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과 역경을 뒤로하고 이제는 미국인의 한 명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며 살아가는 난민들의 이야기, ‘나는 미국인입니다’. 안녕하세요? 김현숙입니다.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 미얀마의 소수 민족 가운데 하나인 카렌족 출신 난민, 마이라 다가이포 씨의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합니다. 군부 정권의 탄압으로 집을 잃고 떠도는 내부 난민으로 태어난 마이라 씨는 어릴 때 부모님을 잃고, 이 마을 저 마을을 옮겨 다니다 태국과의 국경지대에 있는 살윈 강을 건너 태국의 난민촌에 정착했습니다.
그리고 20대 초반, 마이라 씨는 난민 자격으로 미국으로 오게 됐는데요. 마이라 씨가 처음 밟은 미국 땅은 다름 아닌 미국 최대의 도시, 뉴욕이었습니다.
[녹취: 마이라 다가이포] “미국에서 첫해는 힘들었습니다. 뉴욕은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을 만큼 분주하고, 물가도 비쌌죠. 그래서 식당에서 일하면서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어요. 학비를 벌어야 했으니까요. 그런데 학교생활이 쉽지 않았어요. 강의를 정말 한 마디도 못 알아듣겠더라고요. 결국 녹음기를 들고 수업에 들어가기 시작했어요. 교수님께 허락받고 수업 내용을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해서 집에서 수십 번 들으면서 복습했습니다. 교과서도 너무 두꺼웠어요. 하루에 20~30장은 읽어가야 하는데 밤새 5장도 못 읽은 날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어렵게 시작한 뉴욕생활이었지만, 마이라 씨는 불타는 학구열로 2년제 지역전문대학을 거쳐 4년제 대학에 편입해 정치학과 사회학을 공부하게 됩니다. 특히 난민 출신으로 인권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마이라 씨는 대학교 때부터 유엔 산하 비영리단체에서 일하기 시작했는데요. 이때부터 쉬지 않고 달려온 인권 활동 덕에 지금은 미얀마 난민 문제를 대표하는 인권 운동가 가운데 한 사람이 됐습니다.
[현장음: 인권 행사에 선 마이라 다가이포]
지난해 유엔 여성지위위원회의 한 행사장. 마이라 씨가 강연자로 섰습니다. 10여 년 전, 미국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영어 한마디 제대로 못 했던 마이라 씨지만, 이제는 능숙한 영어로 미얀마 소수민족 여성들의 고통을 알리고 있는데요. 무엇보다 마이라 씨 본인의 인생 이야기는 가장 강력하고 호소력 있는 메시지였습니다.
[녹취: 마이라 다가이포] “저는 인권 행사에 강연자로 종종 섭니다. 처음에 강연자로 나섰을 땐 나의 고통을 다시 떠올려야 하는 게 무척 힘들었어요. 하지만 계속 반복해서 이야기 하다 보니 어느샌가 고통이 치유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물론 완전히 고통이 잊혀진 건 아니지만, 예전보다는 훨씬 쉽게 제 이야기가 나오더라고요. 무엇보다 나의 고통은 이미 끝난 과거지만, 지금도 내가 겪었던 그 고통 속에 사는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부모를 잃고, 학교도 못 가고, 성폭행 당하고, 죽음에 내몰리는 수많은 소수 민족 여성들… 사실 저는 지금 그들을 위해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나의 경험을 말해 줌으로써 사람들이 고통 가운데 있는 그 여성들에 대해 알고 또 그 아픔을 느낄 수 있도록 말이죠.”
현재 ‘미국 버마 운동(US Campaign for Burma)’ 라고 하는 인권단체에서 정책국장으로 일하고 있는 마이라 씨는 여러 인권 행사나 언론에 나서는 것은 물론이고, 미얀마 난민 문제를 위해 연방 의회까지 드나들고 있습니다.
[녹취: 마이라 다가이포] “미국 연방 상원이나 하원, 또 국무부에 일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바쁜지 몰라요. 그렇게 바쁜 사람들이 미얀마 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관련 정보를 모으고, 정리해, 보고 하는 것이 저의 주된 임무입니다.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미얀마의 인권 문제를 알리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정치인들, 지역 지도자들을 끊임없이 찾아가 만나죠. 동시에 미얀마 이민사회가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돕고 있기도 해요. 예를 들어, 미국 정치인들이 미얀마 관련 법안을 통과시키도록 하기 위해 미얀마 이민자들이 어떻게 지역 의원들에게 압력을 넣을 수 있는지, 예를 들어 지역 의원의 연락처나 접촉 방법 등을 가르쳐 주는 일을 하는 거죠.”
마이라 씨는 카렌계 미국인 협회 의장을 맡고 있기도 한데요. 이 단체를 통해 미국에 정착한 카렌계 학생들을 돕고 있기도 합니다.
[녹취: 마이라 다가이포] “매년 카렌 청소년 수련회를 엽니다. 카렌족 출신 고등학생들을 위한 행사인데요. 어떻게 대학에 지원하고, 장학금을 신청하고,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지, 또 어떻게 지역사회의 지도자가 될 수 있는지를 가르쳐주는 수련회입니다. 또한, 카렌족의 뿌리와 역사를 가르쳐 줌으로써 아이들이 미국에 온 것이 우연이 아니라, 민족을 위해 할 일이 있다는 것을 깨우쳐주는, 일종의 동기를 부여하는 행사에요.”
작년에는 미국 중서부 위스콘신 주에서 카렌 청소년 수련회가 열렸다고 하는데요. 이 행사에서 마이라 씨를 도와 강연과 진행과 맡았던 테런스 투 씨는 마이라 씨가 없었다면 수련회가 열리지 못했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녹취: 테런스 투] “마이라 씨는 행사 전반을 책임지는 사람이었어요. 미 여러 지역의 카렌계 지도자들을 만나 행사를 알리고, 도움을 요청했죠. 위스콘신 주의 한 교회를 빌려 수련회를 열게 됐는데, 미국 각지에서 카렌족 출신 난민 청소년들이 참석했어요. 마이라 씨는 이들 청소년을 챙기는 건 물론이고, 강사들까지 손수 다 꼼꼼히 챙기면서 행사를 진행했습니다. 저도 그 강사들 가운데 한 명이었어요. ”
지난 2008년, 12살의 나이에 가족과 함께 미국에 왔다는 테런스 씨는, 10대에 미국에 와서 대학에 진학하기까지, 자신이 경험한 것들을 청소년들과 나누었다고 했는데요. 행자 현장에서 본 마이라 씨는 이런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녹취: 테런스 투] “마이라 씨는 정말 열심히 일하고요. 행사를 하면 거의 잠을 자지 않는 것 같아요. 수련회 동안 마이라 씨가 잠 자는 걸 본적이 없으니까요. 워낙 신경 쓸 일이 많아서 그랬겠죠? 무엇보다 마이라 씨는 그렇게 열심히 일하면서도 돈을 받지 않았습니다. 마이라 씨에겐 돈을 받고 안 받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같은 민족 사람들 특히 청소년을 섬기는 데 더 큰 의미를 뒀기 때문인 것 같아요. 마이라 씨는 늘 그래요. 카렌계 청소년들이 미국에서 제2의 기회를 얻었으면 좋겠다고요. 그러니까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고 열정적으로 일하는 거겠죠.”
테런스 투 씨는 마이라 씨를 인간적으로도 존경한다고 했는데요. 같은 카렌족 난민 출신 누나이자, 인권운동을 함께 하는 동료로서 배울 점이 많다고 했습니다.
[녹취: 테런스 투] “마이라 씨는 저의 멘토, 그러니까 의지하고 따를 선배와 같은 존재예요. 저 역시 어릴 때부터 난민 문제와 인권 문제에 관심이 많았는데, 마이라 씨를 만나면서 꿈꿨던 바를 실행에 옮길 수 있었죠. 마이라 씨는 또 사람을 보는 눈이 정확해서, 무엇을 잘하고 또 잘할 수 있는지 아는 것 같아요. 그런 사람들을 적재적소에 세우기도 하고요. 마이라 씨야말로 카렌계 2세 지도자들을 키우는, 숨어 있는 지도자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강연자로, 난민 2세들을 키우는 멘토로, 밤낮없이 뛰는 열혈 인권 운동가로 살아가는 마이라 씨는 하지만 지금부터가 시작이라고 했는데요. 미국에서 하고 싶은 일도, 해야 할 일도 너무 많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네, 미국에 정착한 난민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나는 미국인입니다', 오늘은 미얀마 출신 인권운동가 마이라 다가이포 씨의 세 번째 이야기와 함께했습니다. 다음 주에는 마이라 씨의 앞으로의 꿈과 계획을 들어보려고 하는데요. 기대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김현숙이었습니다. 함께 해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