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5월 마지막 월요일은 미국의 메모리얼 데이 입니다. 이날은 미국 군에서 복무하다 숨진 남녀 장병들을 추모하고 그들의 영예를 되새기는 날입니다. 한국의 현충일과 같은 날입니다. 올해 메모리얼 데이는 5월 31일입니다.
이 시간에는 미국 공군의 에이스로, 2차 대전과 한국 전쟁에 참전해 수 많은 적기를 격추하고 끝내는 공중에서 산화한 조지 앤드루스 데이비스 주니어 (George Andrew Davis Jr. )중령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공군 조종사로써 에이스는 최고의 영예입니다. 에이스는 공중전에서 다섯대 또는 그 이상의 적기를 떨어뜨렸을 때 얻어지는, 그래서 매우 드물게 주어지는 영예입니다.
조지 A. 데이비스 주니어 중령은 2차 대전 중 미국 공군에서 전투기 조종사로 복무했고, 그 후 한국 전쟁이 벌어지자 다시 한반도에 출전했습니다. 2차 대전 중에는 태평양 전선에 투입돼 일본 항공기와의 대결에서 7차례의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는 한국전 중 이른바 미그 앨리, 즉 미그기 통로라 불리우는 곳으로 날아가 여러 차례 중국과 소련의 미그기와 공중전을 벌였습니다. 겁없는 비행으로 소문난 그는 한국전에서 F-86 세이버 제트 전투기를 몰고, 중국, 소련, 북한의 미그기 14대를 격추했습니다.
노-12대의 미그기와 공중전을 벌인 마지막 싸움에서 데이비스 중령은 두대의 미그기를 격추시킨 다음 세번째의 미그기를 추격하다 적기의 총탄을 맞고 추락했습니다. 데이비스 중령은 한국전 중 사망한 유일한 Flying Ace, 즉 나르는 에이스였습니다. 많은 훈장을 받은 그는 사망한 후 중령으로 추서됐습니다.
데이비스는 1920년 12월 1일 텍사스 주 더블린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조지 데이비스 씨니어와 어머니 펄 러브 데이비스 사이에서 난 9 남매중 일곱째였습니다. 그는 텍사스 주의 모튼 고등학교를 거쳐 아칸소 주에 있는 하딩 칼레지를 졸업했습니다.
학위를 받은 다음 그는 고향의 농장에서 일했습니다. 데이비스는 무척 침착하고 조용한 성격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지도력이 있었습니다. 성인이 돼 조종사로 공중전을 벌일때 그는 냉철하고 판단이 빨랐습니다. 다른 조종사들과는 달리 그는 술이나 담배를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겁없는 비행으로 소문난 그였지만 겸손한 성격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데비슨은 도리스 린 데이비스와 결혼하고, 1남 2녀를 두었습니다.
데이비스는 미국이 2차 대전 참전을 발표한지 얼마 안된 1942년 3월 군에 입대했습니다. 그는 육군항공대에 배치돼 조종술을 배웠습니다. 약 1년 후 그는 조종사 교육을 마치고 소위로 임관됐습니다.
데이비스가 맨 처음 배치받은 부대는 켄터키 주 보우만 공항에 있는 제 312 폭격기 부대였습니다. 1943년 전투기 P-40 와호크 훈련을 마친 그는 태평양 지역으로 보내져 뉴기니 전선과 필리핀 전선에서 싸웠습니다.
데이비스가 소속된 항공대의 기종은 P-47 전투기로, 일본 공군과 솔로몬 해 상공에서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처음으로 공중전을 벌인 것은 1943년 12월 31일이었습니다. 그의 편대는 ‘아라웨’ 전투를 벌이고 있는 연합군을 엄호하기 위해 출격했습니다. 작전 지역으로 향하던 15대의 데이비드 편대는 연합군을 공격하는 11대의 일본 항공기를 발견했습니다.
미군 전투기들은 즉각 일본 항공기를 기습해 대열을 흐뜨린 다음 공격을 가했습니다. 짧은 공중전에서 데이비스 편대는 8대의 일본기를 격추했습니다. 미군기는 한대가 가벼운 파손을 입었을 뿐입니다.
1944년 2월 3일, 16대의 미군기는 ‘웨와크’ 섬을 폭격하는 미국 B-24를 엄호하는 임무를 띄고 비행에 나섰습니다. 폭격 지점 약 8Km를 앞두고 갑자기 일본 전투기들이 나타났습니다. 미군 전투기들은 즉각 폭격기 보호 대형을 취했습니다. 이때 데이비스는 다른 미군기를 공격하려는 일본기를 발견하고 즉각 총격을 가해 격추시켰습니다. 이날 미군은 7대의 일본기를 격추했습니다. 이 전투 후 데이비스는 중위로 진급했습니다. 이후 데이비스 부대는 태평양 상의 여러 도서 폭격 작전을 엄호하고 일본군 기지를 공습했습니다.
1944년 12월 데이비스 부대는 필리핀으로 이동했습니다. 12월10일, 데이비스 편대는 연합군 병력 수송선을 호위하는 임무를 띠고 출격했습니다.
수송선을 향해 가던 도중 데이비스 일행은 2천 100미터 상공에서 4대의 일본 전투기 공격을 받았습니다. 여러 차례 쫓고 쫓기는 비행 도중 데이비스는 갑자기 4천 6백미터 상공으로 치솟으며 햇볓을 이용해 적기가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기 어렵게 했습니다. 그런다음 아래에 있는 일본기를 기습해 두대를 격추했습니다. 이때 데이비스는 약 70미터까지 적기에 접근하며 공격을 가했습니다.
그후 데이비스 중위는 ‘민도로’ 도서지역 상공을 순찰하는 12대의 선더볼트 비행팀에 배치됐습니다. 순찰비행 도중이던 그해 12월 20일, 선더볼트 편대는 뒤에서 기습하려는 8대의 일본기들을 발견했습니다. 데이비스는 기습적으로 스쳐가며 일본군 조종사에 정통으로 총격을 가해 적기를 떨어뜨렸습니다. 이 교전에서 데이비스 비행기는 일본군 기관총 공격으로 프로펠러와 왼쪽 날개가 파손됐으나 무사히 기지로 돌아왔습니다. 이날 전과로 데이비스는 공군의 비행 에이스 칭호를 얻게 됐습니다.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전날, 미군은 B-24 폭격기로 일본군이 장악하고 있는 필리핀의 클라크 공군 기지를 폭격하는 작전을 벌였습니다. 이때 일본군 항공기가 나타나 B-24에 위협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엄호 비행에 나선 데이비스는 또 일본군 항공기와 공중전을 벌여 두대를 격추했습니다. 이 전과로 데이비스는 실버 스타 훈장을 받았습니다. 그 동안 데이비스는 대위로 진급했습니다.
1945년 5월 데이비스 대위는 미국으로 돌아와, 텍사스 주 샌 안토니오에 있는 굿펠로우 공군기지에서 조종사 훈련교관으로 복무했습니다.
데이비스는 1951년 2월 소령으로 진급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국전쟁에 파병됐습니다. 그는 제 4 요격 전투비행단, 334 편대 사령관으로 임명됐습니다.
한국전 기간 동안 데이비스 소령은 총 60회 출격해 14대의 적기를 격추시키는 대단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는 정확한 명중률로 ‘한방의 데이비스’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그는 미그기가 자주 출몰해, 미그 앨리로 불리우는 압록강 상공 일대를 경계하고 적기를 몰아내는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1951년 11월 27일 데이비스 소령은 8대의 F-86 편대를 이끌고,상공을 순찰하던 중 6대의 미그기를 발견하고 그중 두대를 격추했습니다. 이날 공중전에서 데이비스 편대는 4대의 미그기를 파괴했습니다.
11월 30일 순찰 비행중에는 9대의 중공군 폭격기가 전투기 16대의 호위를 받으며 압록강 상공을 따라 태화도를 폭격하러 가는 것이 포착됐습니다. 이어 벌어진 공중전에서 데이비스는 두대의 폭격기를 파괴했습니다. 이때 데이비스 편대 중 한대가 기체에 손상을 입은채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24대나 되는 적기가 손상을 입은 미군기를 향해 몰려들어었습니다. 데이비드는 정면으로 적진 속을 비행하며 선두에 있는 적기의 사령관을 사살했습니다. 공격을 하려던 또 다른 적기는 대열을 벗어났습니다. 데이비스는 손상을 입은 동료 전투기를 호위해 무사히 기지로 돌아왔습니다.
이날의 조우 이후 중국 공군은 정전이 될때까지 태화도 폭격을 시도하지 못했습니다. 중공군 항공기 격추를 추가해 데이비스는 두 전쟁에서 에이스가 된 미국 최초의 조종사가 됐습니다.
1952년 2월 10일 데이비스 소령은 4대의 F-86 세이버 전투기를 선도하며 북한과 만주의 경계 지역, 강계와 신의주 일대의 공중 순찰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비행 도중 한대가 산소가 떨어져 기지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남은 전투기들은 계속 경계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그러던 중 낮은 고도에서 비행하던 아군 폭격기들을 향해 12대의 소련 전투기 미그15가 고속으로 접근하는 것이 목격됐습니다. 데이비스 팀은 숫적으로 크게 열세였지만 신속히 적기를 향해 날아갔습니다. 데이비스는 적기 대열의 후방으로 달려가며 미그기 한대를 격추했습니다. 적기들의 총탄이 날아오는데도 불구하고 데이비스는 두번째 미그기를 격추했습니다.
이때 데이비스는 속도를 내 미그기 떼로부터 안전하게 빠져나올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계속 세번째 적기를 향해 공격을 가하던 중 그의 세이버 제트기가 적탄을 맞았습니다. 그의 비행기는 회전을 하면서 압록강 남방 약 48킬로미터 지점 산악에 추락했습니다. 한국전 중 60회째 출격에서 생을 마감한 31세 조종사의 시신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의 용감한 공중전 덕에 미군 폭격기는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기지로 돌아왔습니다. 이날의 공격은 데이비스의 60번째 출격이었고 14번째의 적기 격추였습니다.
데이비스는 1953년 중령으로 추서됐습니다. 부인 도리스 여사는 1954년 5월 14일, 텍사스에 있는 리스 공군기지 추도식에서 영예의 메달 (Medal of Honor)을 대신 받았습니다.
두 차례의 큰 전쟁에서 데이비스는 4개의 영예 비행 십자 훈장, 10개의 공군 메달, 3개의 실버스타 메달, 영예 서비스 십자훈장 등 많은 훈장을 받았습니다.
데이비스의 영웅적인 전투 비행은 미국인들에게 잊을 수 없는 공헌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하와이 호놀룰루에 있는 국립 추모비에는 그의 이름이 여전히 실종자로 새겨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