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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링필드' 탈출 - 리타 핀 아렌스 (1)


지난 17일 워싱턴 DC에 있는 ‘아시아태평양 장학금 재단(APIASF)’ 사무실에서 업무를 처리하고 있는 리타 핀 아렌스.
지난 17일 워싱턴 DC에 있는 ‘아시아태평양 장학금 재단(APIASF)’ 사무실에서 업무를 처리하고 있는 리타 핀 아렌스.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는 이들을 만나보는 '나는 미국인입니다' 시간입니다.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탈출한 뒤 예일대를 졸업하고 교육자가 된 리타 핀 아렌스를 소개합니다.

리타 핀 아렌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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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과 역경을 뒤로하고 이제는 미국인의 한 명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며 살아가는 난민들의 이야기, ‘나는 미국인입니다’. 안녕하세요? 김현숙입니다.

1970년대, 캄보디아에서는 20세기 최악의 참극으로 불리는 대규모 양민 학살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름하여 ‘킬링필드’. 1975년 정권을 잡은 크메르루주 정권이 이상적인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주창하며 수도 프놈펜에 있는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키고, 지식인과 이전 정부 관계자 등을 학살한 사건인데요. 정권이 무너지기까지 4년간, 170만 명에서 220만 명, 그러니까 캄보디아 전체 인구의 약 ¼에 해당하는 사람이 희생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킬링필드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 가운데는, 살기 위해 국경을 넘은 사람도 적지 않은데요. 오늘 만나볼 주인공 역시 캄보디아 크메르루주 정권 아래에서 탈출해 미국으로 오게 된 난민입니다.

[현장음: 2016 APIASF 서밋]

워싱턴 DC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계장학금재단(APIASF)’의 연례 회의. 재단으로부터 장학금을 받는 아시아계 학생들이 행사장을 가득 메웠습니다. 이 학생들 앞에서 강연을 하고 있는 이 여성. 바로 오늘의 주인공 리타 핀 아렌스 씨입니다.

[현장음: 2016 APIASF 서밋]

때로는 부드럽게 또 때로는 강한 어조로, 교육의 중요성과 교육 개혁을 촉구하는 리타 씨는 지역에서 인정받는 교육 활동가인데요. 이렇게 미국에서 교육가로 연단에 서기까지, 멀고도 험난한 길을 걸어왔습니다.

[녹취: 리타 핀 아렌스] “제 이름은 리타 핀 아렌스입니다. 저는 아이다호 주의 작은 마을 트윈폴스에서 자랐어요. 하지만 제가 태어난 곳은 캄보디아의 캄퐁참인데요. 캄보디아에서 자행됐던 대학살을 피해 미국에 오게 된 난민입니다.”

리타 씨는 부모님과 오빠와 함께 1981년 미국에 오게 됐습니다. 당시 리타 씨의 나이는 4살이었는데요. 크메르루주 정권이 폭정을 펼치던 1977년 태어난 리타 씨에게 캄보디아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지만, 부모님은 늘 두고 온 고향에 관해 이야기하셨다고 합니다.

리타 핀 아렌스(왼쪽)가 지난 1981년 미국행 직전 태국 '카오당' 난민촌에서 오빠와 함께 찍은 사진.
리타 핀 아렌스(왼쪽)가 지난 1981년 미국행 직전 태국 '카오당' 난민촌에서 오빠와 함께 찍은 사진.

[녹취: 리타 핀 아렌스] “저희 부모님은 캄보디아에 내전이 일어나기 전과 후의 삶이 극명하게 달랐다고 말씀하셨어요. 크메르루주가 정권을 잡기 전까지, 저희 부모님은 캄보디아에서 아주 성공적인 삶을 사셨죠. 저희 어머니는 아주 부유한 집안의 딸이었고, 아버지는 대학 졸업 후 캄보디아 정부에서 일하셨는데 경제부에서 수출입 업무를 담당하셨대요. 고위 공무원으로 경제적으로도 부유하고,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 평화로운 삶이었죠. 하지만 크메르루주가 정권을 잡으면서 부모님은 모든 것을 잃었고, 수도 프놈펜에서 쫓겨나 캄보디아 동부의 캄퐁참이라는 지역에 정착하게 되셨어요.”

캄퐁참은 곡창지대로 다른 지역과 달리 굶어 죽는 사람은 많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다른 지역 사람들과 연락을 취할 방법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캄보디아에서 수많은 사람이 처형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합니다.

[녹취: 리타 핀 아렌스] “저희 부모님은 늘 저한테 온 가족의 생명을 살린 복덩이라고 말씀하셨는데요. 그 이유가 있어요. 제가 태어난 지 사흘이 지나고 캄퐁참 마을에 큰 트럭이 한 대 들어왔대요. 트럭운전사는 사람들의 이름이 적힌 목록을 가져와서는 이 사람들을 트럭에 태워 수도 프놈펜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죠. 지금 새 정부가 세워지고 있는데, 목록에 있는 이 지식인들이 새 정부 건립을 도울 거라고 하면서요. 목록엔 어머니 친척 5명이 포함돼 있었는데, 교수였던 고모와 기술자였던 삼촌 그리고 저희 어머니 이름도 거기 있었죠. 하지만 사흘 전에 출산을 한 저희 어머니는 마을 외곽에 있는 트럭까지 걸어갈 수가 없었어요. 결국 저희 어머니만 빼놓고 다른 사람을 모두 태워 트럭이 마을을 떠났고, 어머니는 트럭을 타고 가지 못해 무척 아쉬워하셨죠."

하지만 보름 후, 트럭을 타고 간 사람들의 옷가지만 가족들 품에 돌아왔는데요. 이 트럭은 다름 아닌 처형 트럭으로, 트럭을 타고 간 사람 모두 처형됐던 겁니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한 어머니와 온 가족은 1979년 캄퐁참을 떠나게 됩니다.

[녹취: 리타 핀 아렌스]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하면서 마을을 떠났어요. 크메르루주 정권을 위해 일했던 사람들이 다 도망을 가면서 마을 사람들은 어디든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었고, 저희 부모님은 수도 프놈펜으로 돌아가셨어요. 하지만 과거와는 완전히 달라진 수도엔 여전히 크메르루주 세력이 남아 있었고, 부모님은 캄보디아를 떠나 태국으로 탈출하기로 결심하셨죠. 이 과정에서 저희 큰 언니는 세상을 떠나게 됐고요. 부모님, 오빠와 함께 태국과의 국경지대에 있는 난민촌에 정착하게 됐습니다.”

리타 씨 아버지는 난민촌에서 쌀 배급을 도왔고, 또 다른 난민촌을 거쳐 태국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정치적 난민으로 인정받으면서 미국으로 올 수 있었습니다.

[녹취: 리타 핀 아렌스] “미국 북서부의 아이다호에 정착했어요. 1981년 9월 말에 도착했는데 환경이 너무 달라서 힘들었습니다. 캄보디아는 열대성 기후인데 아이다호는 너무 추운 거예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눈을 봤죠. 하루는 겨울에 눈이 많이 오는데 아버지는 제 손을 붙들고 유치원에 데려가셨어요. 전 너무 추워서 유치원에 못 가겠다며 엉엉 울면서 걸어갔는데 눈물이 다 얼어붙을 정도였죠. 그렇게 눈보라를 헤치며 가는데 차를 타고 지나가던 여성이 멈춰 서서는 우리보고 어디 가느냐고 묻는 거예요. 아버지가 딸을 유치원 데려다준다고 대답하자, 그 분이 오늘 눈 폭풍 때문에 학교가 다 문을 닫을 걸 몰랐냐고 그러는 겁니다. 결국, 그 분이 우리를 차에 태워 집까지 데려다주셨죠.”

어린 나이의 리타 씨에게 미국은 너무나 추운 나라였습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데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는데요. 킬링필드에서도 살아남았지만, 다른 난민들과 마찬가지로 리타 씨 가족의 미국 정착과정은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의 남다른 교육열 덕에 리타 씨는 미국 최고의 명문대학에 진학하게 되는데요. 바로 예일대학교에 입학하게 된 겁니다.

네, 미국에 정착한 난민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나는 미국인입니다', 오늘은 캄보디아 출신의 교육자 리타 핀 아렌스 씨의 첫 번째 이야기와 함께했습니다. 다음 주에는 리타 씨가 예일대학교에 진학하게 된 과정과 리타 씨의 특별한 캠퍼스 생활을 들어보려고 하는데요. 기대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김현숙이었습니다. 함께 해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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