한 협상을 시작합니다.
큰 골자는 이란은 핵무기 전용 가능한 개발과 연구를 중단하고, 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을 받으며, 그 대가로 국제사회는 대이란 제재를 해제하고 이란의 경제 발전을 지원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을 비롯한 각국 정치권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지만, 오랜 진통 끝에 2015년 7월, 이란과 주요 6개국은 ‘포괄적공동행동계획(JCPOA)’, 이른바 ‘이란 핵 합의’ 타결에 성공합니다.
“트럼프 행정부 출범과 이란 핵 합의 위기”
우여곡절 끝에 도출한 이란 핵 합의는 그러나 3년도 채 못 돼 커다란 위기를 맞게 됩니다. 2018년,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가 일몰 조항 등을 문제 삼으며, 이란 핵 합의에서 전격 탈퇴했기 때문입니다. 이어 미국은 이란의 최대 자금줄인 원유 수출 경로를 차단하는 등 대이란 제재를 복원했습니다. 그러자 이란은 단계별로 이란 핵 합의 무력화에 나서며, 나머지 5개국에 합의 사항 이행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란의 핵 개발 현황”
‘이란 핵 합의’는 이란의 농축 우라늄 보유량을 202.8kg으로 제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란은 지난해 이미 이 제한을 어겼습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지난 11월 현재, 이란의 농축 우라늄 보유량이 2천442.9kg에 이른다고 보고했습니다.
우라늄 농축 순도는 핵무기 개발의 핵심 조건입니다. 이란 핵 합의는 이란의 우라늄 농축 정도를 3.67%의 저농축 수준으로 묶어 놓고 있습니다. 이란은 지난해 7월, 이 틀을 깬 이래 줄곧 4.5%대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란은 핵 합의 이전에는 농축 우라늄의 농도를 20%까지 끌어올렸는데요. 이란 의회에서는 핵 합의 이전 수준으로 되돌리자는 목소리가 꾸준히 나오고 있습니다.
이란 핵 합의는 또 우라늄 농축에 사용되는 원심분리기의 수와 종류도 제한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나탄즈 지하 시설에 있는 1세대, 구형 원심분리기 5천 기를 경제적 목적으로만 가동하도록 허용하고 있습니다. 또 지상에 있는 일부 고성능 원심분리기의 경우, 우라늄 농축은 금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란은 지난해 고성능 원심분리기의 가동을 시작했습니다. 핵 합의 이전, 이란은 약 1만9천 개의 원심분리기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이란 핵 합의는 또 ‘포르도 핵 단지’의 우라늄 농축 활동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중부 산악지대 지하에 있는 포르도 핵 단지는 지난 2009년 서방 정보당국에 의해 발각된 이란의 또 다른 비밀 핵 시설인데요. 현재 포르도 핵시설에는 1천44기의 1세대 원심분리기가 있습니다. 이곳의 원심분리기는 안정동위체 생산 등 다른 목적으로만 허용됩니다. 하지만 이란은 지난해 11월, 포르도 원심분리기에 우라늄 농축의 원료가 되는 육불화우라늄 기체를 주입하며 이란 핵 합의 이행에서 한 걸음 더 멀어진 상황입니다.
뉴스 속 인물: 재닛 옐런 재무장관 내정자
최근 뉴스의 화제 인물을 소개하는 ‘뉴스 속 인물 ‘시간입니다. 오늘 이 시간 주인공은 조 바이든 행정부의 첫 재무장관으로 내정된 재닛 옐런 전 연방준비제도 의장입니다.
12월 1일,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인이 새 정부 재무장관으로 재닛 옐런 전 연방준비제도 의장을 지명할 계획이라고 발표했습니다.
옐런 전 의장이 상원의 인준을 받게 되면 미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 재무장관이 탄생하게 됩니다.
바이든 당선인은 옐런 전 의장이 지금 미국이 맞고 있는 국가적 경제 위기를 극복할 최적의 인물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재닛 옐런 전 연준 의장은 1946년생으로 올해 74살입니다.
미국 뉴욕의 브루클린에서 폴란드계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의사였고 어머니는 초등학교 교사 출신입니다.
학창 시절 뛰어난 두각을 나타낸 옐런 전 의장은 브라운대학교를 졸업한 후, 예일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이후 하버드대학교 조교수와 연준이사회 경제학자, 캘리포니아주립 버클리대학교(UC 버클리) 교수를 지내면서 경력을 쌓았습니다.
옐런 전 의장은 1994년 빌 클린턴 당시 대통령에 의해 연준 이사로 지명되면서 공직에 입문했습니다.
이후 클린턴 행정부의 경제자문위원회(CEA) 위원장, 샌프란시스코 연방준비은행 총재 등을 역임했습니다.
또 바락 오바마 행정부 시절인 2010년 연준 부의장에 발탁된 데 이어, 2015년 미국 역사상 여성 최초로 제15대 연준 의장 자리에 올랐습니다.
당시 전 세계 금융위기가 어느 정도 수습되고 안정기에 접어든 시기에 연준 의장을 맡아, 과감하게 금리 인상을 단행하며 미국 경제 정책의 방향을 전환했습니다.
친시장주의자라는 평가를 받는 옐런 전 의장은 그러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재지명을 받지 못해, 40여 년 만에 처음 단임에 그친 연준 의장이라는 기록을 갖고 있는데요. 하지만 새로 들어설 바이든 행정부의 재무장관으로 낙점받으면서 다시 미국 경제 정책의 최선봉에 서게 됐습니다.
새 재무장관에게 주어질 가장 큰 과제는 코로나 대유행의 충격에 빠져 있는 미국 경제의 회복을 이끌어내는 것인데요. 옐런 전 의장은 재무장관으로서 미국의 재건을 위해 열심히 일하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습니다.
옐런 전 의장의 남편인 조지 애컬로프 박사 역시 경제학자로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기도 합니다.
뉴스 따라잡기, 오늘은 이란의 핵 개발 역사와 현재 상황 짚어봤고요. 뉴스 속 인물로 조 바이든 행정부의 첫 재무장관으로 내정된 재닛 옐런 전 연방준비제도 의장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지금까지 박영서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